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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5) (욘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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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5) (욘 2:1-9)

: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작가 최인호,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최인호는 2008년 5월 침샘암 발병 이후 외부와 접촉을 끊고 요양에 들어갔었답니다. 발병 이후 3년 동안 수술도 했고 항암치료도 계속했답니다.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답니다. 그 와중에도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빠진 오른손 가운데 손톱의 통증을 참기 위해 고무골무를 손가락에 끼우고 원고를 집필하였답니다. 그렇게 쓴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끝내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설은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다. 하나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주신다면 나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3년간의 백기투항이 장거리 주법의 호흡을 앗아가는 역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할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암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실패한 사람은 변명 이외에 어떤 말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암이든 처절한 실패이든 그것이 아무리 큰 고통일지라도 딛고 일어난 사람은 말합니다. 고통도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승리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승리했느냐 실패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진부한 차원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고통스럽지만 비로소 위에 계신 분을 느낀다면 영원으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요나는 요, 나(我)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면서도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었지만 사실은 내려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무덤에서 사흘을 계셔야 했던 예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나 설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요나가 드디어 기도합니다. 1절 말씀에서 ‘기도하다[ll'P;/파랄]’는 말은 중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재하다니 누구와 누구를 중재한다는 말입니까? 아무런 자비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 사이에서 스스로 나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나선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가장 위대한 은총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감히 기도할 수 없는 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위한 중재자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중재자로 나서서 화해를 시키려면 그래도 견줄 것을 찾아서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요구를 할 만한 건더기가 하나도 없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비참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탄식 밖에는 없습니다. 
  
I. 탄식
  
요나가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a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요나는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불러 아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고난[hr:x;/짜라]은 ‘죔’입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게 옥죄어 오는 것입니다. 오므릴 수도 없고 펼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정말로 짜증나게 하는 형편이지만 짜증도 마음껏 부릴 수 없는 형편에 던져졌습니다. 그는

1. 고난 속에 던져졌습니다.

어디 한 곳이라도 도망칠 곳이 남아있었다면 그곳으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습니다. 앞뒤가 캄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이렇다고 여기시는 분이 계십니까? 바로 요나가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있는 거기에 요나가 있습니다.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간 요나, 고난 속에 던져진 요나. 그런 자신을 위하여 정말로 탄식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2b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자신의 고난을 ‘스올의 뱃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올[l/av]]]이란 무엇입니까?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입니까? 어릴 때 교회 학교 선생님은 ‘고래’라고 하셨습니다. 고래 정도는 되어야 사람을 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어떤 성경 그림동화책은 아예 고래를 그려놓았습니다. 아이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고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법 성경을 읽는 어떤 분은 그 물고기의 이름을 ‘스올’이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올’이라는 말은 물고기의 어떤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올’은 히브리말인데 ‘죽은 자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무덤’, ‘구덩이’를 뜻합니다. 또한 ‘지옥’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 들어 간 것도 아니고, ‘스올’이라고 하는 물고기에 삼켜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 물고기는 굳이 말하자면 성경에 있는 그대로 ‘큰 물고기’입니다. 그 물고기가 어떤 종류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스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둡고 캄캄한 무덤과 같은 곳”입니다. 그는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큰물과 파도와 큰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갔습니다. 요나는 지옥과 같은 곳에 던져졌습니다. 그는


2. 깊음 속에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나에게서 탈진한 인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다 타버린 그런 사람들의 모습 말입니다. 내일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습니다. 당장 어려움과 곤란에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채 겨우 숨 쉬고 있습니다. 가슴을 헐떡이며 숨을 쉬고 있기는 하나 차마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삶입니다. 이것이 이 땅위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두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가 고난 속에 있었다는 것은, 깊음 속에 던져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쫓겨나다[vr'G/가라쉬]’는 것은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부터 단절인 것입니다. 그는


3. 단절 속에 던져졌습니다.

