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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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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 (빌 4:4-7)


쉬지 않고 연일 터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입니다.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직업 속에 감추어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 때문에 견디다 못해서 젊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등지곤 합니다. 대부분이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여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우울증이라는 병에 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현대는 알 수 없는 육제적인 질병도 많아졌습니다만 문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문제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질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면 육체의 질병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힘 이전에 정신력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의사들도 이 정신력을 많이 요구합니다. 병을 이기려고 하는 의지 말입니다.‘나는 이 병을 이길 수 있다.’,‘나는 금방 나을 수 있다.’는 환자본인의 의지가 치유에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여간 수많은 질병과 스트레스 속에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병”이라는 말과“장애”라는 말이 다른 것은 알고계시죠? 병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것을 병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혹 호전되어서 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라고 하는 것은 이미 병이 멈추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안타깝지만 더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나빠진 것을 더 이상 좋아지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을 특별히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애가 온 신체에 더 좋은 회복은 없단 말입니다. 사고로 팔에 장애가 왔습니다. 그런데 없어진 팔이 생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시각에 장애가 왔습니다. 다시 그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것이 장애입니다. 신체적인 장애란 이렇게 질병과 달라서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든지 그 장애를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정신력입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비장애인들이 많이 양보하고 도와주어야합니다. 

자, 그렇다면 정신적인 문제는 어떻습니까?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문제입니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확고한 의지가 스트레스도 이기고, 마지막까지 이겨내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승리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살아야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 순간을 이기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죽하면 정신과적인 용어 가운데는 장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겠습니까? 정신과 용어 가운데 먼저 불안장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누구나 걱정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정신적 고통과 한평생 싸워나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잘 싸워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불안에 압도되고 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불안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더 이상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의 노예가 되고,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존재로 살아가고 맙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증후군 가운데 불안장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공포장애라는 말을 합니다. 이 증상은 실제로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무서움이 늘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놉니다. 생각으로는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고통입니다. 이런 현상을 공포장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황장애라는 게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모든 상황을 불리하고 불길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무엇을 해도 그 결과는 죽음인 것 같습니다. 이래도 죽을 것 같고, 저래도 죽을 것 같아서 못 견딥니다. 이것이 공황장애입니다. 그런가 하면 강박장애라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흔한 증세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자기가 실수하고 잘못한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증상은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오면서도‘집에 가스 불을 잠갔나, 안 잠갔나!’걱정하신 분 안 계십니까? 아니면‘집에 문을 잠갔나, 안 잠갔나!’걱정하고 계신 분 없습니까? 제간 단언하건대 가스 잘 잠그고, 문 잘 잠그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몇 번 들락날락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면 다 잘 돼 있지요? 이게 잦으면 문제입니다. 항상 마음에 그 강박 때문에 예배 와서도 전혀 예배가 되지 않고 말씀도 못 듣고 간다면 되겠습니까? 마음이 평안해야 말씀도 들리는 것이고, 은혜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들이 마음의 평안을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정신적인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증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연 그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잘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평강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강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평강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말끔하게 이길 수 있도록 해주는 원천일지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그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는 평강이 필요합니다. 잘 알다시피 마음이 평안하면 매사가 평안하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매사가 원활하지 못합니다. 우선 얼굴에 나타납니다. 사람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얼굴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일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저 집은 교회 오기 전에 한 바탕 하고 왔구나!’혹은‘어제 저녁에 남편이 또 늦게 들어 왔구만!’알 수 있거든요. 억지로 숨기려고 해도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그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셔야 평안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스려 주셔야 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평안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평강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강은 다른 사람과 싸워서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돈을 버는 것처럼 벌어 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설사 그렇게 평안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리 길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차원의 평안이 필요합니다. 

다 기억하시는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로서는 보통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어부출신들인 자신들이 생각해도 일반적인 풍랑이 아니라 거의 죽을 생각해야할 정도의 큰 풍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만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얼 하셨습니까? 

배 고물에 누워서 평안하게 주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랑속의 고요함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입니다. 바다는 춤을 추고 제자들은 죽겠다고 떠드는 데도 예수님은 평안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몇 시간 앞에 놓고도 누릴 수 있는 평안, 이 절대적 평강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하기를“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첫째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무겁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매사를 가벼운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문제 해결을 잘 할 것 같습니까? 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쉬우니 해결도 쉬운 것은 상식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마저도 기쁨입니다. 세상이 어떻든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불편한 관계입니까? 그러면 문제가 있지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기쁨의 관계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신 것과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로 구원받은 자신에 대한 기쁨의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 절대적인 기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쁨 속에 있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이해와 인내와 용서를 넘어서서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말든 상관없이 내 기쁨으로 저를 덮는 것입니다. 내가 즐거우니까 잘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속에 나의 평안이 있다는 말입니다. 남의 잘못 꼬치꼬치 따져보세요. 누가 피곤한가, 내가 피곤하고 내 맘에 평안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눈을 부라리고 누가 잘못하고 있는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내 맘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에릭 프롬]은 사람을<죽음 지향적 인간(Necrophilia)>과<생명 지향적 인간(Biophilia)>으로 나눕니다. 모든 것을 죽음지향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걸 넘어서서 생명 지향적으로 살아 갈 때 소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환경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역설적이면 됩니다. 어려울수록 더 사랑하고, 힘들수록 더 기뻐하려고 애쓰면 환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경이 어려울수록 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는 근심들은 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충분히 나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거기에 매여서 장애가 되어버린다면 문제입니다. 이제 이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환경을 묻지 말고, 세상도 보지 말고,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영혼을 하나님의 평강이 지키게 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그것이 잘못되어가는 신앙의 증후군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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