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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충만하면 (엡 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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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하면(엡5:18-21) 

어떤 미국 사람이, 프랑스관광을 갔다. 잠시 시간을 내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있는, 한 골동품 가게에 들렀다. 이것저것 구경하는 가운데, 진열장에 전시되어있는, 진주목걸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래되고 낡아 색깔은 다 바랬지만, 진주목걸이에 장식되어 있는 장식품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500달러를 내라고 했다. 조금 비쌌지만 장식품이 마음에 들어, 사서 미국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한동안 보석상자에 넣어,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그러다 현찰이 좀 필요해서, 보석상에 가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것이라, 과연 얼마나 값을 쳐줄지 호기심도 생겼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보석상에 가지고 갔더니, 보석상 주인은 그 진주목걸이를, 두꺼운 돋보기로 한참동안 감정했다. 그리고 나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2만 달러를 주겠으니, 제게 파십시오."이렇게 말했다. 500달러를 주고 샀는데, 2만 달러를 주겠다고 해서, 그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일단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목걸이를 가지고, 꽤 알려진 골동품가게를 찾아갔다. 이 골동품가게의 주인도, 역시 두꺼운 돋보기로, 한참동안 감정을 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하더니, 결정이 끝났는지 이렇게 말했다. 

"5만 달러를 드리겠다. 그러니 이 진주목걸이를 파십시오." 그는 더 놀랐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골동품가게 주인에게 "색깔이 다 바랜 진주목걸이인데, 왜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가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골동품 가게 주인은, 의외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직도 모르셨어요?" 

그러면서 돋보기를 진주목걸이에 대고, 자세히 쳐다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른편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친필사인이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진주목걸이 자체만으로는, 불과 몇 십 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적혀 있는 글씨와, 친필 사인 때문에,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간다."고 했다. 보석 값보다는, 거기에 적힌 글 값이, 훨씬 더 비쌌다.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정말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렇게 살 수 없다. 값진 삶을 살아야만 한다. 아무 곳에나 갈 수 없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진주목걸이에, 황제 나폴레옹의 사인이 있어도, 고물상에 있으면, 불과 500불 짜리 밖에 안 된다.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니까, 엄청난 진가를 발휘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는 명령이다. 2인칭 복수, 현재형이다. 수동태이다 

우리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도인데, 술자리에서 술이나 마시면 되겠는가?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면 육신을 좇아, 행할 수밖에 없다. 자기도 모르게 방탕하게 된다.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떻게 되는가? 

1. 성령으로 충만하면, 구속받은 감격으로, 찬양하는 삶을 산다(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첫 번째 특징이 무엇인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아니다. 예언하는 능력도 아니다. 천사의 말 같은, 방언도 아니다. 단순하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술 취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가? 노래방에 가서 세상 노래나, 방탕한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시와 찬송, 신령한 노래는 무엇일까? 신학자 F.F.부르스는 시의 초점을 감사로, 찬송의 초점을 고백으로, 신령한 노래의 초점을, 간증으로 보았다. 즉 우리의 찬송은 감사요, 고백이요, 간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넘쳐나기 바란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가득 차있다. 초대교회는 찬송하는 교회였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들이 모이면, 주님을 찬양하고, 신령한 노래들을 부르며, 힘을 얻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주님을 자유롭게 찬양하였다. 찬양이 없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히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다. 즉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다. 성령으로 충만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입에서 찬양이 터져 나온다. 부흥이 일어나려면, 먼저 찬양의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찬양을 드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는 구속함을 입은 사람의 증거다. 찬양대는 우리 교회에, 찬양의 부흥을 일으킬,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찬양대는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찬양이 나오게 된다. 

그때 은혜의 샘물이 흐르게 되며,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된다. 그러므로 찬양대 헌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후원해 주시기 바란다. 허드슨 테일러라는 중국선교사님이 계셨다. 청년시절 신앙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라는 책자를 읽게 된다. 

그때의 감격을 "나는 갑자기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받아드리고, 찬양할 것 밖에 없음을 알았다" 고백했다. 우리들도 구속받은 감격 속에서, 언제나 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40년 전, 1971년에 '척 스미스'라는 젊은 목사님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교회를 개척했다. 천막을 치고서, 20명 남짓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다. 교회 이름을 '갈보리 채플'이라고 지었다. 교회표어를 "성경대로 살자."고 정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자는 것이었다. 

세상지식과 경험은, 모두 무시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연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라,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라! 알코올 중독자도 좋다. 마약 중독자라도 괜찮다. 부모님의 속을 썩인 자녀라도 상관없다. 

소매치기라도 상관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란다!" 목사에게 나오라고 외치지 않았다. 자기 교회로, 나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와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자,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에는, 히피족들이 등장하였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극도로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이었다. 머리를 깍지 않고 덥수룩하게 길렀다.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다녔다. 통기타를 치면서, 세속적이고 방탕한 노래를 불렀다. 마리화나를 피웠다. 아무데서나 노숙했다. 

척 스미스 목사님과, 갈보리채플의 교우들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긍휼과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감화를 받고,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히피족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기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되었다. 히피족들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또 맨발로 다니니까, 카펫이 더러워졌다. 더러운 몸으로 앉았다가 일어나면, 그 의자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결정을 내려야 되었다. 

"그들을 계속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못 오도록 막을 것인가?"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향해서 교회 문을 활짝 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의 문화와 언어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함을 허용했다. 그때 그들이 교회에서, 부른 노래가 복음성가다. 

