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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소설 <우리의 사랑은....> 제11회 ~ 제15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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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리의 사랑은....>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29회까지 연재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되었었는데....
지난 번의 게시판 실종사건으로 다 사라졌더군요.
그래서 30회를 연재하려고 하니까 처음 보시는 분들에게는
뜬금없이 여겨질 것 같아서 이렇게 5회씩 묶어서 다시 싣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간단한 평들도 적어주세요.



 




제11회 - 운명적인 사랑?....


수진은 그때 갑자기 머리 속이 환해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었
다. 그리고 '그렇구나'하는 깨달음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었다. 그것은 감동이었고, 그것이 은혜였다. 그 순간 이후부터 수
진은 매주 주일의 대학부 예배 시간이, 설교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
었다. 그것은 비단 수진 뿐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대학
부의 출석 숫자는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수진이 3학년이 된 해 3월에 전도사님은 오랫동
안 가져왔던 하나의 구상을 실행에 옮기셨다. 그것은 예비조장 훈련이었
다. 4학년이 된 조장들과 간사님과 의논해서 3학년 가운데 예비조장을 8
명을 뽑아 전도사님이 직접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수진도 그 예비조장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훈련은 아주 철저하고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그것
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투자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필요에 의해 모이는 모임들도, 심지어
조장, 임원모임조차도 늘 참석률이 저조하고 지지부진해져서 문제였는데
1년이 지난 지금 시작되는 예비조장 모임은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는 데
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참여를 원하고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은 전도사님에 대한 신뢰였고 기대였다.
예비조장 모임은 토요일 오후 4시에 모여서 밤 10시가 넘어서야 마쳤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서 지루하게 늘어지는 모임이 결코 아니었다. 매
주 2권씩의 책을 각 사람이 파트별로 나누어서 요약해서 발표하고, 그 주
에 자신에게 주어진 성경본문을 미리 분석해서 발표하고, 삶을 나누고,
기도하고....정말이지 언제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
어 졌다. 그리고 다음 날 주일에는 대학부 예배를 마치고 난 오후 4시가
되면 다시 조장들과 함께 모여 더욱 심도깊은 영성훈련과 기독교 가치관
함양을 위한 구체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그 주의 뉴스를 주제별로 분석하고, 영화, 음악, TV프로그램을 지정해서
본 후 비평하고, 대학부 지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이름을 외우며 기도하
고 다음 일주일간 묵상할 QT 본문들을 미리 통독하고....

과일과 차가 날라져 왔다. 잠시 그렇게 모여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은 후
에 형제들은 다시 전도사님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형제들만의 대화
를 위해서였다. 수진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눌까 궁금한 마음이 한번씩
들었다. 사모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글세....다른 자매들 생각은 어때?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발견하는 것과
하나님이 정하시는 배필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같은 의미일까, 다른 의
미일까? 같다면 얼마나 같으며, 다르다면, 그럼 마냥 하나님이 배필을 정
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배
필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지?>
역시 단골주제인 결혼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필이 팍 오지 않을까요?>
모두들 말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2학년 혜영이었다.
<가슴이 저미는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이번엔 3학년의 은미였다.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그런 생각은 많이 해보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나님께
서 내 짝을 가르쳐 주실는지요. 혹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데 내가 모
를 수도 있을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하고요.>
문영이었다.
수진도 곰곰이 그 문제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운명적인 사랑?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 이미 예정되어 있
을 나의 반쪽....하지만 그 반쪽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혜영의 말
처럼,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필, 느낌이 어느 정도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수진이 동기 자매들과 같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기도모임에서도
늘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기
도하라는 충고에 따라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문영은 키가 몇 센티미터
이상, 쌍꺼풀은 꼭 있어야 하고, 본인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시
부모가 되실 분들도 교회를 다녔으면....하면서 정말 자잘한 항목에까지
기도수첩에 적어놓고 있었지만, 수진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수진은
그저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수진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만 자신의 기도수첩에 적어놓았을 뿐이었다. 수첩에 적진 않았지만 수진
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수진 자매.>
사모님이 수진을 부르셨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 표정인데?>
<예? 아니에요. 그냥, 저....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어떤 배필을 정해두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혹시 그 배필을 제대로 못 알아보
고 다른 사람과 맺어지는 경우도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그냥
막연히 걱정이 돼요.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 지도 잘 모르겠고....>
수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요. 누구나 진지하게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
람이라면 그런 걱정이 생길 거예요. 어떤 사람을 만날까? 그 사람이 하나
님께서 예비해두신 바로 그 사람일까? 누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지
만, 주위를 보면 그렇지 못한 부부들도 많고....참, 어렵지요?>
<에이, 그냥 혼자 살아야겠어요. 이렇게 골치가 아플 줄이야. 남자가 없
으면 어때요. 그냥 혼자 깨끗하게 살면서 하나님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되
지요.>
역시 문영이 다운 말이었다.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문영 언니, 나는 언니가 언니들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할 것 같
은데요?>
혜영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러자 곧바로 문영이 반격했다.
<혜영아, 너야 말로 아무리 빨리 시집가고 싶어도, 절대 언니들보다 먼
저 시집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그
다음은 말 안해도 알겠지?>
웃음이 더욱 커졌다. 혜영도 입을 삐쭉이며 툴툴거리더니 웃고 말았다.
수진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골치아프고 두려운 일인 것은
사실인 것 같아. 하지만 혼자 산다는 것은 왠지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면서 간사님이 얼굴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제12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2회 - 내일 인사드리러 갈까?


