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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지만 막지 않습니다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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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만 막지 않습니다 (요 11:17-27)


흔히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모성애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연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합니다. 어머니들은 자녀의 고통을 두고 보지만 않습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자녀를 살립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예루살렘에서도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본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예수님이요, 어머니는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가시면류관에 찢겨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 눈과 얼굴을 가립니다. 몸은 채찍에 맞아 찢겨졌고, 옷은 그 피투성이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그 때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이 사정없이 떨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네 어머니 같으면 <이놈들, 날 먼저 죽여라. 날 두고는 못 간다.......못 가...>라고 울부짖으며 십자가 앞을 가로막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마리아는 비록 슬픔에 목이 메어 울기는 했으나, 골고다로 가는 길을 막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날 먼저 죽이고 가라>고 울부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숨을 거둘 때까지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았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녀는 슬픔에 겨워 울면서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의연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두고 사람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지독한 여자야. 어떻게 아들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꼼짝도 않고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정말 강심장이야......나 같으면 벌써 기절했을 거야....>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가 본래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로 독한 여성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여성이요,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가슴속에 예수님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분명하게 살아 있었고,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녀를 지탱해 준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이것을 예감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직후, 정결예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성전에서 만난 경건한 노인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4-35절을 보면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칼이 내 마음을 찌르는 고통, 그리고 아들 예수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고 했는데, 언제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눈앞의 고통스런 장면은 모두 예정된 대로, 말씀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이 일이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나는 보낼 수밖에 없다. 찢어지듯 아프고 슬프지만, 난 그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기억하고 있는 말씀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요셉이 임신한 마리아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했던 말씀도 남편에게 전해 들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에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나이 서른 살 쯤 되어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기 위해 나사렛을 떠나실 때, 마리아는 그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어미를 두고 나가면 어떻게 하는가> 등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따라갈 때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통해서 세상에 보내신 예수는 제 아들이 아님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저희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가 가는 고통의 길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어찌하든지 저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들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할 구원자 메시아였으므로, 그 길을 가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므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울기는 했지만, 막지는 않았습니다. 

또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말씀이 지금도 그녀의 가슴에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 이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녀는 예수님이 이렇게 끝날 존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큰 자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장차 왕이 되어 영원히 다스릴 분이며, 그의 나라가 무궁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원할 분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끝날 리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을 위한 과정일 뿐이며, 십자가 너머에는 영원한 생명,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건 과정일 뿐이다. 그는 반드시 일어나 승리할 것이며, 만왕의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힘을 내라. 그 길을 가로막지 말라. 겉으로 보기엔 죽음의 길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승리의 길, 왕의 길을 걷는 중이다. 이 십자가의 길이 사실은 그의 왕도이다.> 

