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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1)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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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1) (살전 1:1-10)

여러분, 교인 중에도 원불교인이 섞여 있다는 말씀 들어보셨나요? 아니 목사님 교회안에 무슨 원불교인이 있어요? 라고 묻고 싶은 분들이 있겠지만 원불교인이 있습니다. 원불교인은 누구입니까?
원- 원망하는 교인입니다. 불- 불평하는 교인입니다. 원불교인은 다름 아닌 원망하고 불평하는 교인입니다. 

우스개 이야기입니다만, 교인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교인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목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로라고 해서 다 똑같은 장로가 아니고 권사라고 해서 다 똑같은 권사가 아니고 집사라고 해서 다 똑같은 집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양은 비슷해도 수준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일까요? 어떤 성도가 성도다운 성도일까요? 오늘 본문 7-8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는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왜 이 교회가 그렇게 좋은 교회, 모범적인 교회, 건강한 교회였을까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좋은 성도요, 모범적인 성도요, 건강한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교회가 좋은 교회냐, 나쁜 교회냐는 그 교회 성도의 수준이 어떤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디옥 교회는 좋은 교회, 수준 있는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왜요? 여러분을 보니 다 좋아보이고 수준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안디옥교회는 더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건강하고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 이 시대를 주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안디옥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 안디옥교회가 또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런 성도들로 온전히 세워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처럼 믿는 자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을 퍼뜨릴 수 있었던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오늘 저는 1장 3절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무엇입니까? 함께 따라해봅시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좋은 열매를 맺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럼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먼저 무엇이 필요할까요? 

여러분, 좋은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씨앗이 잘 뿌려져야 합니다. 
씨앗이 좋은 땅에 잘 뿌려지지 않으면 아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태도가 잘못되면 신앙의 시작부터 잘못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13장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이 우리 신앙의 씨앗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이 좋은 열매 맺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밭이 옥토가 되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기초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원수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을 수 없도록 유혹하고 시험하며 공격하는 것입니다. 
때로 원수마귀는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오늘 말씀 6절에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편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0장 말씀에 보면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리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원수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가면 갈수록 말씀을 듣는 일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을 폐하게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참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 부흥회를 하면 토요일 새벽까지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틀 삼일 절반으로 줄었죠? 
예배시간도 1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기본이었습니다. 지금은 한 시간만 넘으면 길다고 지루하다고 합니다. 
옛날에 제가 어렸을때는 금요철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철야기도를 했기 때문이죠. 요즘은 어떻습니까? 금요 기도회라고 합니다. 왜요? 한 두시간하면 끝나기 때문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밤을 새서 기도하던 그때보다 한 두시간 기도하는 지금 사람들이 더 적게 모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밤을 새서 5시까지 기도하고 집에 가서 아침 먹고 출근하고 학교 가도 피곤해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두 시간 기도하는 금요기도회도 귀찮아하면서 피곤하다고 하면서 참여하지 않습니다. 

중1때 저에게는 한 가지 슬프지만 감사한 추억이 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를 하고 은혜 충만한 상태에서 학교에 갔는데 그때 물상선생님의 특징이 알겠습니까? 그럼 학생들이 예 하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날도 물상 선생님이 알겠습니까?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아멘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장난치는 줄 알고 나오라고 해서는 비 오는날 먼지나게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맞았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의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밭이 잘못되어 있으면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일에 힘쓰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황과 환경을 탓하지 말기 바랍니다. 역사상 오늘날처럼 하나님을 섬기기에 좋은 상황과 환경은 세계교회 역사상, 또 한국 교회 역사상에도 없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한 말씀을 듣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었습니다. 수 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재를 넘으면서 1시간 반씩 걸어서 새벽기도에 참석했습니다. 거리가 멀다, 시간이 없다하는 것은 어찌 보면 그런 열악하고 힘겨운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최선으로 섬긴 믿음의 선배들이 보기에는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원수마귀가 우리 신앙의 좋은 씨앗이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시험이요, 공격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좋은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환란가운데서도 어떤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원수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참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일까요? 마음으로 듣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를 열었다고 해서 다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13장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음밭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듣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듣는 것인데 그럼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눈으로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창이 어디일까요? 바로 눈입니다. 따라서 눈이 닫히면 마음은 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이 예배시간에 닫히지 않도록 주의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의 눈과 여러분의 눈이 하나로 연결될 때 거기서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집사님이 하도 조니까 목사님이 그 집사님옆에 있는 집사님께 졸고 있는 집사님 좀 깨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재우기는 지가 재워놓고 왜 나한테 깨우라고 해..

그렇습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말씀을 잘 준비하여 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태도와 결단입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겠다 은혜를 받겠다는 결단과 각오와 사모함이 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부족한 설교자를 통해서도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 이야기....
 