<한참 이야기가 재미있으신 것 같은데, 어쩌죠? 기도회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웃음이 아직 얼굴에 가득한 채로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요. 벌써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그리고 자매들을 둘러보며 말씀을 이으셨다.
<그래요. 오늘의 주제는 다음 번에 더 많이들 고민하고, 생각들을 정리해
서 다시 나누기로 합시다. 그러면 되겠지요?>
<예!>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치고는 그것이 또 재미있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
렸다. 안방에서 형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들어갔다 갈래, 오빠?>
윤정이 대문 앞에서 물었다.
깨끗하게 단장된 2층 주택이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해 대무을 열고
마당을 지나 계단을 몇 계단 올라야 현관으로 갈 수 있었다. 대문 옆의
차고는 셔터가 내려진 채였다. 담너머 보이는 마당의 꽃들과 나무들은 손
질이 잘 되어 있었다. 주위의 다른 집들과, 또 선후의 집처럼....
<아니야. 시간도 늦었고, 좀 피곤하기도 하고....>
선후가 대답했다.
<많이 피곤해? 내가 태워줄까?>
윤정이 다시 말했다.
윤정에게는 아버지가 대학입학 선물로 사준 빨간 스포츠카가 있었던 것이
다. 하지만 선후를 만나면서 부터는 학교에 갈 때 거의 타고 다니지 않았
다. 학생 신분으로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걸 선후가 탐탁히 여기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도 윤정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선후를 잘 보고
있는 한 가지 이유였다. 윤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며칠 전에 윤정으로부
터 선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서 빨리 집에 한 번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라고 재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됐어. 너도 피곤하잖아. 그러면 내 마음도 불편하고....>
<왜 불편해?>
<그냥....여자가 남자를 바래다주는 게 어딨어? 집에 들어가서 괜힌 걱정
하는 것도 싫고....>
<내 걱정을 하긴 하나 보네?>
윤정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걱정마. 이래뵈도 베스트 드라이버니까 말야.>
<아니야, 됐어.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 얼른 들어가.>
하지만 윤정은 들어가기는 커녕 오히려 선후의 팔에 더욱 매달리며 말했
다.
<오빠, 내일 일요일인데 뭐 할거야?>
<글세, 아직 정해진 계획같은 건 없는데.>
<그럼, 말 나온 김에 내일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내일?>
선후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일은 좀 힘들겠는데. 너무 갑자기잖아. 아직 너도 우리 집에 인사하지
않았고....>
그러자 윤정이 선후의 말을 끊었다.
<뭐가 갑자기야? 그럼 내일은 내가 오빠 집에 인사드리러 갈까? 뭐, 어
때? 그냥 편하게 들러서 '저는 윤정이라고 하옵니다. 기체후 일양만강 하
시옵니까?'라고 인사드리면 되잖아. 오빠네 부모님들도 날 아시잖아.>
목소리를 내려깔며 사극조로 치마를 펼치고 무릎을 약간 구부리며 하는
절을 흉내내는 윤정의 모습에 선후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시지. 빨리 소개 좀 시키라고 난리시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내일은 좀 그러니까, 다음 주에 오는 걸로 하자. 됐지?>
<핏, 되기는 뭐가 돼?>
윤정은 혀를 낼름하고는 팩 돌아서서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선후는 그런 윤정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
후는 토라진 여자친구를 달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윤정도 그걸 알고 있
었다. 그리고 윤정 스스로가 언제나처럼 토라진 감정을 추스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문에 붙어있는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예요. 윤정이에요!>
윤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얘는 귀청 떨어지겠다. 좀 살살 말해!>
윤정의 어머니신 것 같았다.
<빨리 문이나 열어줘, 엄마!>
윤정이 괜한 짜증을 냈다.
<알았어. 기집애 성깔머리 하곤, 쯧쯧....>
그리고는 삣 소리가 나더니 대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잘 자....>
선후가 어정쩡하게 서서 인사를 했다.
대문이 쾅 하고 닫혔다. 그리고는 안에서 소리가 났다.
<오빠도 조심해서 가. 오늘 밤에도 내 꿈만 꾸고!....잘 가, 오빠.>
선후는 씨익 웃으며 뒤돌아 서서 오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약간의
내리막 길이었다. 잠시 후, 왠지 뒤통수가 근지러워서 뒤를 돌아다 보니
윤정이 다시 대문을 열고 나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선후
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저으며 얼른 들어가라고 신호했다.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불빛이 비취더니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
를 번쩍거리며 비켜달라는 신호를 했다. 선후는 조금 옆으로 비켜주면서
윤정에게 다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고, 윤정도 마지못해 대문 안으로 들
어섰다. 그러고도 잠시 더 대문에서 얼굴만 내밀고 손을 흔드는 것이 보
이더니 이윽고 대문이 닫혔다.
선후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금 피곤했다.

