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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믿음이 진짜인지 어떻게 아는가?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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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이 진짜인지 어떻게 아는가? (약 2:14-26)

어떤 사람이 미국에 와서 살면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 세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전화를 걸면 ambulance보다 피자가 더 빨리 오는 나라. 값이 안 나가는 잡동사니는 거라지에 모셔두고 비싼 자동차는 driveway에 그냥 두는 나라. double cheese burger를 시키면서 칼로리를 줄이겠다고 diet coke를 함께 주문하는 나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면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해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도 '행함'의 의미를 오해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이라 불렀습니다. 야고보 2장의 주제는 믿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다루었던 2장의 전반부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자고 합니다. 오늘 다루는 후반부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 

본문에 ' 믿음'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11번, '믿는다'는 동사가 3번 나옵니다. '행함'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옵니다. 요약하면 '믿음'과 '행함'이 본문의 핵심단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못한 믿음은 유익이 없는 믿음이요(16절), 죽은 믿음이요(17절), 귀신 수준의 믿음이요(19절), 헛된 믿음이라(20절)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믿음은 과연 참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일에 내가 가진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과연 참 믿음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과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다루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하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함'를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모순(矛盾)이라는 한자어는 중국 초나라 때의 고사에서 기원합니다.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시장에서 이렇게 구경꾼들에게 외쳤습니다. "이 창으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제 아무리 두껍고 튼튼한 방패라도 여지 없이 뚫어버리는 괴력을 가진 창입니다. 그리고 이 방패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세상의 모든 창을 능히 막을 수 있는 방패입니다." 이를 듣고 있던 구경꾼이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그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창을 뜻하는 모(矛)와 방패를 뜻하는 순(盾)이 더해진 이 '모순'이란 단어는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처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이라는 용어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믿음'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거짓 선생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지키거나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그런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절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행함'이라는 단어는 구원을 얻으려는 바람을 의미합니다. 물론 바울도 '행함'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위'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엡 2:9,10). 바로 이 '선한 일'들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입니다. 야고보가 '행함'으로 의미한 것들을 바울은 또한 '열매'로 표현합니다(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대인 관계 속에 나타납니다. 성도들은 선한 행실로써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이웃을 사랑할 때 삶에 사랑과 거룩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바울과 야고보는 둘 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자기들의 주장을 지원합니다. 롬 4:9,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약 2:21,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은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것이고 그의 대답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반면에, 야고보의 논지는 ‘참된 구원을 얻는 믿음을 소유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고 그 대답은 ‘그의 열매를 보아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주어지며 참 믿음은 행위로 확인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과연 진짜인지 어떻게 테스트합니까? 

1. 믿음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What good is it, if a man claims to have faith but has no deeds?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믿음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은 기간도 오래되고 행동도 점잖고 신앙적인 지식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여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는 열정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마치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 사이와 같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의 행동을 동반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 은혜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고후 4:15, “은혜가 많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쓰임받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셔서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쪼이기 원하셨습니다. 바울의 고난과 수고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은 사람들에 넘쳐흘러 그들도 구원받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함입니다. 받은 은혜를 품고만 있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말만 앞세워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2. 믿음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떤 형제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불쌍하다, 입을 것이 있어야겠네, 먹을 것이 있어야겠네 말만 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형제들을 돕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을 도와야하는 부담이 자기에게 돌아올까 봐 몸을 사립니다. 참 믿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영혼 하나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다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할 수는 있습니다. 마음속에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되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두 번 생각하면 인색한 마음이 생겨서 행동을 주저하게 되어 결국 은혜의 통로를 막습니다. 야고보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3. 믿음은 단지 ‘무엇을 믿는 가’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2:18-19)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어떤 사람은 믿음이 별로 없는데 희생적이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줍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너무 인색해서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여 나은 점이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과연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 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도 오래 다니고 교회에서 직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삶에 선한 증거가 별로 없고, 섬길 줄도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어떤 사람이 말을 겁니다. 당신은 오래 믿어서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나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이웃을 위하여 하는 것이 무어냐는 겁니다. 나는 믿음은 별로 없지만 이웃을 섬긴다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하면서 다른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행함이 없이 지식만을 내세우는 신앙은 귀신이 가진 정도의 신앙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들린 자들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의 귀신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삶의 열매가 도무지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적용되어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감동을 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말씀을 들은 것이고 믿음이 생긴 것이지 그가 단순히 설교를 들었거나 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하여 그가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 마디라도 들은 말씀을 인하여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삶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꾸게 하고 삶의 양식과 습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어도 좀처럼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렇게 설교하는 목사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 할거야. 장로님도 그렇게 살지 못 하는데 나 같은 평신도가 어떻게 말씀대로 살겠어 하며 자기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거나 타협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날카롭지만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 없는 자보다 더 양심이 굳어져서 나중에는 어떤 것으로도 그 마음을 회개시킬 수 없게 됩니다. 

참 믿음은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2:20-26)

바른 신앙 하면 교리를 바로 알거나 바른 말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함이 따르지 않는 교리적인 지식이나 도덕적인 말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이 없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에 대해 야고보는 죽은 믿음, 헛된 믿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햇수가 늘어감에 따라 우리도 자칫하면 이런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 순종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은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머리로 믿고 말로는 믿는데 몸으로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힘, 나의 시간, 나의 돈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믿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참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한 사람은 남자요 다른 사람은 여자입니다. 한 사람은 존경받는 족장이요 다른 사람은 손가락질 받는 기생입니다. 한사람은 선택받은 히브리인이요, 다른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 출신인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행함의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믿음은 볼 수 없지만 그 열매로 그 믿음을 압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행위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계심만을 믿거나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낮추어 복을 받게 하심입니다. 

신 8:16,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납니다. 모리아 산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체없이 이삭을 묶어 제단 위에 올려놓았고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며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를 예비해 놓았다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려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며 예배하고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족속과 요단 동쪽의 왕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섬멸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들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라합의 믿음은 듣고 아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는 목숨을 건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그 가정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그의 신앙고백을 삶 속에 실천했으며,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직업이 기생이었기에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속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소극적인 믿음이 아니라 용기와 결단으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살린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결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후에 라합은 롯의 시아버지인 살몬의 아내가 되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 왕조를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은 행위로서 믿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이렇듯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될 때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믿으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4:26-27, 33).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포기는 구체적인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의 것을 실제로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멸망과 구원을 함께 의논할 수 있는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끝나버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행위에서 우리의 믿음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성도님들의 믿음은 진짜입니까?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믿으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무엇인가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만 있으면 섬기려던 사람도 지쳐서 포기해버리고 그 다음에는 아주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누군가 일을 하겠다면 격려해 주세요. 안 된다는 생각, 해봤자 별 수 없다는 말로 다른 사람들을 낙심시켜서는 안 됩니다. 자기는 안하면서 비판만 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믿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끌어 올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는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 일, 특히 다른 사람들을 향해 행한 일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이며, 그 사랑의 표현으로서 이웃을 향한 사랑을 기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주님 대하듯 하며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지를 순간순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사이 주위 사람들을 대하면서 주님께서 섭섭하게 느끼실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형제나 자매들을 우리 가운데 두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험하십니다. 지금 내 주위에 사람들 중에 경제적인 면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지금 내가 진정으로 돌보야 할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양떼를 맡길 때 지난 3년 동안 배운 것을 테스트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그에게 양을 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믿는 자로서 선한 일을 해야 한다면서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삶의 현장에서 표현함으로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아브라함이나 라합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선물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벗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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