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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아유, 저웬쑤 웬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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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종교이며, 기독교 신자란 그의 가
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형제 여러
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
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빌3:13-14상)”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라고 했건만
나는 아직 목표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정말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게 여의치 않다. 예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
금방 동의하고 따를 수 있겠다 싶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조건을 달거나
상황이 달라져야 지킬 법한 것도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다고
판단되는 말씀도 있으니 문제다. 살아갈수록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하겠다
고 생각되는 말씀이 많아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
(마5:44)는 것이다. 인생의 경험이 더해 갈수록 누구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해도 다 못하
겠는데, 왜 원수까지 사랑하며 살라고 하는지 나의 능력으로는 안 될 것 같
았다. 솔직히 말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하는 그 원수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 그
런데 예수의 말씀이니 거부할 수도 없고 더욱 괴롭기만 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말씀대로 살기도 어렵지만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
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또 내게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 온 나의 잘못된 믿음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성숙하고 고차원적인 믿음을 가진 자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
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필수 조건’이라고 했
다.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5:45상)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빼버리면 기독교 신앙은 다른 윤리 도덕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원수같이 생각되는 자들을 많이 미워도 해 보고, 어떤 때는 무관
심도 해 보았다. 그러나 미워하면 할수록 저쪽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나만 더 괴로우니 어찌된 일인가. 게다가 두통, 고혈압, 위장병 같은 여러 가
지 신경성 병만 생기게 되니 답답하기만 했다. 무관심하려 해도 잘 되지 않
는다. 너무 미운 사람은 무관심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 현상인 것 같다. 그래서 살아가면 갈수록 이 원수 문제를 해결
하지 않고는 나의 마음에 평화가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원수를 사
랑하지 않으면 나의 삶은 미워하는 마음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사랑해야 할 원수란 어떤 자일까?

나의 재물에 손해 입히고 명예에 상처를 준 자? 아니다. 그런 부분적이고 외
적이며, 일시적인 것보다는 나의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앗아갈 수 있는 그
자가 진짜 원수일 것이다. 예수는 그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 식구라고 가르
쳐 주셨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
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마10;35-36)

또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평화를 회복하
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10:34)

그런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백성을 평화의 도구
로, 복의 근원으로 살기 원하심이며 그것이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
일한 길이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나의 삶을 돌이켜보며 내가 사랑하고, 위해 기도해야 했던 원수는
실제 누구였을까? 생각해 봤다. 나의 행복을 위협하고, 또 나를 죄의 노예가
되게 만든 자가 누구였나? 그 원수는 다름 아닌 내 부모요 형제며 내 자식과
아내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떨 때는 내가 섬기는 교회 목사가 나의 원수이기
도 했다. 내 인생에 다른 어떤 부귀 영화가 있다해도 이들과 화평하지 못하
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은 사랑해야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행
복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나의 원수는 경쟁, 원망, 증오의 대상이 아니
라 사랑의 대상이다. 원수란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이지만 그 없이 내가 행
복할 수 없으니 복의 원천이기도 하다. 자식이 너무 애를 먹이면 ‘원수 덩
어리’ 라고 하고, 그래서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까지 있다. 그런데 정말
그 원수 같은 자식이 없는 삶이 더 행복할까?

미국의 교수 열 네 사람이 평생 인도 빈민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
며 살았던 마더 데레사 수녀를 찾아가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
다. 교수 중 한 사람이 수녀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말 한마디를 부탁했는데,
그 수녀는 “아내와 자녀에게 미소를 지으십시오. 가정에서 서로 시간을 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충고 같
다. 나의 경험을 되돌아봐도 교회나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에게 미소 짓기
는 쉬웠지만 가정에서 아내나 자식을 미소로 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가족을 미소로 대한다는 것이 바로 그 원수사랑임을 충분히 공감하며
또 가족을 사랑하며 함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작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케
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바로 ‘원수사랑’이다. 원수였던 나를 당신의 아
들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한 감격과 현재 내 속에 살아 계
신 그 분을 믿는 믿음만이 이 땅에서 원수를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한다. 하
나님은 사랑이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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