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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 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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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 43:1-5)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 서른두 살 되던 해,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며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서서히 나타나는 귓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Heiligenstädter Testament)’라는 글을 씁니다. 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나아질 것이란 희망 속에 살아왔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잠시 후 나는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시여!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힘을 다해 작곡한 음악들을 단 하루만이라도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기도는 처절함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서를 써 내려가면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죽음을 생각했을 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나를 붙들었다. 문득 하나님이 내게 명령하신 일을 끝내기 전에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 손을 통해 태어나야 할 음악들을 생각하며 지금 비참한 삶을 견뎌 내고 있다. 

나는 하루하루 내 마음에 인내를 새로 쓰고 있다. 거침없이 나를 위협하는 운명이 삶을 끊어 버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비참한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음악가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친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또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나의 예술 열정이 활활 타오르기 전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나는 맞서 싸울 것이다. 언제든 나는 용감하게 그 운명을 맞이하리라.” 그는 드디어 고통을 이겨냅니다. 

고통 중에서 작곡한 교향곡 2번은 고통의 그림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너무나 맑고 깨끗하고 밝다는 사실 앞에 오히려 의문을 갖게 됩니다. 베토벤은 24년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작곡 활동을 계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작곡한 교향곡 9번은 ‘기쁨의 송시’ 입니다. 이 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청중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은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열렬한 환호성도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귀는 남이 들을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망이 그를 승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환난과 질고를 넘어 승리한 것입니다.

소망이 인간의 생각과 언어와 삶을 다스립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본문의 다윗은 진퇴양난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기만 하면 운명이 달라질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힘이 되시리라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젊었을 때 일입니다. 제자 카이흔이 “신이시여!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은 자기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튿날부터 아데미에 있는 모든 학자와 정치가, 예술가를 방문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이 무엇이냐?”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지혜 있는 체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제야 신이 왜 자신에게 가장 지혜가 있다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척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첫걸음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부패했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바른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만이 힘이 되심을 믿는 자입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힘이 되어 주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힘을 방해하거나 이길 수 없습니다.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입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대적들이 다윗을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다윗을 권좌에서 내어 쫓았던 압살롬의 반역을 연상시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규는 너무 힘이 든 상황이기에 하나님을 강하게 사모하고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이라고 강력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는 ‘엘로힘’입니다. 이방 신과 대조되는 강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권력자가 힘이 되어도 큰 일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힘이 되시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쁨을 주시리라

20세기 초반 미국에 예기치 못한 대공황이 찾아왔습니다. 기업체들이 연이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로우(Clarence Darrow)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강연할 때마다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 어려운 환경 속에 우리를 두시겠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루는 흑인들을 모아놓고 무신론 강연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도 잃었고 노래도 잃었습니다. 기쁨도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때입니다.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박사님, 저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깜짝 놀란 대로우 박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저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다윗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큰 기쁨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이상의 즐거움과 기쁨의 대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극한 고통을 당하던 끝에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때 사단은 물러갑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은 잠시이고 오히려 근심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원하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기쁨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기쁨이 없으십니까?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십니까?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 있어도 하나님께 소망이 없으면 그 무엇도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 없다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도움을 얻으리라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정치가 크롬웰 (Oliver Cromwell)의 일화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유모가 키웠습니다. 한 번은 유모가 그를 데리고 할아버지 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원숭이 몇 마리를 키웠습니다. 유모가 크롬웰을 안고 젖을 먹이자 원숭이가 물끄러미 쳐다보더랍니다. 젖을 먹이던 유모가 잠깐 아기를 내려놓은 사이에 원숭이가 아기를 안아봅니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는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지붕 위로 쫓아가도 원숭이는 다른 곳으로 뛰어버립니다. 만약 놓쳐버리면 아기는 죽게 됩니다. 그때 믿음이 좋은 크롬웰의 할아버지가 가족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제 크롬웰은 우리의 손을 떠났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함께 기도하자.” 무릎을 꿇고 가족들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가 가만히 그들을 쳐다봅니다.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원숭이는 아기를 안은 채 내려와서 같이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크롬웰을 내려놓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내 손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미 내 손을 떠났습니다. 할 일을 다 했지만 안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환경과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도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도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우십니다.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것처럼 도우십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지라도 건져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어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만 하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도와주어도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실패하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크고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우십니다. 크게 도와주십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전적이고 영원한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도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박사 부인에게 기자가 질문합니다. “위대한 과학자와 함께 사는데 수학을 아십니까?” “아뇨.” “물리학을 아십니까?” “아뇨” “그러면 남편이 뭘 하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아인슈타인 부인 맞습니까?” 이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기자를 바라보며 부인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그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것만 압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힘과 기쁨과 도움이란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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