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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복음이 주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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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형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장)

평생 복 받기 원했던 친구가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친구였다. 기와집에서 한번 살아보기를 소망했던 그 친구는 수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 땅을 떠났다. 고3 때 교회 친구들과 함께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에서 기도하다 방언을 받았고, 그 경험이 그를 신학생으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 보수교단 신학교에서 회의를 느껴 이후 진보적인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교회에서 사역을 했지만 제도권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결국 지방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글을 썼다. 그러다 병사했다.

친구는 누구보다도 복에 목말라 있었다. 학생 때는 물론 신학대학을 다닐 때에도 주문같이 “나는 반드시 복을 받을 거야”라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 모두 진심으로 그 친구가 복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세상 복을 받지 못하고 떠났다.

가끔 그 친구가 원했던 ‘복 받는 것’이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최근 조엘 오스틴 목사의 ‘잘되는 나’를 읽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에 이어 이 책에서도 수없이 성공과 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잘되는 나’는 다른 말로 ‘복 받는 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복 안에서 살아 복있는 가문을 세워야 한다는 오스틴 목사의 말에 찬동한다. 긍정과 복을 외치다 보면 긍정적이 되고 복 받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그대로 따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책을 읽다가 그렇게도 복 받기를 소망했으나 세상 복을 받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난 친구 생각을 해 보았다. 주님께 헌신하겠다며 신학교에 간 친구였다. 나름대로 수없이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를 외쳤을 것이다. 그 친구는 복을 받았을까? 그는 세상 기준으로 보면 박복한 사람이었다. 그 친구를 위해서, 아니 그 친구와 같이 복 받기 원하며 수없이 삶을 긍정하며 주님께 발버둥쳐 보지만 결국 박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선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논리가 있어야 했다.

고린도전서 9장을 읽다가 사도 바울의 고백에 눈이 잠시 멎었다. “나는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주는 복’이란 말이 마음에 남았다. 바울은 아마 복음이 주는 복을 받기 위해서 일생을 투쟁했을 것이다. 복음이 주는 복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잘되는 복’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체, 복음 자체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복이다. 그 안에서는 좌절과 실패마저도 복이 된다. ‘복음이 주는 복’을 깊이 이해할 때 마음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왜 복있는 자인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님께 헌신했던 친구는 아마 세상 복은 누리지 못했으나 복음이 주는 복은 누렸을 것이라고 위안해 본다.

우리 삶을 긍정해야 한다. 잘되는 나를 상상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잘되지 않는 나’로 인해 고민할지라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자체가 지고의 복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면 자유할 수 있다. 좌절과 희망, 실패와 성공 모두를 뛰어넘는 넉넉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복음이 주는 복을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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