우리 교회는 그런 분이 많지 않아 참 다행입니다만 어떤 교회 가보면 설교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든지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성경을 읽고 있다든지 또는 젊은이들 같은 경우 핸드폰을 만지락 거린다든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든지, 졸고 있다든지 설교자가 아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든지 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식으로 시선이 설교자와 일치되지 않아서는 결단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고 하면 입은 마음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선을 일치 시키고 귀를 통해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안방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아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멘하는 것은 의미없는 단순한 외마디 외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들은 말씀이 내 마음의 안방에 자리 잡도록 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하지 않으면 말씀은 마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요, 정확히 말해 내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아멘이 풍년이면 은혜도 풍년이요, 아멘이 흉년이면 은혜도 흉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제말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장20절 말씀에 보면 아멘함으로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멘이 풍년 되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그럼 그 성도는 은혜가 풍년일 것이고 은혜가 풍년이면 삶의 범사가 풍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우리가 말씀을 받고 예배를 드리는 태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소문이 나는 좋은 신앙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잘 받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믿음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씨앗은 씨앗으로 계속 머물러 있으면 그렇게 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씨앗은 계속해서 성장하여 결국 열매를 맺을 때 그 가치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들었던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영혼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맺어질 수 있도록 우리 영혼에 떨어진 그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 사랑, 소망의 열매를 맺을 때 그 성도는 좋은 성도, 그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이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는 교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디옥 교회에도 이런 믿음, 사랑, 소망의 좋은 열매들이 많이 맺어지길 바랍니다. 여러분 각 개인의 삶 속에도, 여러분의 가정 가정마다 이런 아름다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봄에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씨앗이 열매로 거두어집니까? 씨앗을 뿌렸으면 열매로 가꾸기 위한 숱한 노력과 헌신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서 말씀에서는 뭐라고 가르쳐 줍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의 씨앗을 받은 것으로 만족한 채 정체되어 있으면 우리의 삶 속에 아무런 역사도 기적도 열매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씨앗이 믿음 사랑 소망의 좋은 열매로 맺어지기 위한 피나는 신앙의 노력이 있을 때 좋은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이 믿음에 역사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기도하는 섬 소록도』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을 보니까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소록도는 우리나라 섬 가운데 한센씨병 일명 나병환자들이 가장 많은 섬으로 알려진 섬입니다. 나병이 어떤 병입니까? 온몸이 썩어가는 병, 팔 다리가 나도 알지 못하는 새 뚝뚝 떨어져 나가는 구약성경에서도 저주시하는 그런 정말 고통스런 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소록도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모인 섬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텐데 이 섬에 다녀온 김동신이라는 사진작가는 이 섬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섬에 도착한 작가가 새벽기도를 촬영하기 위해 어느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팔 다리 어느 것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그야말로 사지가 없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입술에는 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란 고백이 되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할아버지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지가 없어 누가 안고 왔으려니 생각했던 작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새벽의 차디찬 땅을 향해 배를 깔더니 여전히 찬송을 부르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전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사지 멀쩡한 자신도 삶이 불만스럽고 짜증나고 한탄 스러울때가 많은데 이 할아버지는 사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불편한 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배를 깔고 새벽기도를 왔다가 또 가는 것일까? 생각하며 자신의 믿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물론 그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것은 믿음의 끝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가 말한 그 고백대로 움직일 때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동차는 가만히 있을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수 천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승용차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서는 자동차로서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전진해 나갈 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단순히 말로 끝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라도 아까 그 할아버지와 같이 사지가 다 잘려나간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기에 그 분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기에 비로 철퍽해진 차디찬 땅을 기어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전진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록도의 그 할아버지에 비하면 우린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에게는 사지 멀쩡한 육신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함께 기도하며 함께 사역하는 성도들, 동역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찾아보면 불평하고 원망할 것 보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고 내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라면 나에게 엄청난 손해가 되고 희생이 되고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냐? 그 정도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말하는 상황속에서 아까 그 할아버지처럼 변함없이 배를 깔고 진흙탕을 뭉개며 하나님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배를 깔고 용기있게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믿음이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각각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받을 것 역시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이 많다면 하나님앞에 받을 것 역시 많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건축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한 집사님이 어떤 성도에게 가서 교회가 이런 일을 하여야 하는데 물질이 필요하니 헌금하자고 권면하였습니다. 
그 때 그 성도가 집사님에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군요?"
그 때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저에는 너무도 귀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요구하였습니다. 
 옷을 사달라고 하였습니다. 신발을, 책을, 스키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항상 요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하게도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은 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살아 있는 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살아 있는 아들은 늘 무엇인가 먹고 마셔야 하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교회도 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죽은 교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죽은 교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권면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구가 있다는 것은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필요가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역사해야 할 것 즉 움직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시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끊임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전진해 나가는 움직이는 믿음, 역동적인 믿음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역사 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성도가 되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믿음을 시작케 하고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배와 성경공부, 큐티와 성경읽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통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또 여러분들이 모여 있는 우리 안디옥교회가 그런 축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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