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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나를 원하십니다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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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나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막11:1-10) 

우리나라가 I.M.F 시대를 지나면서 끔찍한 실업 사태를 경험해야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버거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 다 동감할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실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비속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I.M.F 시대가 한창이던 1997년, 조기 퇴직을 의미하는 '조기'에 명예퇴직의 '명태', 황당한 퇴직을 뜻하는 '황태'까지,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어느덧 사라지고 대신 씁쓸한 실업 신조어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고개 숙인 가장들이 늘면서 5,60대까지 직장을 다니면 도둑이라는 '오륙도', 4,50대가 정년이라는 '사오정, 38살이 되면 구조조정 대상이라는 뜻의 '삼팔선'이란 말까지 나왔습니다. 언제부턴가 청년 실업자만 백만 명. 이십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뜻의 '이태백'이라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최고의 유행어로 등장하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되거나 빌린 학자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청년 실신', 십대가 되면 장차 실업자가 될 생각을 해야한다는 ‘십장생’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이런 비속어의 말처럼 실직의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태가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휴일이 있어 쉬는 것은 자신의 영, 육을 재충전하는 시간이지만 일할 것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휴식은 고문과 같은 것입니다. 일하는 기쁨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일평생 하나님이 주시는 노동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통해 노동의 즐거움을 마음껏 느끼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계속되는 축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을 하고 싶으나 일을 할 자리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터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자신이 이 시대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 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 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습니다. 그 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였답니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처럼 비참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는 아무리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할지라도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조건을 보고 쓰시려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 죄와 허물로 보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던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그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내가 나와 함께 내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일을 하지 않겠느냐? 고 지금 묻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손을 잡고 일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세상의 어떤 조건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사오정도 없습니다. 이태백이도 없습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내려는 주인처럼 일할 일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일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하고, 일을 하되 결코 퇴직이 없는 영원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에 썩어질 일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 중에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제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므로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인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준비하시고, 결국 제자 가룟 유다에게 팔렸고 자기 민족들의 시기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서 나귀 새끼를 보고 풀어 끌고 오려고 할 때 거기 섰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나귀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자 보내 주어 끌고 와서 자기의 옷을 나귀 새끼 등에 걸쳐놓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선택하시고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아무 일을 시켜보지 않았던 작고 힘이 없는 연약한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려고 주가 쓰시겠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의 오늘도 우리를 선택하시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택하여 쓰시기를 원하고 계실까를 깨닫고 쓰임에 합당한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선택받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을 쓰시겠다고 하시는 주님께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연약하지만 예수님만 의지할 수 있는 자를 쓰시려 하십니다.
 
나귀 새끼란 힘이 없고 연약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려고 할 때 무엇인가 부족하여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처음에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상 10장을 보면 처음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말할 때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뽑아 왕으로 세우려 할 때 오히려 사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사울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 그는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있는 사울을 데려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울 왕이 승승장구 승리를 하여 나라가 안정되어 가자 사울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망령되이 행할 때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책망하며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고 심판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자를 버리시고 겸손한 자를 쓰심을 가르쳐 주는 귀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미디안 족속을 통해 이스라엘을 고통 가운데 빠지게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도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약한 자니이다” 라고 고백하는 기드온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여 주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 스스로가 바로의 왕자로 있을 때 자기가 기자고 있는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애굽 사람 한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도망가는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40년 동안 목동으로서 양 이외의 것을 다스릴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강권적으로 붙잡힌 모세는 양을 치던 지팡이로 애굽의 막강한 바로 왕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다윗은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온 군대가 떨고 있는 골리앗이 전쟁터에서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욕을 하고, 이스라엘의 왕과 그의 군대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어린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물매와 물매 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어 말하기를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외치며 믿음으로 나아가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통하여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지식이 있고, 권세가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도전하는데 앞장섰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약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써 주시는 것을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왜 그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까?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10)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 1:27-31)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영원히 의지할 것은 없습니다. 시편 146편 3-5절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문제 앞에서 내 경험을, 내 지식을, 내가 가진 물질을, 내 건강을 먼저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영원무궁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고 계심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신 일을 행하고자 할 때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일하도록 지금도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생활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됩시다.


2. 형편대로가 아니라 힘에 버겁지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어린 나귀 새끼는 다 자라지 못한 아주 약한 존재를 말합니다. 주인도 아직 일을 시킬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미 곁에서 자라게 한 새끼입니다. 이런 약한 새끼 나귀를 꼭 주님이 타셔야만 했을까요? 벳바게와 베다니는 서로 인접한 마을이었는데 예루살렘까지는 약 2,5km 거리입니다. 2,5km 나 되는 거리를 33세의 남성이셨던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길은 그리 짧은 거리도 아니었으며, 몸무게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은 육신적으로 볼 때 그리 쉬운 길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은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어 여기 오셨습니까? 가진 것이 돈뿐이라 쓸 때가 없어서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까?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쉽기 때문에 즐기며 지금 고난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결코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시간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정말 무거운 짐이 되어 이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은 간절한 소원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실 것입니다. 

찬송가 337장 후렴의 가사를 보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하시는 것은 결코 그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배우라. 즉 무거운 짐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어려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 것을 요구했을 때의 형편은 넉넉하여 기쁜 마음으로 대접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생애의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는 과부의 마음은 누구를 조금이라도 헤아려 줄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고 드린 것입니다. 후에 그런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드려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 음식, 마지막 대접,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지나친 요구였지만 드릴 때 3년 반의 기근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한 아이가 5병 2어를 드릴 때 5천명이 먹고도 12바구니의 음식이 남겨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런 복을 받고 살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큰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인색함으로나 적당하게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는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8:2-4) 라고 전했습니다. 이어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이것은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제 3차 전도예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때 많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돌아갈 때에 닥칠 고난에 대해서 예언을 했고 이로 인하여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많은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행 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데 내가 가진 것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처럼 힘에 지나쳐도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심어야 거둘 수 있습니다.


3. 죄의 사슬에서 풀어 놓아야 쓰임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죄에 고삐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 되어 마귀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 아래서 살고 있는 인생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이 말씀처럼 이 땅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보십시오. 정말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인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하실 때에 주신 성품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심을 믿고 고백함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다 말씀하시고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을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라고 하여습니다. 이 성령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내 삶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을 내 욕심을 위해 쓰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였거든 행하는 그 일을 위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짐에 얽매이지 말고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껏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내 인생의 고삐를 주님의 손에 맡기는 사람입니다.
 
나귀 새끼는 어미만을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타시고 예수님의 손에 그 고삐가 잡혀졌을 때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무리의 중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 1분 후에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요셉도 육신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삶으로 인도 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애굽으로 보내시면서 종으로, 죄인으로의 삶을 살게 했지만 결국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로 인도했습니다. 애굽으로 팔려 가는 그 길은 종으로 팔려가는 길이 아니라 총리가 되기 위해 가는 길임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시편기자는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내 경험, 내 지식에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 경험이 아닌 내 인생의 고삐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주가 쓰시고자 합니다. 연약하지만 주님께서 힘주심을 믿고, 죄에서 자유함을 받고, 내 인생의 고삐를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위에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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