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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6) (욘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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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6) (욘 3:1-4)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이 민족과 사회에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머리를 깍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몸집은 작지만 힘은 장사였습니다. 작지만 탄탄하다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힘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지 궁금하였습니다. 특히 그를 없애려는 그의 적들은 그 큰 힘의 근원을 밝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적들은 그녀를 통하여 그의 힘을 근원을 알아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무릎에서 잠든 그는 머리털을 다 밀렸습니다. 그는 맥이 빠져 힘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눈을 뽑았습니다. 그에게 놋 사슬 두 줄을 메워 옥에서 연자매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삼손입니다. 

삼손,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사사기 16:22은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 말씀을 읽다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비록 두 눈이 뽑히고 놋 사슬에 메워 연자매를 돌리고는 있지만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아니 그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버림받은 듯이 보이는 그에게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사용하실 기회가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 머리털이 자라는 삼손을 생각합니다. 특히 사회가 어지럽고 정치가 혼돈스러울 때, 마치 두 눈이 뽑혀 적에게 끌려가 고생하는 삼손과도 같은 때, 다시 자라나는 희망의 싹을 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다시 기회를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자라나는 머리털을 오늘 말씀에서도 발견합니다. 그것은 도망치던 요나, 아래로 내려가던 요나, 물고기 뱃속에 갇혔던 요나를 다시 부르시고, 올리시고, 밝은 빛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 무엇보다도 요나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I. 다시
  
1절 말씀입니다.

: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ynIve/쉐니]’라는 본래 ‘접다[hn:v/솨나]’ 즉 ‘이중으로 하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복하다, 다시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된 종이 한 장을 보이며) 여기에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 장이 될까요? 반으로 접으면 두 장이 됩니다. 종이가 더러워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한 종이가 되겠습니까? 종이를 반으로 접으면 됩니다. 종이를 반으로 접으면 더러운 면은 첫 번째가 되고, 깨끗한 면은 두 번째가 됩니다.

우리말에 ‘접다’는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접다’는 말은 우선 ‘꺾어서 겹치다’는 뜻으로 ‘종이를 접다’고 할 때의 경우입니다. 그런가하면 ‘날개를 접다’, ‘우산을 접다’하면 ‘폈던 것을 본디의 모양이 되게 하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이 문제를 일단 접어 두기로 하자’고 하면 ‘의견이나 주장을 보류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접다’는 말속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상대할 때, 얼마간 너그럽게 대하거나 그에게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자기보다 실력이 모자란 사람과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한 수 접어주다’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다시 말씀하셨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요나의 불순종과 잘못을 접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접어주시지 않으시면 어찌 다시 말씀하시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 다시 임재하셨습니다.

요나서 3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첫 번째 말씀에 불순종한 것을 접어주고 ‘다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잘못을 접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너그럽게 대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시 기회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을 때 회개의 기회를 주셔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세상의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첫째 아담이 잘못한 것을 접어주시고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으로 얼룩질 때도 다시 거듭 말씀하십니다. “회개만 해라! 그러면 너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마! ‘제발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해라. 그것이 어렵거든 그냥 ‘아버지’하고 내게 오너라.”하며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수 없이 우리에게 접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수 없이 많은 잘못을 접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요나에게 접어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접어 주셨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접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부부간에 말 안 하시는 분이 혹시 계시다면 ‘말 안 하는 것’을 접으십시오. 서로 말 안 하는 첫 번째 페이지를 빨리 접고, 서로 이야기하는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십시오. 빨리 페이지를 넘기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혹시 옆의 사람이 미운 생각이 든다면 빨리 접고 두 번째 페이지를 열어야 합니다. 한 때, ‘종이 접기’가 유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접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도 접어주어야 하겠습니다. 한번만 접어주는 것이 아니라 많이 접어주어야 합니다. ‘딱 한번만 더’ 접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번 더’ 접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수없이 우리에게 접어 주셨고, 거듭 거듭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해가 돋고, 다시 새 날을 주심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에게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기회 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또한 이웃들에게 다시 말을 건네고 화해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잘못을 접어주신 하나님은 또 무엇을 주셨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듣고도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던 요나를 접어주신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임하셔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처음에 임하셔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요나서 1장 2절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거듭 명령하셨습니다.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신 여호와의 말씀의 첫마디는 ‘일어나라’입니다. 첫 번째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도 그 첫마디는 ‘일어나라’(요1:2)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말씀에서 ‘일어나라’는 것은 도망치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말씀입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던 삶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자리 스올의 뱃속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소생되는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부활의 영광을 안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주심과 인도하심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말씀에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말씀에서도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시려는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곳은 ‘니느웨’ 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시려는 곳에 반드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시켜서 그 분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변하고, 환경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은 ‘세상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업, 우리의 재능, 우리의 행복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그 복을 통하여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로 그곳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의 세 번째 구절은 “그것을 쳐서 외치라”이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의 세 번째 구절은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입니다. 첫 번째 하신 말씀에서 ‘외치라’는 말과 두 번째 하신 말씀에서 ‘선포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같은 단어[qara]입니다. 이것은 ‘만나는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 말씀에서 새로운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네게 명한 바’를 전달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러 준 말을 그대로 전하여라.”(공동)는 것입니다. 이것은 딴소리하지 말고 ‘내 명령을 그대로 선포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요나인 우리에게 다른 것을 전하지 말고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과 환경은 바뀔 수 있지만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시 세워주시는 은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서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나는 다시 임하셔서 거듭 하시는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였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겠습니까?

