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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처럼 (벧전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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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벧전 2:18-25)


2차 대전 당시 국경을 지키던 1,200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탔습니다. 군인들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군인들은 기쁨에 들든 나머지 빨리 가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기관사는 “얼마 못가서 급경사와 급커브가 있는데 이렇게 많이 태운 채 가면 대형사고가 날 겁니다”라며 기차를 출발시키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을 인솔하던 장교 하나가 기관사에게 총을 빼들고 “당장 이 기차를 움직이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장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고한 자기들을 기관사가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관사는 할 수 없이 기차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급경사가 나타났습니다. 
기차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갔고 결국 급커브를 돌다가 탈선하고 말았습니다. 전장에서도 목숨을 지켰던 수많은 군인들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식과 질서를 무시한 한 장교의 고집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신나게 달리다가 삶의 급커브에서 제대로 돌지 못하고 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급커브가 닥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고집과 아집을 버리고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하지만 진정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립니다.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려가 애굽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립니다. 그때부터 요셉의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데도 없습니다. 아니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주인의 말에 따라야만 합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대로 못하면 얻어터집니다. 맞지 않기를 위해서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배불리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노예에게는 자기 뜻이 없습니다. 아니 자기 생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주인의 뜻이 합당치 않아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합니다. 혹 의견을 말할 수는 있겠죠? 

혹시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그것도 주인이 안 돼 하면 그만입니다. 나는 원래 노예가 아니었다고 하소연한다고 해도 그것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노예란 원래 노예에게서 태어나면 그 자식은 볼 것 없이 노예입니다. 반면에 빚에 팔려서 노예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요셉 역시 팔려온 노예입니다. 또 하나는 전쟁에서 지게 되면 포로로 끌려온 사람 가운데 죽일 자는 죽이고 그래도 좀 쓸 만하다 싶으면 노예로 삼았습니다. 떵떵거리는 가문이었다고 해도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던가 아님 임금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죄를 저질렀을 경우 하루아침에 가문이 몰락하고 모든 가족들을 다 노예로 삼아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노예가 점점 더 늘어가는 형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기록될 당시 로마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 당시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 안에 자그마치 6천 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로마 시민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나라 안팎의 일을 노예들이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비참한 나날을 보내는 노예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예 가운데는 주인의 인정을 받아서 감독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정의 총무가 된 요셉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일 뿐입니다. 그런 노예들에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아니 노예들로서는 자기들을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전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그저 짐승이나 물건 취급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니 말만 사람이지 어찌 보면 짐승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그런 그들이 어느 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거룩한 백성 보배로운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기들에게 아니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요 보배로운 백성이다. 내가 너희는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더 이상 벌레만도 못한 백성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배로운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는 백성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 모릅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에서 노예로 살아가지만 잠시 후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요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믿게 되니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피곤한 일이 있어도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노예일지언정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요 보배로운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환들이라고 하지만 이건 단지 고용된 일꾼이란 의미가 아니라 노예입니다. 이 말을 다시 이야기하면 노예들아 선하고 관용할 때뿐 아니라 까다롭게 굴 때도 모든 존경심을 가지고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분 좋을 리야 있겠습니까? 

주인으로서 비록 노예지만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을 시킬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든지 할 때는 일부러 까다롭게 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애매하게 욕을 먹기도 하고 얻어터지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잘못한 일이 있다면 얻어맞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칭찬 들을만한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잘못 오해를 해서거나 아니면 한 두 사람의 잘못 때문에 같이 얻어터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억울하다느니 서럽다느니 하지 말고 더욱 내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걸어갔던 길이 그렇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것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그렇다고 쳐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모함을 받아 궁중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무어라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거기에 조금도 변명하지도 않았고 억울하다고 몸부림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주인을 욕보이는 노예라면 당장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를 죽이기보다는 감옥에 가두었다는데서 요셉은 오히려 주인의 사랑을 봅니다. 겉으로는 몹시 화를 내고 있지만 그건 다는 노예들 앞에서 아내의 체면을 살려주느라 그러는 것이지 실제로는 자기를 사랑하기에 아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요 그래서 그곳에서 바로의 오른 팔 왼팔이라 할 수 있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수발을 들도록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도소장이 요셉을 특별 대우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래도 섭섭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서러운 시간들을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어느 날 아침 죄수의 신분에서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수직 상승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감옥에서 고관들을 수발하면서 궁중 예법을 배울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는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를 맡아 다스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습득된 지혜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실 이렇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셨지만 나는 억울하다고 하는 말 한 마디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원하는 비결임을 주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마지막에는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지만 그랬기에 오늘 저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래서 베드로 사도 역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 가운데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신의 아픔보다는 자신을 아프게 한 상대방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느라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셨고, 그 중에서도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먼저 걱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몇 가지의 말씀 중에서 자신을 위한 것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뿐입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생각하셨고, 바로 곁에 있는 강도들을 생각하셨으며, 또한 십자가 앞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의인인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노예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모욕을 하고 못 살게 굴고 힘들게 해도 노예들이 싫은 기색하나 없이 네 하고 따릅니다. 무언가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노예들의 상태를 지켜보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매를 맞고 욕을 먹고 하면 표정부터가 달라지고 어깨부터 축 처지고 하는 것이 당연한데 언제부턴가 보니까 전혀 아닙니다. 

