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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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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했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 종교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며, 다만 악한 사회 환경에 물들어서 악해 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수양을 통해서 선한 본성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탄식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는데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고 반발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행을 합니다. 불우이웃 돕기에도 참여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도 내고, 고아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선행을 했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공의의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내세울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고,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왜 세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는데 왜 반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시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꽤 괜찮은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을 해친 적이 없다. 내가 일해서 먹고 살았지 남의 것을 빼앗은 적이 없다. 그런데 나더러 죄인이라고 하다니 수긍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평가해 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내가 선행이라고 여겼던 것조차 실은 가증한 위선에 불과함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64장 6절에 이르기를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범적인 종교인들로서 기도도 많이 하고 자선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하고 구제를 하되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대하여 책망하시기를 “27)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라고 하셨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고, 진실한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실상을 올바로 알려면 하나님의 기준 곧 하나님의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실상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올바로 진단해 줍니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하신 대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거울이 우리의 추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해서 거울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우리의 추하고 악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해서 율법이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병원에 가면 최첨단 의료기기가 많습니다. 비용이 비싼 것이 흠이지만, 이전에 발견하기 어려웠던 암이라든가 혈관의 이상 증상을 족집게처럼 찾아냅니다. 그래서 건강한 줄 알았던 사람이 암환자로 진단을 받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그렇다고 의료기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대신 병을 조기에 발견한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육신의 병을 제대로 진단하는 것도 그렇게 고마운 일이라고 한다면, 영혼의 병을 진단 받는 것은 더욱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7장에 이르기를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드러날수록 율법의 거룩하고 공정함이 더욱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합니다. 그것은 율법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한입니다. 율법은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정죄하는 경우가 절대로 없으며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율법을 범한즉 정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죄인에게 선고한 형벌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16)…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율법이고, 그것을 어긴 것이 죄요, 죄인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사망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한 대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므로 한 평생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죄를 짓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우리 속에 있더라도 그 의지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아무 선도 행하지 못하고 그 다음 순간, 힘없이 악으로 기울어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깨닫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만약에 우리에게 죄인 됨과 죽을 운명에 놓인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전부라면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망에 처한 인생들을 살리시려는데 있습니다. 환자가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아야 의사의 지시에 순종하듯이, 인간은 자기가 죽을 죄인인 사실을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율법을 주셔서 우리 자신의 죄인 됨과 사망에 처한 비참한 운명을 일깨워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고마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안내해 줍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두 손 들고 하나님의 선처를 구하게 됩니다. 이는 바다에서 인명을 구조하는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구조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서 곧장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붙잡혀서 둘 다 익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에 빠진 사람의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더 이상 반응하지 못할 때 구조원이 접근해서 그를 안전하게 구조해 냅니다. 스스로 무언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실상을 철저하게 알고 한없는 절망에 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 찬송가와 같이, 자기의 죄인 됨과 절대 무능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는 사람이 자기의 의로운 행실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인생들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으며,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죽음에서 살려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에 의해 우리는 정죄 받고 심판에 처했으나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믿은 이후에도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위로 당당히 의인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은 순전히 우리의 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행위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에 보니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 받을만한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너는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으니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은혜는 거저 받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선물로 주신 것이므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을 은혜로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 보다 잘 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벌이 좋은 사람들도 많고, 학벌 좋은 사람들도 많고, 돈 많은 사람들도 많고, 출세한 사람들도 많고, 재능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조건을 다 갖추었더라도 그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는 편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은바 구원의 귀중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애쓰고 수고해서 얻은 것은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도박을 해서 번 돈은 헤프게 낭비하지만 땀 흘려 번 돈은 아껴 씁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은 비록 거저,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은 것이지만 우리가 도박을 해서 번 돈을 쓰듯이 하찮게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믿음으로 거저 받은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주보다 더 큰 희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그 누가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의 생명을 희생할 사람이 있겠는가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놓을 사람이 있겠는가를 말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다고 하는데도 아무 감동이 없고 늘 듣던 이야기인데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어찌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를 위해 믿어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또는 아내를 위해, 또는 남편을 위해, 또는 부모를 위해 믿어주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지만, 우리는 구원의 소중함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왜 하나님의 은혜인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2)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자손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율법을 불순종하다가 공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이 큰 구원’ 곧 독생자께서 자기 목숨을 버려 이루어주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줄 아는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아끼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돈이 곧 우상이 되고,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더 위하면 배우자가 우상이 되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가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몇 번째로 소중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나에게는 없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궁극적인 구원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만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3)고 하셨고,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계 2:25-26)고 하셨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성경 66권 그 어디에도 중도에 믿음을 포기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농부가 씨를 뿌렸더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길 가, 돌밭,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 좋은 땅은 다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 비유를 구원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좋은 땅과 같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결실하는 성도들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 참된 믿음이 있는가 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 사이비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장차 심판대 앞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끝까지 붙잡아 주셔서 기어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그를 불러 사도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그의 연약함으로 인한 것이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 너그럽게 우리의 실패를 용납하시고, 다시금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려면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에 “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 능력의 오른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약속하시기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성도가 되기 원하시거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도님들이 영생에 들어가기까지 함께 하시면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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