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 (요 14:5-11)

첨부 1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 (요 14 : 5-11)


2차 세계대전 시에 독일군은 에니그마라는 암호 해독기를 사용했습니다. 에니그마는 타자기처럼 생긴 기계이고 자판이 있는데 자판에 메시지를 입력하면 그것을 기계가 암호로 바꿔 출력해 줍니다. 그것을 모르스 코드로 송신하고 저쪽에서 똑같은 기계로 암호를 원래 메시지로 바꿔주는 기계입니다. 독일은 어느 누구도 이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리라고 장담했지만 연합군은 그것을 해독하는데 성공해서 독일군이 주고받는 암호 통신을 엿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에니그마. 아주 적절한 이름이지요. 수수께끼, 또 불가사의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존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계시기는 한데 알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의 학술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종교행위로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묵상 기도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숨겨져 있던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사무엘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드러내셔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가 있고 드러내시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온전한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당연히 다르지요. 구약성경에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떻게 계시하셨느냐.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셨는데 첫째는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둘째는 행적을 통하여 계시하시고 그리고 셋째는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먼저 말씀,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많은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한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계시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처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사랑,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행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이란 크게 병자를 고치는 것, 귀신을 내어 쫓는 것, 그리고 그 이외의 이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행적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는 것 뿐만이 아니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이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약장수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용서, 긍휼, 구원 이것을 예수님의 행하신 행적을 통하여 사람들이 경험하고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세 번째로 가장 큰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순이에요. 미련함입니다. 연약함입니다. 왜냐하면 약해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요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계약을 맺을 때 대기업은 늘 ‘갑’이고 중소기업은 늘 ‘을’이에요. 갑과 을. 그래서 대기업은 늘 주장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조건을 정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강한 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반대로 중소기업은 약자의 입장입니다. 대기업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대기업의 횡포를 이런 데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싫으면 그만둬라. 너 없어도 계약할 자는 얼마든지 있다. 갑과 을의 관계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갑이고 인간은 을이에요. 하나님은 늘 강자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횡포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독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카멜롯의 전설을 보면 아더 왕의 원탁의 기사 중에 원래 원탁의 기사 출신이었다가 아더 왕을 배반하고 반역을 꾀하는 말라간트라는 기사가 있어요. 그가 아더 왕에게 반기를 들면서 하는 말이 ‘독선적인 왕, 독선적인 법, 독선적인 하나님, 그것을 떠나서 나는 내 삶을 살겠다!’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I''ll live my life - 내가 내 삶을 살겠다. 아마도 말라간트 같은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독선적인 것에 대하여 반기를 들 수 있는 인간의 용기와 독립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와 같은 상황을 뒤집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시고 애통하시고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인간이 갑의 위치에 있고 하나님이 을의 입장에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시고 하나님도 그 고난에 동참하셨어요. 주로 을은 공급자의 입장이고 갑은 수요자의 입장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공급자가 되시고 사람은 수요자가 됐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건은 이천년 전의 사건이 돼 버렸어요. 이천년이라는 많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이 선풍적인 사건이었겠지만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나가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의 기록을 통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서가 돼버렸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페이지를 통해서만 이천년 전의 예수님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시하시는 하나님도 그만큼 더 멀어졌다는 말이냐.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었던 하나님이 이천년이 지난 이후에는 요원해졌느냐. 아주 중요한 질문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셨지만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또 다른 보혜사-another Comforter 라는 말은 예수님이 보혜사로 오셨는데 예수님이 떠나가신 다음에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시겠다는 얘기입니다. 이분이 바로 성령이에요.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성령은 오늘날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할과 성령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성령은 예수님을 계시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성령은 오늘날 예수님을 우리에게 증거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신앙을 갖도록 도우시고 신앙을 지키도록 도우시고 신앙을 실천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강조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성령이 예수님 이외의 것을 드러내신다면 그건 성령이 아니에요. 그건 잘못된 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신학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삼십 삼년 하고 반년을 사셨어요. 삼십 삼세 반에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보다 훨씬 짧습니다. 삼년 반. 모든 복음서는 예수 삼년 반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일을 행하셨더라도 삼년 반 동안에 하실 수 있는 말씀과 행적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예수님을 보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삼년 반 동안에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만큼을 계시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면을 예수님이 계시하실 수 있었을까. 시간도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면을 예수님이 다 드러내셨느냐.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크시고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작지요. 

개미가 사람을 알면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셨지만 하나님이 너무 크시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알 수 있느냐. 다 알 수 없지요. 예를 들면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그건 알 수 없어요. 하나님은 취미생활이 무엇이냐.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느냐.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고 우리는 너무 작기 때문에.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무슨 의미냐.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정답은 이겁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enough - 충분한 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배가 터질 때까지 먹지 않아요. 만족감을 줄때까지 먹지요. 만약 밥을 아무리 먹어도 만족감을 못 느낀다면 그건 병든 것입니다. 또 공부를 할 때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삶과 직업에 필요한 만큼만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알 수 있는 만큼을 다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배우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고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남녀가 서로 결혼을 전제로 사귈 때 서로 다 알아서 결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로 다 알 수 없습니다. 다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 알면 아마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결혼하느냐. 결혼할 만큼 아는 겁니다. 신뢰할 만큼 알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럼 결혼한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 서로 더 알아가는 것이지요. 

거기에 재미와 기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알기 때문에 믿고 신뢰하는 게 아니고 믿고 신뢰할 만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열일곱의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에게 헌신했는데 그 나이에 예수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신뢰할 만큼 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제 삶을 하나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예수님에 대하여 차근차근 더 알아가는 시간이에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루 윌리스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기독교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천하에 기독교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책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성경을 읽다보니까 생각이 달라져서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을 읽으며 발견한 예수님에 대해서 쓴 책이 벤허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작품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