<제13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3회 - 간사님이 고맙기는 했지만....


영화 보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저녁 먹고, 생맥주 한 잔 하고....수철
과 정민과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오는 길의 카페에서 차 한잔 하고 가자
는 윤정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한 시간쯤 더 보내고....즐거운 시간들이
었지만 왠지 선후는 허무함이 느껴지며 맥이 풀렸다. 저만치 앞에 지하
철 입구가 보였다.

<내가 집까지 태워줄까?>
간사님의 말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간사님도 피곤하실 텐데 빨리 들어가서 쉬셔야지
요. 그냥 저는 지하철 역 입구까지만 태워주세요.>
수진이 말했다.
모두들 몇 대의 차에 웅성거리며 나누어 타고 있었다. 방향이 같은 사람
들끼리 서로 어디까지 가며, 어디에서 내려주면 되는지 얘기해 주고 있었
다. 간사님과 방향이 같은 형제, 자매들도 있었다. 오늘 따라 같이 지하
철을 타고 갈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수진은 그런 모두의 모습을 둘러보
다가 간사님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늘 자신을 챙겨주는 간사님이 고맙
기는 했지만 집의 방향이 정반대 인데다가 자꾸 신세만 진다는 생각에 부
담이 됐다. 어수선한 소란은 곧이어 작별인사로 바뀌었다.
<안녕히 계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뵈요, 전도사님.>
<모두들 수고했어.>
<내일 준비해야 하는 것 잊지마.>
<잘 먹고 갑니다, 사모님.>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또 와요.>
<너, 그 차 타고 갈거야? 어디로 가는데?>
<빨리 빨리 차에 타세요.>
<안녕히 계세요.>
<이 차가 아직도 굴러가네?>
<야, 야, 아직 10년은 더 거뜬한 차를 보고 무슨 소리야?>
<안녕.>
<누나 운전 솜씨를 믿을 수 있을 지 몰라.>
<그런 소리 할려면 내려라.>
<안녕.>
<잘 가요.>
<조심해서 가세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인사말들도 떠나는 차들의 엔진소리로 하나씩
변해가면서 사그라 들었다. 수진이 탄 간사님의 차가 가장 늦게 출발하였
다. 수진 일행은 아파트 입구에 서서 자신들을 배웅하는 전도사님에게 마
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저 두 분은 너무 행복해 보이세요.>
뒷좌석에 탄 2학년 지수가 손을 흔들며 전도사님 내외분께 인사를 하다
가 앞으로 바로 앉으며 말했다. 그 말에 모두들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사님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내 친구가 말씀이 너무 좋다고 칭찬하는 목사님이 계셔서 함께
그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 물론 말씀
이 너무 좋았지.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 댁으로 저녁 초대를 받았어. 모두
들 갔지. 오늘 우리가 모인 것보다는 좀 작은 수였지만 그래도 20명 정도
되었었는데....>
간사님은 차선을 바꾸기 위해 룸 밀러와 사이드 밀러를 흘끗흘끗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날, 사모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어. 큰 아이는 대여섯 살쯤 되
어 보이던데, 주방에서 일하시는 사모님 치마꼬리를 붙잡고 졸졸 따라다
니고, 작은 애는 포대기로 들쳐업으시고....저녁 먹고, 디저트 먹고, 그
이후의 대화시간 동안에도 내내....한, 서너 시간은 족히 됐을거야....그
시간 동안 내내 혼자서 음식 장만하시고, 설거지 하시고....다른 형제,
자매들은 그냥 방 안에서 목사님의 얘기를 듣고만 있으면서 또 그걸 당연
히 여기는 눈치더라고. 아마 지금까지 목사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쭉
그래 왔겠지....>
<어머....>
수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였다.
간사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난 도무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못 앉아있겠더라고. 말씀도
귀에 안 들어오고....그래서 화장실 가는 척, 슬쩍 일어나 나와서 주방의
사모님을 좀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사모님께서는 그냥 얼른 들어가라고
등을 떠다미시더군. 그런데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너무나 지쳐
보이셨어. 그 얼굴에서는 기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 왠지
화가 나더라고....>
