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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앞 못보는 그녀가 위험한 산비탈로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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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형두(연세대 법대 교수) 

성탄절을 앞둔 주일 아침, 평소와 달리 조금 일찍 서둘러 남산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퇴계로에서 남산케이블카 방면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해 급가속을 해야만 한다. 속도를 내어 올라가는데 횡단보도도 아닌 중앙선 부근에 하얀 스틱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급정거했다. 스틱으로 연신 아스팔트 도로를 두들기는 것으로 보아 시각장애우임이 분명했다. 도로 중앙에 차를 세우고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소방서를 찾고 있다고 한다. 마침 서울시 소방방재본부가 건너편에 있기에 가는 방향으로 그대로 가면 된다고 말해주고, 차가 없을 때 건너도록 해주었다.

사고가 날 뻔했던지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잠시 후에 출발하였다. 그런데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편을 보니 그 여성은 소방방재본부로 가지 않고 계속 남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니다 싶어 차를 돌려 그녀 가까이에 세웠다.

그녀의 목적지는 소방서가 아니라 한맹교회라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한맹교회는 남산 3호 터널 입구 왼편 산 쪽에 있는 교회로서 그녀는 길을 완전히 잘못 들었던 것이다(물론 한맹교회 밑에도 소방서가 있기는 하다). 아침 일찍 채비를 갖춰 부산에서 올라온 그녀는 서울역에서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고 명동역에 내렸다고 했다. 명동역에서 소방서만을 찾다가 정반대 방향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 위험천만한 길을 이리저리 건너 다녔던 것이다.

그녀를 태우고 물어물어 한맹교회를 찾아 갔더니 교회 진입로는 거의 45도가 넘는 급경사의 수 십개 계단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비장애인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그 계단을 스틱을 두드려가며 내려가는 것을 보고 다시 교회로 향했다.

“아빠, 좋은 일 했어요”라고 말하는 아들 녀석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이리저리 밀리다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강물 위의 나뭇잎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어떤 길인데…그녀가 스틱에 의지하여 건넜던 그 길은 내리막인데다 굽어져 있어서, 빠른 속도로 차를 모는 운전자가 반대편 차선에서 내려오고 있었다면…’. 예배시간 내내 그녀 생각에 설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끼익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대학 때 청와대 근처에 있는 국립서울맹학교에서 잠시 봉사한 적이 있다. 인왕산 자락에 있는 이 학교는 농학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두 학교는 너무나 대비가 되었다. 농학교는 봄여름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꽃들이 교정을 수놓았다. 반대로 맹학교는 칙칙한 무채색뿐이었다. 색깔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농학교는 평지에 있는데 반해 맹학교는 산비탈에 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교문에서부터 교실과 기숙사로 가는 길이 온통 오르막이었다. 어느 곳 하나도 계단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언덕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평지에 있는 농학교와 맹학교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곳을 어린 시각장애 학생들은 뛰어다녔다. 알고 보니 계단이 꺾이는 곳까지를 3.7.4. 또는 5.8.6. 같은 숫자로 외워서 다녔던 것이다.

수백 억 원을 들인 화려한 교회가 즐비한 우리나라에 지하철에서 가까운 곳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회 하나쯤 세울 여력이 없을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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