  
II. 순종

  
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3a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요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가라고 하셨던 곳입니다. 처음부터 니느웨로 가야할 사람이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타고 돌고 돌아서 드디어 니느웨로 갔습니다.

1. 요나가 드디어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방향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방향과 하나님을 등진 방향입니다. 인간도 두 종류의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과 하나님을 등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은 불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등지고 가던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드디어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서 부르는 찬송이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1절)

이 찬송은 스코틀랜드의 민요에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가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오만가지 어려움을 다 겪고 비로소 돌아와 드디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 찬송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십 년 동안 부흥회의 애창곡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과 같은 어둡고 컴컴한 스올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비신자를 정하고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직 전도에 순종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드디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예비신자를 정하는 일에 드디어 순종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한 기도에 드디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또 어떻게 순종하였습니까?

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3b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이 말씀은 니느웨가 어떤 도시인지를 개관적으로 설명합니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었습니다. 고고하적 발굴에 따르면 니느웨는 그 둘레가 약 95Km입니다. 당시 니느웨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되었습니다(4:11). 좌우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은 대략 7 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전체 인구는 대력 60만 정도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이 정도의 크기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 요나의 입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크기의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이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사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되었던 것은 억지 춘향 격이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그것도 자신의 조국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향하여 구원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요나에게 죽기보다도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 수 없이 끌려와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직 요나는 그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간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편에서는 모르고 한 순종이었습니다. 도망치다가 지옥과 같은 물고기 뱃속을 경험하고 할 수 없이 갔습니다. 


2. 요나는 모르고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모르고 순종하는 면도 있습니다.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세를 향하여 끝임 없이 불평을 늘어놓고 반항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주님의 은총 받은 자들입니다.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을 헤아리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기에,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기에,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알기에, 주께서 뜻 하신 바 우리 통해 펼치시는 것을 알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합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주신다(620장 후렴)

하나님의 뜻을 다 몰라도 명령하시니 순종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틀을 깰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고정된 생각의 틀을 넘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봅시다.

우리는 모든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기를 기대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나는 또 어떻게 순종하였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외치라고 한 그대로 외쳤습니다. 요나는 드디어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순종하였습니다. 요나는 의무감에서 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3. 요나는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깨끗하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내 생각과는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하길 원합니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미적거리지 않고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아프리카의 자이르 공화국에서 사역하신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선교사는 앞마당 커다란 나무 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향하여 “빨리 땅에 엎드려!”하고 외쳤습니다. 아이는 곧 땅에 엎드렸습니다. 또 다시 “아빠 쪽으로 기어!”하고 외쳤습니다. 아들은 즉각 그대로 순종하여 기었습니다. 또 다시 “이제 일어서서 이쪽으로 뛰어!” 하자 아들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일어나 뛰어와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선교사는 어린 아들에게 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엎드려, 기어, 뛰어 하였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신이 놀던 나무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 나무 가지에는 크고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명령에 주저하면서 “아버지 왜 그러세요?”하고 반문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혹은 “잠깐만 아버지!”하고 무심하게 대답하였다면 그는 위험한 일을 당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허드슨 테일러가 어떤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식사를 돕는 아이에게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하지만 그는 식사를 하는 중이었기에 식사를 마친 후에 그를 다시 부르겠다고 생각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주인에게 정중하게 자기 식사 시중을 들던 소년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주인이 아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 소년이 조금 전에 주방 뒤편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닫고 그 후로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대로 즉각적으로 순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곧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곧 바로 순종하는데 예민해야 합니다. 명령에 즉각 복종하는 군인처럼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몇 번이나 접어 주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삼손처럼 머리털은 밀고 두 눈이 뽑힌 것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요나처럼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토해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확신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다시 찾아와 만나주시고, 다시 말씀하시며, 다시 보내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부르시고 말씀하시어 사명을 따라 살도록 하십니다. 드디어 순종합시다. 모르더라도 순종합시다. 그대로 순종합시다.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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