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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부디 당신과 나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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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환 (동화작가)

주일 아침이었다. 원고 마감에 쫓기다 예배 시간에 늦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교회로 가는 길, 붉게 녹슨 대문 앞에 할머니가 처연히 앉아 있었다. 스무살 쯤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할머니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소소곡절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어색한 사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중뿔난 심사를 누르자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걸음을 멈췄다. 저기요. 할머니가 집에 들어가셔야 하는데요. 문이 잠겼대요. 할머니와 함께 있던 여학생이 높은 담장을 쓰윽 올려다보며 말했다. 담장 너머로 늙은 대추나무가 보였다. 말이 필요 없었다. 가방을 엑스자로 멨다.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국의 육상 영웅 칼 루이스를 떠올리며 힘차게 힘차게 도움닫기를 했다. 한 번에 올라야 했다. 할머니 앞에서 쪽팔리면 큰 일이니까. 팽팽한 긴장을 넘어 새처럼 부우웅 날아 올랐다. 거뜬했다. 어린 딸아이에게 자랑하려고 평소에 만들어 놓은 알통이 내겐 있었다. 담장 위에 한 발을 걸치고 할머니를 보고 씨익 웃었다. 앞니 빠진 할머니도 호물호물 웃었다. 장독을 지긋이 밟고 마당으로 사뿐 뛰어 내렸다. 문을 열었다. 여학생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 이제 들어가세요. 저 가겠습니다.

아냐 아냐….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셨다. 할머니는 몸뻬에서 예쁜 지갑을 꺼내셨다. 곶감만한 동전지갑이었다. 자주색 지갑 위 돋을새김 나비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푸드득 날아오를 것 같았다. 이걸로 과자 사 먹어. 너무 고마워서…. 할머니는 오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건네셨다. "아니에요, 할머니. 저요, 과자 많이 먹고 왔어요." 꾸벅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교회로 갔다.

예배 시간 내내,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 손수레에 놓여 있던 헌 종이 박스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팔순을 넘긴 듯한 할머니 얼굴에 깊게 고랑진 주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얼마 전, 지하철에서 모르는 척 외면했던 껌 파는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할머니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할머니 얼굴에서 내 얼굴이 보였다.

할머니 얼굴에서 당신 얼굴이 보였다. 삶의 환한 궁극에서도, 늙어질 당신과 나의 모습은 보일 것이다. 쉼 없이 자전하는 삶 속에서 부디 당신과 나만이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를. 인간에 대한 연민을 끝끝내 놓지 않기를. 시간은 허허로이 무너지고 당신과 나 또한 늙을 것이다. 등 굽은 미래를 지나는 당신과 나의 모습이 금세라도 잡힐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려고 눈을 꼭 감았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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