어머니와 연결되었던 탯줄을 자르는 순간 비로소 인간이 된다지만 단절이기에 모든 아기들은 울음으로 세상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할 끈이 떨어진 인간은 울음 이외에 다른 것으로 자신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법 자랐다고 이제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지만 어려움을 겪으면서 영혼의 깊은 문제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난은 몸의 차원입니다. 천길 만길 낭떠러지기에 떨어졌다는 깊음은 맘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절은 영의 차원입니다. 인간의 깊은 고독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졌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고난을 겪고 절망하면서 영적인 갈급함을 느낍니다.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깊은 은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II. 간구
  
드디어 요나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도 기도하지 않았던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치는 배를 타려 내려가면서도 기도하지 않던 요나가, 풍랑이 이는 뱃속에서도 잠 들어있던 요나가,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선장의 명령을 받고도 기도하지 않던 요나가, 제비에 뽑혔을 때에도 기도하지 않던 요나가, 바다에 던져 질 때도 기도하지 않던 요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드디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2절 말씀입니다.
: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불러 아뢰었습니다. 스올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었으면 그 사람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누구라도 한바탕 해 붙일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 억지를 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 부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러 아뢰었습니다. 그는

1. 하나님께 불러 아뢰었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고난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암이 하나님의 선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암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불러 아뢰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자신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기에 감히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인생에 고난이 없었다면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난은 그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은총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과 가족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러 아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작은 고난도 겪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우리는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요나는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는 자신의 영혼이 꺼져가고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나는 고통 곁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2.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는 전환점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사원장을 지냈던 한승헌 변호사가 계십니다.

대학시절 교회에 참석하였으나 목사와 장로의 갈등을 보고 교회에서 멀어졌습니다. 법조인의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범법과 이중적인 태도로 교회를 아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군사법정에서 형을 받고 서울 구치소에 투옥되었을 때 진정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하나님과의 동거의 절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컴컴한 방안에 차가운 습기를 맡으며 고통과 절망이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 느껴지는 그 순간에야말로 하나님의 숨결이 가장 가까이 크게 느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였다. 문자 그대로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풍요롭기에 하나님을 몰라라하기도 합니다.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의 깊이가 전혀 없는 얇은 종교인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너무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더욱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고난이라면 마주 대하여 서십시오. 고난도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은총의 통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몇 가지 확신입니다.

  
III. 확신
  
요나는 고난 중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확신이 있습니다.

다시 2절 말씀입니다. 
: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절 말씀을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첫 번째는 ‘그(He)’가 내게 대답하셨다 이고, 두 번째는 ‘당신(You)’이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 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요나가 기도할 때 처음에 대답한 분이나 두 번째 대답한 분이나 모두 하나님이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의미를 살리자면 처음에 주님은 ‘그’(He)였으나, 두 번째 주님은 ‘당신’(You)이었습니다. 요나가 기도할 때 ‘그’ 하나님이 ‘너’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명령하시고 순종을 강요하는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1. 사랑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응답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보다도 ‘그’ 하나님이 ‘너’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아뢰고 기도함으로 얻는 가장 큰 소득은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엄중하신 하나님이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그 십자가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 위에 사랑이 부어지고 채워지고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 그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요나는 그 와중에 또 어떤 확신이 있었습니까?
: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다 여겨지는 그 단절의 순간에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순종하겠다는 고백과 결단입니다. 7절에서는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속에서 ‘성전’을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깊은 곳에 던져졌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역설적으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2. 성전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묻고 계십니다. 이 물음에 우리는 ‘내가 바로 성전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고 선언하여야 합니다. 요나는 멀리 있는 성전을 바라보았으나 우리는 우리 안에 이루어진 성전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확신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8절입니다.
: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요나는 자신의 확신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그 순간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3. 은혜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은혜는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무리 사랑하여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깊음과 단절을 겪으면서 사랑을 깨닫습니다.

신문에서 소설가 최인호의 기사를 읽고 그의 책 두 권을 구입하였습니다. 한 권은 고통 중에 최근에 완성하였다는 ‘낯익은 타인의 도시’이고 또 한 권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입니다.

우선 제 눈이 가는 것은 ‘어머니는…’이었습니다.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소설가가 자신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데 저는 저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그 은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은혜 없이는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그 마음속에 계십니다.

은혜 그것은 기쁨입니다. 은혜는 그것을 기억할 때에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또 다른 삶의 능력이 됩니다.
  
요나는 9절에서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곳으로 내몰아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숨 막힐 것 같은 답답함과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내몰아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지옥을 미리 경험하게 하심으로 지옥에서 끌어 올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기도함으로 스스로 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통의 자리에 들어가는 우리를 지켜보시기도 하십니다.

누구에게도 고통이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울 때 곁에서 누군가 함께 아파한다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습니다. 누군가 함께 있다면 고통을 포기하기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형제들이 아파할 때 우리가 그들의 곁에 있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그 곁에 있어주어야 할 형제자매일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함께하는 형제자매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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