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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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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봉쥬루 디우 에메 오우 (DIEU AIME OU) 여러분의 사랑, 특히 저녁과 새벽에 그리고 심지어 철야까지 하면서 지진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아이티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 여러분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좌우 할 청년들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 여긴 모인 청년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미래를 봅니다. 여러분의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떤 비전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여러분을 부러워하는 것은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미래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년을 '미래를 열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갑갑하게 막힌 절망스러운 현실을 밝게 열어갈 가능성 즉 시간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청년이라면 열정과 더불어 열정을 표현할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도 그 열정을 풀 시간이 없으면 미래를 열 수 없고, 또 시간이 있어도 하나님 주신 꿈으로 인한 열정이 없다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 사역에 참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번은 콜레라가 창궐하는 수도 포트 프린스에서 차로 4시간이나 떨어진 ‘부즈’라는 1200m 고지 속에 있는 마을에 갔을 때입니다. 그 깊은 산속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치 원시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은 것처럼 마을의 광경을 보고 아픔을 느꼈습니다. 물이 귀하다보니 콜레라가 마을 전체를 덮는 그런 고통이 와도 손도 못쓰고 죽음을 운명처럼 바라보는 그들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눈의 초점을 잃어버린 채로 여기저기 누워 쓰러져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을 차라리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젊은이도 있었어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십니다. 외쳐도 ‘Jesus is your hope’ 예수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십니다. 외쳐도 ‘No hope, No hope’ 희망 없어요. 희망 없어요. 

이런 현지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제 숙소에 들어와서 며칠간의 일들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 저렇게 무덤덤할까, 아마 지진의 피해로 수많은 죽음을 보고 이젠 그것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본문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난 뒤 이상하게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울지 말라. 울지 말라.’ 제 마음 속에 이런 음성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사람이 슬픔과 고통이 너무 크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울어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체념이 일어나면 아마 아이티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희망을 읽어버린 다는 것,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장례행렬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나인성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이란 동네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쯤 여행하면 발견하게 되는 골짜기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동네였습니다. 아마 처녀 때에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 후 그녀에게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시기가 있다면, 갓 결혼을 해서 낳은 자녀들이 재롱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순도순 사는 때일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도 인생의 푸른 꿈을 꾸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가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고독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을까요?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고생을 이겨가며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아들을 놓고 “청년아!”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제 성인으로 불릴만한 나이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에 꿈이 부풀어 있었을까요? ‘이제는 가정의 기둥이 생겼구나. 이제는 기대고 살 만한 기둥이 생겼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더 흘릴 눈물이 없을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팔자가 사나울까?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 보내다니….’ 그러면서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를 이끄시고 나인성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번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군중을 데리고 나인성을 향해서 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문 입구에 이르렀을 때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사탄이 마치 자신의 전리품인양 한 젊은이를 관에 담고는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죽음의 사신처럼 의기양양하게 성을 나오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이요, 대결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주라고 한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피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서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면으로 대결했습니다. 관 뒤에 따라오면서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로 주님은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과부를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먼저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 실패한 자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말이 40여 번 나옵니다. 주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자를 가장 먼저 주목하시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과부가 얼마나 슬퍼할까? 과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까? 얼마나 자기 팔자를 놓고 탄식하고 있을까?’ 주님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고, 그 과부의 고통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함께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과부를 보고 울지 말라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 당하는 사람을 볼 때, 위로한다며 “울지마, 울지마” 하고 말하지만 대부분 빈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말로 “울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예레미야를 통해 대언하시던 그 말씀을 지금 주님이 여인에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렘31:16-17)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자 걸어가던 자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그 청년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위로와 기쁨과 희망으로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 본문에 담긴 사건과 주님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 왜 그 피곤하고 힘든 아이티를 또 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어느 선교사의 간곡한 부탁,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다녀 온 것입니다. “목사님, 사실 현지에서 일하는 저희는 일에 치여 이런 행사를 하다보면 설교가 귀에 안 들어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저의 청을 하나 들어 주십시오. 다음에 한번 오십시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조가 아닙니다. 작년 한해에 이 아이티에다 쏟아 부은 돈이 70조원입니다. 그래도 이 모양입니다. 이 나라를 변화 시킬 힘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망치로 한 대 맞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조가 아닙니다. 이 나라를 변화 시킬 힘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예수가 누구입니까? 이 아이티와 도미니카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예수 앞에 드린 사람들입니다. 제가 도미니카로 갔을 때 이 낯설은 이국 만리에서 저를 친 형제처럼 맞아 주던 분이 김현철 선교사님입니다. 이분은 전에 삼미그룹의 회장이셨습니다. 회사가 정부의 미움으로 혹자 부도가 나고 실의에 빠지면서 정말 모두를 증오하는 삶을 살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 과정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 앞으로 돌아 온 분입니다. 그리고 도미니카로 와서 선교센타를 위시해서 교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분인데 저보고 고생했다고 제가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티에서도 저에게 일주일 동안 집을 내준 탁형구 선교사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영락교회에서 성장한 분인데 이곳에 와서 선교사들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귀한 분이십니다. 사모님은 봉제 공장의 한국 책임자로 미국인 사장의 신임을 얻어 1000여명이 되는 직원을 거느리고 옷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분인데 그 공장 안에 쉼터라는 식당이 있는데 24시간 밥솥에 밥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이 현장에 갔다가 배고프면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새벽에 4시면 부부가 꼭 일어나서 새벽 예배를 드리는 정말 경건의 가정입니다. 