몸은 힘들고 마음도 힘들 텐데도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너무도 편안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지극 정성으로 주인을 섬깁니다. 그 섬김에는 주인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본을 따라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많은 노예들의 삶을 통해 다른 노예들이 그리고 이윽고 그들의 변화를 지켜본 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집안 전체가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주인은 주인대로 노예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형제자매처럼 자기의 친 자식들처럼 여기고 사랑합니다. 거기에 무슨 채찍이 필요합니까? 오히려 서로에 대한 격려와 감사로 가득할 뿐입니다. 주인은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노예들을 대합니다. 겉으로는 노예인데 오히려 친 자식들보다 더 지극한 사랑을 베풉니다.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노예들은 친 자식들보다 더 큰 감사와 기쁨과 평안함으로 주인을 섬깁니다. 
천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천국이 오늘 우리들의 머무는 곳마다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처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다음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 끝에 사단이 나타나 예수를 시험합니다. 그때 사단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쉽게 가라는 것입니다. 그냥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말씀처럼 천사가 받들 것이요 그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로 섬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한 창조주로서 세상을 창조하듯 말씀 한 마디만 하면 돌도 빵이 될 수 있는데 그 권세를 두었다 뭐에 쓸 것이며 당연히 천사도 시중드는 귀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성전에서 한 번 뛰어내리기만 하면 그대로 증명할 수 있는데 이 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고 절 한 번만 하면 온 세상이 다 주의 것이 된다는데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사단의 속임수가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거두려고 하는 자는 도적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밀을 거두고 가루로 만들고 반죽하여 빵을 만드는 이 모든 수고 없이 그냥 빵을 만든다고요? 물론 하실 수 있겠지만 그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세상 질서를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능력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데 아니 사단이 어디서 자기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원 주인에게 생색을 낸단 말입니까? 그리고 천사도 시중드는 그런 존재임을 보이라고 하는데 그건 그렇게 극단적인 모습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단의 말은 고난 없는 영광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를 통하여 고난의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지금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주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무 죄도 범하지 아니하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고난당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심으로 죄인인 우리가 의인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친히 그 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생명을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변하여 영생이 되고 불의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인 줄 알았습니다. 목자가 이끌어주는 길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쉽고 편한 세상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았습니다.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목자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내 몫을 주님이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내가 믿음으로 나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나로 하여금 믿음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하여 들려주시는 말씀을 따라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만을 자랑할 뿐이요 그 주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님이 나를 찾아주신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들로 산으로 다니던 목자처럼 그렇게 주님이 나를 찾으셨습니다. 그 길이 어찌 쉬운 길이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길입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며 구원의 길을 대속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이 있기에 오늘 우리들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보여주신 모습대로 오늘 우리들도 살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한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 위하여 그 어떤 고난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거두게 하시기까지 우리는 길이 참고 우리의 인내를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때를 우리는 기다리며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어떤 고난이 우리들 앞에 펼쳐진다고 해도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온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 C. C. C.의 창설자이시고 젊은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신 김준곤 목사님은 이십 대의 딸이 암으로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그는 딸을 살려달라고 금식도 하고 매달려 보았지만 결국 그 딸은 죽었습니다. 그 경험을 한 후 김준곤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내 딸 신희는 속된 세상 욕심을 95%쯤 내세적 소망으로 꽉 채워주고 갔다.”
신앙 간증으로 유명하게 된 의사 원종수님은 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처음에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암에 걸리게 하셔서 고통 받게 하시나 의문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암에 걸리면 어린아이처럼 되고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오히려 “암에 걸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16에는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위인 중 많은 이들이 광야 생활이라고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사십 년간 미디안에서 광야 생활을 했고, 우리의 주님까지도 공생애 전에 광야에서 사십 일간 굶주리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야 생활이 반드시 힘들고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굶주리고 더위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든 광야 생활 중에도 바로 이 만나를 먹으면서 이겨 나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내리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무수한 고난이 다가오지만 기도 가운데 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깊은 영혼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닥쳐오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감사함으로 감당하고 오직 주님이 걸어가신 그 모습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심으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 한 생명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오도록 이끄는 귀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그 뒤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감사하심으로 마침내 복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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