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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 창조 (창 1: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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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창조 (창 1:26-2:3) 
 
 
창세기 1장의 전반부가 시간과 공간과 만물의 시작을 다루었다면, 1장 후반부는 인류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 창조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도를 구속하신 하나님은 시간보다 공간보다 만물보다 크신 창조주이십니다. 오늘날 인류가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며 기고만장할지라도 기껏해야 저 넓은 우주 공간과 마이크로 세계의 지극히 일부분만, 땅 속과 바다 속의 지극히 일부분만, 그리고 인간의 지극히 일부분만 겨우 관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 40:1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 사람이란 존재는 참으로 티끌보다 미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미미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시고 창조의 정점으로 삼으셨습니다. 여섯 째 날에 땅의 짐승과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 전능자께서, 사람만큼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26a) 창조하시려고 스스로 상의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지 내용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동물과도 단절적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진화론은 사람과 동물 사이에 명확한 단절점이 없이 연장선상에 둡니다. 그러면서도 인간 존엄을 주장하는 일이 저로서는 좀처럼 납득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한 살인자가 ‘가축을 도살하는 것은 죄가 아닌데, 살인은 왜 죄가 되느냐’고 재판관에게 반문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진화론자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동물처럼 취급할 수 없다고 화를 낼까요? 성경에 따르면 살인은 동물보다 향상된 존재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를 죽였기에 심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의 기초는 ‘보다 뛰어난’ 어떤 측면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지극히 미미한 사람에게 존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다 뛰어난’ 혹은 ‘보다 향상된’ 어떤 측면에서 찾고자 한다면 뇌의 기능이 정지되거나 이상이 생긴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유아나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뛰어난 기능을 가진 동물은 사람보다 더 존엄할까요? 요즘은 애완동물도 지위가 향상되었는데, 배우자보다 더 의미 있는 존재였다고 해서 반려동물이 사람보다 존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에 존엄성의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낙태나 안락사 등 인간 생명과 관련된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에서 대해 원칙 없이 우왕좌왕할 것이고 사람과 동물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져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26b)는 뜻을 두셨습니다. 사람은 이것저것 막 만들어내다가 우연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 아닙니다. 당신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통치할 청지기로 두시려는 분명한 목적 가운데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단지 잘 먹기 위해서 살고, 잘 살기 위해서 먹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끝도 없는 순환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며 존재해 있기 위한 존재도 아닙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유지하도록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는 일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 목적을 위해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27a)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생물을 다스리는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도록 하셨지요. 이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27b)하신 것은 청지기적 사명이 여자에게도 해당됨을 보여줍니다. 당시 고대근동지역의 여인들은 무시당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과 남자와 동일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물들의 암수는 따로 말하지 않는 반면 인간의 성별은 구별해서 언급합니다. 구별의 이유는 설명하지 않지만 남녀의 역할이 구별되어야 함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데, 복의 내용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입니다. 전능자께서는 애초부터 각기 종류대로 여러 사람들이 땅에 충만하도록 창조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정에서 시작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 시간이 더디고 오래 걸리겠지만 과정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명을 감당한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까지도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갈 때, 결과와 함께 과정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목적이 정당할지라도 과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본문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과정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서라야 할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말 2:15).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혹은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취한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고, 훨씬 빨리 충만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습니다. 느리게 가더라도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하고, 성공적인 결과보다 성경적인 과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더디고 오래 걸리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복”으로 선언하셨음을 주목하십시오. 결과만 따로 떼어내어서 복이라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처럼, 먼저 힘겨운 과정이 있고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과정 없이 기쁨으로 거두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닙니다(시 126:5-6). 힘겹지만 올바른 과정은 생략한 채 조급한 결과만을 추구하는 오늘날 시대풍조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은 결과와 더불어 과정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머물러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은 사람이 신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29). 짐승의 음식조차 공급하셨습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30). 사람은 본래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 위치를 잘 지키며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염려할 것 없도록 창조되었지요.

그런데 본래 인간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을 발아래로 두고 무시하면 만물이 인간 위로 올라와 우상으로 군림합니다. 위아래가 뒤집혀 다스려야 할 돈이 오히려 인간을 정복하고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본래 인간이 살아가는 순서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순서를 바꿔버리면 계속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여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위치를 뒤집고 순서를 바꾸는 이것이 타락의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와 원리를 떠날 때 인간은 질서 상태에서 카오스 상태로 역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물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자기 모습을 갖춰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게 여기셨습니다. 이제 인간 창조와 함께 천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게 되었고, 하나님의 만족함은 더욱 커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31).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듯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도 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어야 할 원리대로 살아있는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만큼 보기 좋은 모습은 없습니다. 아담은 벌거벗은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위엄이 넘치고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의 모습 자체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를 떠나,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이 되었을 때는 나보기도 역겨워졌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수고해도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고 계신 영광에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그분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이탈하면 화려하게 치장할수록 천박해보이고 열심히 일할수록 추해보이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하신 사건을 보고 하나님의 이기심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하지만 개돼지 취급 받지 않고 사람대접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정당한 권리라면 창조주께서 창조주로 여김 받으시려는 것도 왜 잘못이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인간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최상의 복된 상태가 되게 하셨다면 오히려 찬양받으셔야 마땅합니다. 너무나 미미한 존재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두신 하나님, 너무나 부족한 자에게 늘 은혜를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 내 존재 자체를 이토록 보시기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자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 주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하셨습니다(2:1-3). 하나님의 안식하심과 관련해서는 홈페이지 말씀 게시판에서 십계명 특강 ‘제4계명-안식’(07년03월25일, 출 20:8-11)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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