뭐,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주님을 위해 한 생을 바친 사람들의 모습은 한폭의 잘 수놓은 그림 같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자신을 구원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은혜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아침! 우리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부활하신 그 영원한 생명의 유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세상 앞에 무기력하게 넘어지고 주저앉으면 되겠습니까?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청년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청년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청년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 죽으면 어머니에게도 예수님께도 염려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죽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보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죽은 상태는 부모님에게는 불효가 됩니다. 나라에는 불충이 됩니다. 예수님께는 불신이 됩니다. 청년이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번 아이티에서 자원 봉사자로 온 청년들에게 아이티에서의 주일 예배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은 “세상이 못 말리는 친구들”이다. 거기엔 자신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범생이들도 있고 돌탕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자 그들에게 삶의 분명한 목표가 세워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작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반을 아이티에서 우물을 파고 콜레라 클리닉에서 자기도 전염 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헌신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무더운 더위와 씨름하면서도 지지치 않는 원동력은 바로 저녁 9시가 되면 큐티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에서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메여 살았고 주님이 가라니까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제가 온 다음 날 현지 목회자들의 강의를 마치고 쉬는데 저를 초대한 GAP의 이동렬 선교사가 뭔가 긴장을 하고 매우 바쁜 듯한 행동을 하길래 오늘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원더 걸스의 리더인 선혜 자매가 이 아이티에 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놀라며 그렇게 바쁜 자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선교단체에 친구가 있는데 여기를 꼭 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원더 걸스의 선예 자매는 빌보드 챠트에 오를만큼 인기 가수가 아닙니까? 자기 메니저인 박진영에게 떼를 쓰고 온 것입니다. 
  
제가 공항에서 본 첫 인상은 너무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까만 망토 같은 부라우스를 입고 하얀 얼굴에 엣띤 모습은 여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고운 소녀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콜레라가 창궐하는 지역으로 가기 위해 1000m가 넘는 깊은 산을 향해 3시간이나 되는 ‘부지’라는 마을을 향해 갔습니다. 그냥 온게 아닙니다. 온몸을 다 바쳐 그 불쌍한 영혼들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울면서 봉사하고 물질로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청년의 때는 일어날 뿐만 아니라 강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안식년때 몬타나에 있는 글레시아 네셔널 파크(Glacier National Park)의 세인트메리 호수 (St. Mary Lake)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이런 푯말이 붙어 있습니다.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시 마시오.” 만약 먹이를 주다 적발되면 벌금을 물립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모든 쓰레기통이 두꺼운 철판으로 씌워져 있고,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습니다. 야생동물들이 쓰레기통을 열거나 뒤집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국립공원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버려집니다. 사람들이 귀엽다고 야생동물들에게 고기를 줍니다. 그러다 보니 추운 겨울이 오면 야생동물들이 굶어죽는 답니다. 

왜 그럴까요? 평상시에 사냥을 해서 잡아먹어야 하는데 손쉽게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에 길들여져서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겨울철에는 굶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육사에 의해 길들여진 사자는 더 이상 사자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요기와 어린아이의 놀이개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동물의 왕국에서 가장 힘이 센 사자라 할지라도 야성을 잃어버리면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피값을 지불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이룰 것이라는 기대와 비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친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을까요? 믿음의 야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야성은 거친 산 속에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길러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너무나 쉽게 세상과 타협합니다. 강한 영적 군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단한 영적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훈련받기를 싫어합니다.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즐기려는 태도를 가지고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괴테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보다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이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지만 내 삶의 우선순위를 땅엣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창립 42주년에 다시 한번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지체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점검하고 새롭게 도약을 위해 또 한번 말씀을 붙잡고 모든 성도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역시 그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새벽 날개를 펴고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걸었던 광야는 겉보기에는 사막과 황무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기막힌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은 아무나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 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광야에서 생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의 비밀이 있고, 이들을 인도해서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인도하는 율법의 비밀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좌절하고 절망하는 인생들에게 성막의 비밀은 다시금 그들에게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또한 이 성막 위에 떠오를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들을 보호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의 안내판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내일부터 새벽 집회를 열게 하신 것입니다. 

자!! 우리 교회 모든 청년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새벽 날개를 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애에 한번도 새벽에 안 나온 분들도 도전해 보십시요!! 반드시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넘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 여인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어버린, 그런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은 고통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애에 실패의 반복 속에서 인생의 절망의 두려움을 가진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봉사하다 지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저앉지 마십시오. 특히 청년들 가운데 어렵게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을 하려고 하지만,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친구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말고 ‘청년아!! 일어나라’는 이 음성을 주 앞에 나아오는 자마다 분명히 들려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납시다. 그리고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함께 기도해” p. 43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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