<옛날 분들은 거의 대부분 다 그렇잖아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 일
날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우리 전도사님 같이 젊으시고 의식이 깨어있는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수진이 말했다.
<맞아요. 내 남동생만 해도 벌써 그렇다니까요. 남자라는 게 무슨 큰 벼
슬인 줄 알아요, 글세.>
지수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뒷자리의 지수 옆에 타고 있던 병찬이 익살을 떨어 모두들 웃겼
다.
<아, 나도 그런 집에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우리 집은 여자들 파워
가 너무 세서 내가 기를 못 펴고 살아요. 우리 부모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귀한 줄을 모르신다니까요. 우리집에서 나는 완전히 머슴이자 가정
부라니까.>
<하하하하....>
<호호호호....>
<호호호호....>
<웃을 일이 아니에요. 직접 당하는 내 입장이 되 보라니까. 딴 집 누나
들은 끔찍이도 남동생을 위한다더니 우리 집은 완전히 거꾸로예요. 나는
아마 병찬렐라일 거예요. 계모를 따라온 누나들한테 구박받는 병찬렐라.
아~ 언제쯤 공주님이 나타나 나를 구해줄까....아~>
모두의 웃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웃음 소리가 사그라들자, 간사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14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4회 - 간사님의 서운함을 애써 모른체....


<아무튼 나는 그 성경공부 모임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어. 더 이상
그 목사님을 뵐 수가 없더라고. 자꾸 사모님의 그 지친 얼굴이 떠올라서
말야. 생각들 해 봐. 목사의 사모가 되는 자매들은 그래도 교회에서 가
장 신앙심 깊고, 성실하게 열심히 교회에서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는, 한
마디로 능력있는 자매들이 거의 대부분이잖아.>
<그렇지요.>
수진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능력있는 자매들이 결혼하면서 바로 그렇게 단순한 부엌데기로 전
락해버리면 얼마나 큰 손실이야. 아마 그 교회의 자매들이 가장 큰 손해
를 보게 되겠지. 자기 교회 사모님의 조언과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
니까 말이야. 우리 전도사님 좀 봐. 가능한 한 자매들과 사모님이 함께
할 수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하시잖아. 그것이 얼마나 자매들에게 큰 도움
이 되겠느냔 말야. 안 그래, 수진아?>
<맞아요. 간사님. 너무 너무 큰 도움이 되요. 우리 사모님이 그 목사님
사모님처럼 그렇게 사셔서 그 동안의 수많은 대화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찔해요.>
<맞아요, 언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수가 수진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나도 나중에 우리 마누라한테 그렇게 할 거예요. 전
도사님이 사모님한테 하시는 것처럼 말이에요.>
병찬의 말에 다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나도 그렇게 할 거라니까 그러네. 야~ 누군지 정말 나한테 시집오는
여자는 좋겠다~>
모두의 웃음이 커졌다.
그래, 나도 그렇게 아내를 배려해줄 수 있는 신랑을 만나야지, 수진은 웃
으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생각은 다시 짧은 기도로 바뀌었다.
저 앞에 지하철역 입구가 보였다.
<간사님, 저는 저기서 내려주시면 되요.>
<밤도 깊었는데 내가 태워줄게.>
<아니에요. 병준이랑 수지나 잘 태워다 주세요. 방향이 정반대잖아요. 피
곤하실 텐데....그리고 우리 집은 지하철에서 내리기만 하면 금방이잖아
요.>
간사님의 얼굴에서 서운한 빛이 잠깐 보였지만, 수진은 애써 모른체 했
다. 이윽고 차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멈추었고 수진은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언니, 잘 가.>
지수가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했다.
병찬의 목소리도 들렸다.
<누나,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너희들도 잘가.>
수진도 답례를 하고 나서 간사님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간사님, 오늘 너무 수고가 많으셨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들어가서 쉬어. 그럼 내일 봐.>
<예.>
수진은 차가 출발하여 안쪽 차선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지하철로
발을 옮겼다. 시계를 보니 11시 5분이었다.

