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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말의 겸손한 자기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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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

비행기가 이륙 후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이제는 연료가 부족해 출발지로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게 된다. 이것을 귀환 불능 지점이라고 한다. 인생이라는 등정에서도 어느 곳이 귀환 불능 지점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시계추는 한 바퀴 돌아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계바늘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 위를 지나고 있다. 한번 가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기에 한 해의 종점에 다다른 지금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 연말의 겸손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때다.

'만일 지역사회의 교회가 다 없어진다면, 그 교회의 신자들 외에 교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밥 로버츠의 'T-라이프'라는 책을 읽다가 맞닥뜨린 도발적인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다면 매우 당연한 답을 묻는 우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이런 질문이 답답하고 심지어 거북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는 교회를 유혹하지만, 유혹에 빠진 교회처럼 처절하게 버림받는 경우도 없다. 교회가 세속화될수록 세속적인 사회는 천박한 동료의식으로 교회를 반길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예수님은 2000여년 전에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말씀을 통해 세속화된 교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고하셨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만 추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금권이나 권력에 취한 교회는 더 악취를 풍기는 법이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금권과 권력에 취했을 때 4세기의 교부였던 히에로니무스는 "교회의 벽은 금으로 번쩍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하시고 죽어가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자기반성의 힘은 사색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대각성운동은 말씀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추한 몰골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웨일즈 부흥과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 20세기초 아주사의 부흥 그리고 1907년 평양의 대부흥이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지난 여름 아프간사태를 통하여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깨닫고 자복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2007년은 진정한 부흥의 터를 닦았던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반성은 자기 성찰을 넘어 열정의 회복과 거룩한 꿈으로 이어져야 한다. 모세의 120년 인생을 살펴보라. 그는 처음 40년을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 다음 40년은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며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하나님께서 쓸모 없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삶이었다.

모세는 화려했던 왕궁의 겉옷 속에 감춰진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보는 진정한 자기반성을 경험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위대함은 겸손한 자기반성을 넘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의 회복과 거룩한 꿈의 실현에 있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우리 믿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을 넘어 모세처럼 열정을 회복하고 거룩한 꿈을 다시 붙잡는 데 있다. 이럴 때에 교회는 우리 사회의 그리움이 되고, 신자는 설렘의 대상이 되리라.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간, 지난 일년 동안 우리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께 두 손 높여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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