그때 히피족들이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 가운데 "작은 촛불 하나가"라는 제목의 복음성가 있다. 그 곡의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을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니,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외치기 원하네." 

술에 취해서, 방탕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으로 감화 받았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인도할 때, 그들은 구원받아 변화되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신령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감동을 받고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모습이 되기 바란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첫 번째 특징은, 새 노래, 신령한 노래, 찬양으로 마음이 가득 차기를 바란다. 


2. 성령으로 충만하면, 감사하는 삶을 산다(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감사하는 삶을 산다. 술 취한 사람은, 그저 욕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서로 다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밖에 없다. 모든 복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오기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늘 감사하는 삶을 산다. 

어떤 존경받는 교수님이 계셨다. 교회 장로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었다. 연세가 들어 은퇴를 했다. 그 분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 제자는 큰 잡지사의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스승이 살아온 길을, 자기의 잡지에 싣고 싶었다. 

그래서 스승에게, 자서전적인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약속된 날이 이르러, 제자는 두둑한 원고뭉치를 기대하면서, 스승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스승이 건네주는 것은, 얇은 종이 한 장이었다. 거기에는 단 한 줄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제자는 실망한 눈빛으로, 스승을 쳐다보았다. 그 때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고청탁을 받고서 내가 걸어온 길을, 한 번 깊이 뒤돌아보았네. 물론 내가 교회 장로로, 또 교수로서 여러 일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이었네.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라는 말밖에, 적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셨다. 천 마디 만 마디 굉장한 말로, 잔뜩 늘어놓은 것보다도, 더 값지고 진실한 고백을 남겼다. 이것이 그 분만의 고백이겠는가? 우리의 지나간 날을 돌이켜보기를 원한다. 

내가 잘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작자 미상의 시가 있다. 
"나는 오늘 버스 안에서,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소녀를 보았다. 그 소녀는 매우 명랑해 보였다. 내가 만일 그 소녀처럼 예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면서, 나는 그 소녀를 부러워하였다. 

소녀가 버스에서 내리려고, 갑자기 일어나 섰을 때, 나는 그녀가 통로로 다리를 심히 절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소녀는 한쪽 다리밖에 없어, 목발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웃음을 잃지 않고 걸어갔다. 

오 주여, 부질없는 생각을 했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에게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그 후에 과자를 파는 소년을 보았다. 그 소년은 무척 귀여워 보였다. 나는 소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소년은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님은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지요? 저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다." 오 주여, 부질없는 행동을 했던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에게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또 나는 파란 눈동자의 어린 아이를 만났다. 

그는 우두커니 혼자 서서,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운동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보였다. 잠시동안 지켜보았던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얘! 너는 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지 않니?" 그러나 소년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 애가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 주여, 부질없이 행동했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에게는 들을 수 있는, 두 귀가 있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오 주여, 이 몸은 복 받은 자이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했나요? 두 다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 본 적이 있나요?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앉아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 본 적이 있나요? 

술 취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른다.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만 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한다. 항상 감사한다. 이런 감사가 넘쳐나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3.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복종하는 삶을 산다(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오늘 우리시대는, 반항을 미덕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항이 스타일이 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그는 섬기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이미 반항과 거슬림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한다면, 서로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서로 복종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피차를 향한 복종'은, 섬김의 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복종을 현대적인 단어로 바꿀 수 있다면 '예의 바른 존경'이다. 술 취한 사람들은, 괜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지기 싫어하고 싸우기를 좋아한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한다. 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간밤에, 3차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중국집으로 가서, 고량주를 또 마셨다. 집에 가는 길에는, 단란주점에 들러서, 맥주를 마셨다. 소주는 25도, 고량주는 45도, 맥주는 7도다. 그러면 그가 마신 것이, 도합 몇 도가 되나? 복잡하게 계산하실 필요가 없다. 정답은 졸도다. 

독한 술을 그렇듯 섞어 마셨으니까, 몸이 견뎌낼 수 없다. 이성을 잃어버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고, 고함을 지르면서 이기려고 한다. 질 줄을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16세기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갈릴레오보다도, 100년 앞서서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 지동설을 주장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그는 천재 과학자였고, 믿음도 독실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죽을 때, 자기 묘비명을 스스로 기록해, 남겨 놓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오 주님! 저는 바울에게 주셨던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특별한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단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에 있는 강도에게 베푸셨던, 긍휼과 은혜만을 구할 뿐이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에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그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것이 그 사람만의 고백이겠는가?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이켜 보기를 바란다. 강도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받았던 사랑은 엄청나지만,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 사랑을 받기만 원했다. 주기보다는 빼앗기만을 원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안다면, 나의 부족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다른 사람을 인정할 줄 안다. 이해할 줄 안다. 남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5:22-)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인다.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은 질서 있는 생활을 원하신다. 먼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아내의 복종을 언급한다. 또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녀들의 복종을 먼저 언급한다. 

상전과 종의 관계를 말할 때에도, 종의 복종을 먼저 언급한다. 섬겨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먼저 복종하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도 복종해야 한다. 복종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도력을 인정함을 말한다. 복종은 지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종이란 말은 '휘포탓소'인데, '아래에 둔다.'라는 말이 결합되었다. 복종하려면 상대방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에 대해, 3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내적으로는 찬송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2) 위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나타난다. 
(3) 이웃들 간에는 피차에 복종함으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늘 매순간마다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새 노래, 신령한 노래로 가득 차고, 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충만하며, 우리 자신들도 행복하며, 우리가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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