선후는 지하철 노선이 겹치는 환승역에서 전동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
다. 아직도 사람이 꽤 많았지만, 이제 갈아타는 노선의 전동차에는 사람
이 별로 없을 것이다. 선후는 어슬렁 어슬렁 긴 통로와 계단을 걸어갔다.
저 만치 아래에서 삐리리릿 거리며 전동차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자 선후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느려졌다. 다
음 차를 타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선후가 승강장의 화살표 앞에
섰을 때 방금 출발한 전동차의 어슴푸레한 꽁무니의 불빛이 마악 꼬부라
져 사라져가고 있었다.
선후는 자신의 신발 앞꽁무니를 잠시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오
른쪽 어깨에 맨 가방을 왼쪽 어깨로 옮기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그러다 문득 지하철 표를 내가 어느 주머니에 넣었더라, 하는 생각에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게 뭐지? 선후는 바지 뒷 주머니에 꽂혀진 빳빳한 종이를 꺼내들었다.
아까 낮에 교회에서 나온 여자가 준 전도책자였다. 선후는 그 책을 왼손
으로 옮겨들고는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오른쪽 주머니 속의 동전 주
머니 속에 쏙 들어가 있는 지하철 표를 찾아내어 한번 흘낏 보고는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어슬렁 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선후
가 목표로 삼고있는 곳은 승강장으로 내려오는 계단 근처에 있는 쓰레기
통이었다. 선후에게 있어서 그 전도책자는 잠시의 눈길도 주기 아까울 만
큼 관심밖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인 작은 책자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좀 더 가까운 역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갈아탈 필요가 없는 환승
역이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물론 아빠와 엄마가
수진을 야단치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들
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던 수진 앞에 어떤 아줌마가 예닐곱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바쁘게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입에는
빨대가 꽂혀진 야구르트 통이 있었다. 엄마인 듯한 그 아줌마의 손에 이
끌려 내려가면서도 아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뒤에서 오는 수진
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수진은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
만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야구
르트 통을 땅바닥에 버리는 것이었다. 수진이 보기에 그것은 틀림없이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었다. 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
의 손을 잡고 가고 있는 아줌마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수진은 계단 위에 떨어져 있는 그 야구르트 통 앞에 멈춰서서 그것을 주
워 들었다. 역시나 빈 통이었다. 수진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것을 주워
드는 동안 왠지 자기의 이런 행동이 반복된다는 그런 느낌이 든 것이 이
상했다. 이 기분, 이 동작....분명히 똑같은 분위기의 느낌이 드는 행동
을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전에 지하철 역에서 쓰레기를 주웠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
면서 수진은 야구르트 통을 손에 들고 계단 아래로 보이는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제15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5회 - 마주친 두 사람은....


