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장기려 박사

첨부 1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환자를 위해 평생 헌신해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로 불린 분입니다. 

산정현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 절제 수술을 하신 분이시고, 
최초의 의료보험 협동조합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습니다. 
진실 사랑 성실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셨습니다. 

자신의 묘비명에 “주님만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내었고 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내었으면 
북한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하고 남한에서 평생 홀로 살며 
신앙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신 분이십니다. 

1975년 정년퇴임 했을 때는 집 한 칸이 없이 자신이 세운 고신대 복음병원 병원 옥상에 마련된
20여 평 관사에서 남은 여생을 마치신 한 평생을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장 장로님의 일화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도둑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도둑이 들어 훔쳐 갈 것이 없자 책을 보자기에 싸다 들켰답니다.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그 책값을 쳐 줄 테니......” 하며 돈을 줘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가 운영하는 청십자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했답니다. 
이 농부는 워낙 가난해서 치료를 끝내고도 입원비가 밀려 퇴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농부는 장 박사를 찾아가 하소연했답니다. 
“원장님, 모자라는 입원비는 돈을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장 박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시오.” 

그 날 밤, 장 박사는 서무과 직원이 모두 퇴근한 다음에 병원 뒷문을 살짝 열어놓았답니다. 
얼마 뒤 농부와 그의 아내가 머뭇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어둠 속에서 장 박사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열심히 사시오.”
 
하루는 장기려 박사가 외출을 위해 병원을 나서는데 나이 많은 거지 하나가 그의 옷을 잡았습니다. 
장 박사는 여기저기 옷을 뒤졌지만 그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갖고 있는 돈이 전혀 없다는 장 박사의 말에 거지 노인은 몹시 실망해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습니다. 

돌아서 몇 걸음을 옮기던 장 박사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거지 노인을 불러 세웠답니다. 
그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었답니다. 
장 박사가 수표를 건네주자 거지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답니다. 

“이 종이 나부랭이가 돈이란 말이오?” 

화가 나 돌아서려는 거지 노인을 장 박사가 붙잡았답니다. 
“이것은 수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돈으로 바꿔줄 겁니다.” 

며칠 후, 장 박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전화가 걸려왔답니다. 
“여기는 은행입니다. 혹시 수표를 잃어버리신 일이 없으신지요?”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웬 거지 노인이 박사님 사인이 된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요?” 
“아! 그것 말이군.” 
“그 수표는 내가 준 것이니 그리 알고 돈을 지불해 주시오.” 

가난한 자를 위해 ‘불편’을 택한 장로님이었습니다. 
참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장로님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아버님도 술꾼이었지만 교회에 나가 장로님이 되셨고 
할머님도 아주 신앙이 좋은 경건한 가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에 경건하게 사신 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