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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하시는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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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시는 하나님 (창 28:10-22)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그 중에서 야곱은 잉태에서부터 임종까지 그의 일대기가 성경에 소상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아비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재물의 부요와 열국의 주가 되는 명예였습니다(창27:27-29). 또 하나님으로부터는 가나안 땅을 얻는 것과 자손이 번창하리라는 후손의 복, 일평생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창28:13-15). 

이 정도면 야곱은 세상에서 소원성취를 한 사람이고 만사형통의 복을 누린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130년의 생을 되돌아보며 애굽왕 바로에게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습니다(창47:9). 한번 열거해 보십시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형님과 장자권 문제 때문에 어머니와의 생이별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뒤틀린 혼인으로 원치도 않던 두 여자와 함께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가정불화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20년간의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괜찮았습니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하는 부인 라헬이 죽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외동딸 디나가 세겜의 추장에게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큰아들 르우벤과 첩 빌하 사이의 불륜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고 요셉에게 위로를 두고 살았는데 그 사랑하는 요셉마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7년 대 기근을 만났습니다. 말년에 낯선 땅 애굽으로 이민 가는 등 그야말로 험한 꼴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 같습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같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니 이것은 모순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이 속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한 축복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만사형통이나 부귀영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짜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입은 것이요,(말1:2,롬9:13, 요일3:1) 둘째는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 축복입니다.(사43:1,롬5:11,엡1:4). 이것과 비길만한 복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받은 축복이고, 우리가 받은 축복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혈통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보내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일은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된 것은 찬란한 축복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은 불의의 병기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근심되게 하며 사는 불행한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너무나 좋아서 세상 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는 대학교수직, 목사직을 거절하고 인도의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긴 항해도중 유산을 했고, 둘째 아이는 열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1년 반 동안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고 아내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후에 셋째 아이도 죽고 결국 자신도 몸이 약해져서 미국으로 요양을 하러 가던 중 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적 시각으로 저드슨을 본다면 예수 때문에 망한 자요 저주받은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자처하였고 주님께 아름다운 도구로 쓰임 받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사실 야곱이 장자권이 탐이 나서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서를 속이
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 첸 것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외삼촌 밧단아람의 집까지 가는 1500리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어두운 밤은 찾아 왔습니다. 피곤한 육체를 이끌고 판판한 돌을 취하여 베개로 삼고 곧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잠든 사이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12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그 사닥다리 위를 쳐다보았더니 거기에 보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야곱은 너무나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는 말이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어디가 하늘의 문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하늘의 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 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13절에 보니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야곱은 돌 단을 쌓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날 야곱을 브엘세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다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야곱의 돌 제단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드리는 정성스러운 예배였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 살아있는 예배였습니다. 거기는 성전도 없고 제물도 없었지만 야곱은 자기의 몸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모든 순서와 맡은이들이 모든 정성을 다해서 올려 드려야 합니다. 주일을 위해서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헌금도 정성껏 준비해야 하고 기도도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찬양대도 정성껏 준비해서 올려야 합니다. 세상의 것도 대충하면 퇴출 감이고, 쫓겨나기 십상입니다. 귀한 손님 청해 놓고 먹다 남은 음식을 대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 문이 있는 곳의 예배가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을 향한 사닥다리 

그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사닥다리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밑에 있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 갈 때에 필요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사닥다리가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닥다리를 통해서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사닥다리는 죄많은 인생들과 하나님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요3:13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괴롭게 하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요6:62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사닥다리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본 하늘을 향한 사닥다리는 인간에게 주시는 큰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절망하고 좌절한 인생들! 어디를 봐도 사면초가인 불쌍한 백성들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문이 있으니 하늘 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일을 만나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직도 하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닥다리 위에 주님이 계십니다. 야곱의 행로를 시작부터 끝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셨고, 양육하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 그의 곁에는 사랑하던 부모도 없습니다. 형제도 없습니다. 친척도, 가족도 없습니다. 다만 열린 하늘 문 위에 계신 주님뿐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분 곁에 있을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 갈 때에 답답한 때가 있습니다. 절망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야곱처럼 사닥다리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썰물 때가 있는가 하면 반드시 물이 몰려드는 밀물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겐 하늘의 원리가 있습니다. 온갖 각양 좋은 은사가 내려오는 하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 믿고 기도하는 사람, 예수님이 영원한 문이신 것을 믿는 사람은 그 문을 찾고 새로운 길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야곱에겐 큰 소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서 지금 저 사닥다리 위에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며,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받은 말씀을 부여잡고 그는 힘을 내어 외삼촌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성공하여 금의환향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야곱이 주저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시간 동일한 영감과 확신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곱이 받은 언약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닥다리 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야곱이 홀로 고독한 밤을 지새는 것이 안쓰러워 거기까지 찾아 와 주신 하나님! 더구나 지금 의로운 일을 하다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짓고 설자리가 없어서 도망가고 있는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여럿이라도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자식을 더 측은히 여기는 것이 부모가 아닙니까? 지금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거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우리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세 가지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13절에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둘째는 14절에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자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셋째는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이겨내면서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습니다.(창 31:40) 그의 외삼촌 라반에게 열 번이나 품값의 속임을 당하는(창 31:41)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마치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 길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겠다고 발버둥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여정 속에서도 평안할 때는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마다 다가와 손내미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내 인생 길에서 너무나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에 나를 밀어 주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등뒤에서! 내 인생 길에서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잔잔한 미소로 나를 재촉해 주시는 주님이,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나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소원과 헌신 

이제 야곱의 소원과 헌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동녘에 솟아오르는 광명한 태양을 바라보면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분의 약속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베개 하였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가지고 가던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것은 성별의 의미도 있겠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부를 수 있었던 야곱의 믿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아뢰었습니다. 

야곱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고 그를 지켜주시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편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지금 나와 여러분에게도 심각한 당면 문제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절실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박한 소원을 말씀드리면서 하나님께 참된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21하반절). 

이것은 대단히 소중한 고백입니다. 구약 신학의 핵심입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즉! "야곱을 다스리며 보호하며 그의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분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경배와 헌신과 복종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바로 이곳 기둥 세운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22). 

셋째,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22하반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베푸셨던 은혜에 대해서 얼마만큼 신실하게 응답하였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도 귀하지만 더욱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벧엘에 나타난 하나님께 평생에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성전을 지어드리며, 십일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십일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성도)만 할 수 있는 거룩한 헌금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였습니다(빌 1:20, 21). 

저도 여러분도 야곱과 바울이 받았던 은혜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야곱처럼 기름을 붓고 간절한 마음을 주님에게로 향한 기도와 소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의 벧엘 체험 사건은 야곱의 일평생을 좌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 성도님들이 벧엘 사건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붙들고 힘있게 달려가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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