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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행 17: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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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행 17:22-31)


5월 21일에 종말이 온다고 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 집단의 지도자 해롤드 캠핑 씨는 5월 23일 기자 회견을 열고 재차 입장을 밝혔습니다.“종말 날짜 계산에 오차가 있었다. 10월 21일에 종말이 온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이미 심판의 날은 왔다. 영적인 심판은 이미 시작됐다. 이미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는 성경을 통해서 그 변화를 알 수 있다.” 5월 21일이 세상 종말의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구차한 변명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육체적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종말이 10월 21일에 올 것이라고 여러 차례 이미 말한 바 있는데 다만 그걸 강조하지 않았었을 뿐이다. 이미 심판은 끝났다. 더 이상 구원은 없다. 10월 21일까지 우리는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종말의 날짜가 틀렸는데 사과할 용의가 없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그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다. 날짜가 틀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런 사실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사실 시한부 종말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시한부 종말론은 교회 역사 이천 년 동안 단골 메뉴처럼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었던 그릇된 주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주장을 계속해서 펼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주장에 그렇게 쉽게 동조하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중심으로,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인간의 욕심이 이끄는 대로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 옛날 아덴 사람들을 앞에 두고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행한 사도 바울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그는 가는 곳마다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데살로니가에서도 소동이 있어서 밤에 몰래 베뢰아로 피신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말씀을 믿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와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옮겨간 곳이 바로 아덴이었습니다. 

아덴은 일찍부터 지혜의 도시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그 아덴에서 그는 헬라 철학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다만 말쟁이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데리고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갔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말로 그를 공격하여 망신을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하던 그가 지혜의 도시 아덴의 중심지에서 마음껏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그 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는 먼저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봐도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알지 못하는 신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어째서 그런 신을 섬기고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문제를 제기했을 뿐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해답까지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섬겨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인간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행 17:24 상반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뭔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종종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대놓고 하나님과 따질 때도 있고 흥정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볼 때에 오늘 우리도 역시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는 가운데 먼저 하나님은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모든 족속을 하나의 혈통으로 지으셨다는 사실도 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류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모두가 하나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종적, 성적, 사회적, 경제적 차이들은 다만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구원이란 바로 그 하나님의 차별 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그 사랑이 회복시켰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처럼 생각하여 아무리 열심히 섬길지라도 그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부터 돌아서라고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잘못된 관계를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서 아는 척했던 것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척했던 것도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온갖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온전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분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을 것 같으면 우리도 또한 주님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믿음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쓴 『너에게 묻는다』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허옇게 변한 골목길 연탄재를 무심코 발길로 찼던 사람들은 가슴이 뜨끔할 것입니다. 연탄을 잘 모르는 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하여간 시인은 묻습니다. ‘자신을 다 태워서 따뜻한 아랫목을 만들어 주었던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찰 수 있는가?’ ‘누구에게 진실로 뜨거웠던 적이 있는가?’ ‘자신을 불태워 누군가에게 내어 준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너는 과연 무엇을 믿느냐?” “너는 과연 어떻게 섬기느냐?” 회개를 촉구하는 사도 바울의 요구가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요구로 들리는 까닭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던 그 옛날 아덴 사람들과 오늘 우리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과연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과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이제는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하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고 그 뜻을 받들어 죄 가운데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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