야구르트 통을 잡고 있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끈적끈적함이 느껴졌다.
수진은 얼른 버리려는 마음에 더욱 발걸음을 빨리 해 계단을 내려갔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쓰레기통이었다. 선후는 왼쪽 어깨의 가방을 한 번
더 추켜올리며 오른손의 소책자를 약간 들어올렸다. 앞을 보니 계단에서
허겁지겁 뛰어 내려오던 어떤 여자가 쓰레기통에다 무언가 버리는 것이
보였다. 그 여자는 쓰레기통에 무언가를 버린 후에 선후 쪽으로 빠른 걸
음으로 다가왔다. 선후는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길을 비켜주기 위해
왼쪽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그 여자도 동시에 선후 쪽으로, 즉 그녀 쪽에
서는 오른쪽으로 같이 비켜서는 것이었다. 당황한 선후가 다시 오른쪽으
로 비켜서자 그녀도 또 그쪽으로 움직였다. 선후는 제 자리에 멈추서서
상대방이 먼저 지나가도록 하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그 자리에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머쓱해진 선후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먼저 지나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저....먼저....>
하지만 선후는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만 입이 얼어붙어 버렸던 것이다. 바로 점심 때 시내에서 그에게 지금
그가 버리려고 하는 소책자를 준 그 여자가 아닌가. 선후는 슬며시 손에
든 소책자를 등 뒤로 감추면서 다시 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야구르트 통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약간 고개를 숙이며 걷던 수진은 앞에
서 오던 왠 남자와 마주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자 그 자리에 서
서 상대방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약간 몸을 옆으로 틀면서 멈춰섰다. 그런
데 그 남자는 뭐라고 입 속으로 웅얼거리더니 몸을 움직여 갈 생각을 하
지 않는 것이었다. 수진은 고개를 들며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점심 때 시내의 피자집 앞에서 만
났던 그 키 큰 남자가 아닌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마침내 그 남자가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예?....예....>
수진도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또 다시 어색한 침묵....

선후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안....녕하세요? 라니, 이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인가!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선 채로 어색한 침묵과 뜻밖의 당황에 잠시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었다. 또 다시 선후의 입술이 움직였다. 선후는 뭔가 말
을 하는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저....여기서 타시나 보지요?>
<예?....예....>
앞에 선 여자가 이상한 듯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인가!
선후는 자신의 입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어
색한 침묵을 선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텅 비어버린 머리 속
에서 자꾸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고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게 된 것이었
다. 선후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과
는 반대로 또 다시 그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저도 여기서 타거든요....>
<예....그렇군요....>
앞에 선 여자의 눈빛에 다시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그
러면서 그녀는 선후의 뒤쪽과 자신의 뒤, 계단 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
이었다. 선후는 그 뜻을 눈치챘다.
<아....그렇지요....타는 곳은 저쪽이지요....>
<예....그렇지요.....>
아, 얼마나 바보같은 말들의 연속인가....선후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가 떴다.

수진은 앞에 선 키 큰 남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낮에 시내
에서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보였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당황하고
있을까? 그랬다. 분명 이 남자는 지금 당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당황스럽기는 수진도 마찬가지였다. 전도사님 댁에서도 생각이 났었
고, 조금 전에 간사님의 차를 타고 올 때와 지하철 역에 들어설 때만 해
도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던 사람을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 남자는 지금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왜 그러지?
그가 또 다시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집이 저와 같은 방향인 것 같군요.>
<예?....예....그런 것 같네요. 집이 어디신가요?>
수진은 이 남자가 왜 이리 버벅거리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조금 전에
야구르트 통을 집어들 때의 그 느낌이 왜 낯익은 느낌이었는지 알아차렸
다. 그것은 바로 시내에서 이 남자의 일행과 만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버린 소책자를 집어들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수진은 지금도
그 소책자를 집어들 때 얼굴을 찌푸린 기억과 허리를 구부려 집어들 때
의 그 씁쓸함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에 야구르트 통을
집어들 때의 바로 그 표정과 그 느낌이었다.
수진은 앞에 선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키 큰
남자는 지금 자기 집은 어디어디라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수진은 얼른 대꾸를 했다.
<아....그러시군요. 거기라면 저희 집 바로 다음 역이시네요.>
<아....그러세요? 그랬구나....>

<제16회에 계속 이어집니다.>






크리스마스
1회부터 단숨에 모두 읽어버렸네요..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나의 신앙생활과 전도, 교회 안의 사람
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또...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2002/02/26    


이용재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기쁘네요. 저 역시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글
을 쓰고 있답니다. 하지만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해서 꾸준히
써나가기가 힘드네요. 많이 응원해주세요.^ ^  20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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