이렇게 생각했기에 울기는 했지만, 골고다로 가는 길을 가로 막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십시오. 당신은 내 아들이었으나, 내 아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구원자입니다. 이 길이 구원의 길이라면 가십시오. 나는 당신이 반드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비천한 여인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의 어미라 불리고, 그렇게 여겨질 수 있었던 지난 세월의 은총에 대하여 깊이 감사합니다. ..... 난 지금 당신을 단지 아들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날 구원하실 구원자, 메시아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의 고통으로 인해 슬프고 눈물이 흐르지만, 그러나 당신이 부활할 그 날 오늘의 눈물에 비할 수 없는 영광이 있을 것을 알기에 당신을 십자가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그저 마음의 믿음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눈앞의 상황에 대처하는 원리요,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이 됩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 시므온 등을 통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믿은 대로 반응하고 행동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들 예수님을 흔들리지 않고 지켜 볼 수 있는 용기는 신앙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 구원자로 믿는 믿음, 부활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실 것을 믿는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울기는 했지만, 그 앞을 막지는 않게 한 것입니다. 신앙이 그녀로 하여금 슬픔을 극복하게 했고, 신앙이 용기를 가지게 했고, 신앙이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이 우리 인생에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삶은 신앙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말씀을 기억하고 믿고 있습니까? 또 믿는 그것을 삶에 적용하십니까? 믿는 대로 생각하고, 믿는 대로 반응하고, 믿는 대로 행동합니까?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늘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베다니의 삼남매인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삼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중한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서둘러 오셔서 오빠를 고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동네 입구까지 나가 원망하듯 말했습니다. 21절을 보세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렇게 원망하듯 말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믿은 것을 근거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는다면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실 생명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내가 빨리 와서 오라비를 고쳐주지 않아서 네가 매우 섭섭해 하는구나. 그러나 너는 나를 잘못 알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넌 나를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네가 날 그렇게 믿는다면 오라비가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말거라. 반드시 내가 생명을 줄 것이다. 날 그렇게 믿는다면 당황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는 정확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는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면 안 됩니다. 신앙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 안 됩니다. 신앙과 행동이 다르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늘 연약한 결정적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새벽기도회에 나갔습니다. 늘 새벽 네 시만 되면 깨어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아버지께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개인기도 시간이 되자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의 종들을 도와주시고, 가난한 성도들에게 쌀을 주시며, 병든 사람들에게 고침을, 가난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주옵소서. 어려운 이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어느 날 아버지가 출장을 가셨을 때, 아들은 금고에서 돈을 꺼내어 담임목사님에게 돈을 갖다 드렸습니다. <어려운 이들에게 쌀도 사 주세요. 병원비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병원비도 대 주세요. 가난한 학생에게 등록금도 보태 주세요. 저희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입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금고가 빈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도둑이 들었느냐?> <아닙니다. 제가 아버지의 기도가 응답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새벽에 기도하시는 것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들을 꾸지람했습니다. <녀석아, 기도는 기도고, 내 돈은 내 돈이다.> 

여러분,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이 부디 믿는 그대로 삶에 적용하면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반응하고 행동한다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몇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커피 봉사를 하고, 사무실 정리를 도맡아 하고, 기피하는 일을 혼자 맡아서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기는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다른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믿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난 그 말씀을 믿고, 믿은 대로 할 뿐입니다.> 이게 참 신앙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원통함을 신원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누군가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을 받을 때 대항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 제 마음을 아시는 줄 믿습니다. 저의 억울함을 아시는 줄 믿습니다. 저는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삶과 저를 비난하는 그와의 모든 관계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죄없는 자신을 죽으려 하는 사울 왕에게 인간적인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살다가 실패를 만나 가진 것을 많이 잃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커다란 실패 앞에서 자살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망에서 일으키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라고 진실로 믿고 찬양하는 사람이라면 그 위기에서 믿는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깁슨이란 미국인에게 사람들이 성공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할 것. 셋째,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이 세 가지가 비결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군요. 전 특별한 비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깁슨이 대답습니다. <그렇지요. 특별한 비결은 아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평범한 원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입니다. 믿음의 원리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성도는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날 때 슬퍼 울기는 하지만, 그 길 끝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의 딸이 죽은 후 그는 여전히 침착하게 책상에 앉아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정말 자네 대단하네. 딸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평화스러워 보일 수 있나? 자네의 신앙을 나에게 말해 주게. 나도 자네처럼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화스런 마음으로 살고 싶네.>  파스칼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믿었고, 그것을 딸을 보내는 슬픈 현실에 적용하여 딸을 믿음으로 보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 천국을 믿는 성도라면, 사랑하는 가족이 천국으로 갈 때 슬프지만 소망 가운데 보내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살고 계십니까? 신앙은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전 영역이 신앙에 의해 인도되고, 질서를 부여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앙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고, 어떤 일을 만날 때 판단이 달라지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심을 믿는다면 그 분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진리로 믿는다면 그 진리를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말씀대로 적용하면서 살길 원합니다. 믿음 그대로 적용하면서 살길 원합니다. 신앙대로 행동하길 원합니다. 신앙이 삶의 방식이 되고, 행동 근거가 되길 원합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갈릴리 바다로 뛰어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는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오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빠지지 않을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것을 믿게 되자, 그는 믿은 그대로 행동하여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누구나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본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신앙이 위대한 힘을 가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체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하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신앙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믿는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할 때 능력 있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였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을 삶에 적용하십시오. 예수님 없는 삶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옴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모든 일에 신앙하는 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위대한 신앙의 힘을 체험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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