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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조주 하나님 (창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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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 (창 1:1-2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의 독립된 문장인데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장엄하게 요약하여 선언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한 이 문장은 계시의 시작을 알리며 창세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서언 역할을 합니다. 매주일 마다 드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는데, 창세기 1장 1절 말씀이 신앙의 기초가 됨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창조 기사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태초”(브레쉬트)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간의 처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서’(in tempore)라기보다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이성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워합니다. 모든 존재가 시간에 얽매여 있는 시간보다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시간을 시작케 하신 하나님은 시간보다 크신 분이시며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진 유일한 분이십니다.

“천지”는 일차적으로 공간과 물질을 뜻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관용어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공간이 없는 상황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공간 자체도 없었다는 것과 공간 없이도 하나님께서 계셨음을 알려줍니다. 모든 존재는 공간에 얽매여 있는 공간보다 작은 존재지만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공간보다 크신 분이시며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진 유일한 분이십니다. 모든 물질 역시 스스로 존재해 있지 않았고 하나님에 창조에 의해 존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무한히 크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크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의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존재자체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호와를 앙망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죄인의 특징이며 그 결국은 파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만물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성도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바라) 행위를 통해 당신님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창조를 통해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창조’라는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의 활동에만 사용됩니다. 인간의 활동에도 ‘창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가 있지만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런 기존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부터 생겨나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입니다. 신약은 이 사실에 대해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표준새번역, 히 11:3b)라고 진술합니다.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연한 폭발로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만물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라 했습니다(롬 4:17).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믿음의 후손이라면 우리의 믿음 또한 아브라함과 같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은 없는 것으로부터 있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어야만 기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으로부터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도 능히 부활케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어떤 합리적 가능성에 토대를 두고 믿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는 창조주이심을 믿는 토대를 두고 믿는 믿음입니다.

1절의 주어는 “하나님”(엘로힘)입니다. 고유명사인 여호와 대신 전능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를 사용하여 그분의 전능하심을 강조했습니다. 전능하다는 표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속성에 위배되게 행하실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악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전능하다는 말은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고자 하시는 뜻은 창조 행위에서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가라사대”와 함께 따라오는 “그대로 되니라”는 후렴구는 하나님의 하고자 하신 뜻이 단 한 번의 오류나 시행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다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혼돈하고 공허한 카오스의 세상을 말씀을 통해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꾸신 말씀의 권능자이십니다(2). 만물은 그분의 말씀을 조금도 거스르지 못하고 말씀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됩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마 24:3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히 4:12a). 영적으로 죽은 성도를 중생케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약 1:18).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자라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벧전 2:2; 딤후 3:16-17).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님의 말씀대로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3-5). 둘째 날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수직적으로 나누셨습니다(6-8). 셋째 날은 물과 뭍을 수평적으로 나누신 후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각기 종류대로 채우셨습니다(9-13). 넷째 날은 첫째 날 나누었던 곳에 해와 달과 별을 두어 주관하게 하셨습니다(14-19). 다섯째 날은 둘째 날 나누었던 곳에 물고기들과 새들을 각기 종류대로 채우셨습니다(20-23). 여섯째 날에는 셋째 날에 나누었던 곳에 그날에 창조하셨던 것을 먹이로 하는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을 종류대로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24-28).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는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에 신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신들로 받들었습니다. 또 각종 동물들을 우상으로 섬겨 수많은 잡신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미 그 때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참신이시며, 나머지는 모두 인간이 다스려야할 피조물일 뿐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미신과 미신적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참으로 두려워할 분이 누구인지, 참으로 섬겨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분별하여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인생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인생의 가치관을 바르게 세우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6일 동안 창조하신 것을 항목별로 정리해보면, 피조물들이 뒤죽박죽 섞이지 않고 나눔과 채움을 통해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창조되었습니다. 또 획일적이지 않고 “각기 종류대로” 다양하게 창조되어 대자연 전체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종류대로 주신 은사가 달랐지만, 각자의 다름이 의미가 있었고 각자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질서가 있는 모습,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창조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각자의 영역을 차지하고 질서 있게 지내는 모습과 다양성 속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 사건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을 통해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음을 확정합니다. 만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존재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좋다’는 단어는 ‘선하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영혼만 선한 것이 아니라 육체도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라고 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선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음식을 먹는 것보다 선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의적으로 선한 것을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보이지 않는 것도 창조하셨음을 밝힙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지요(골 1:16).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또 본문에는 은근하게 감추어져 있지만, 성경은 창조 사역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았음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2-3)는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 됩니다. 그리고 욥은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욥 26:13a, 33:4a)라는 고백으로,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시 104:30a)라는 고백으로 성령님 역시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창조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표준새번역, 히 11:3)라고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가 납득되도록 설득하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선포했습니다. 창조를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깨닫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왕이요 아버지로 모신 것이 교회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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