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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순절 성령님의 사역 (행 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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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님의 사역 (행 2:37-42)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오늘은 성령 강림절입니다. 이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간의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지 열흘 되는 날, 곧 오순절에 하늘로서 보혜사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관한 연구는 어떤 것이라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포함하게 됩니다.

오순절(Pentecost)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흔히 말하는 오순절 교단의 시작과는 관계 없습니다. 오순절이란 유월절(Passover) 후 첫 안식일 다음날로부터 7주후의 그 다음날을 지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칠칠절(七七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날은 보리 추수를 기념하여 지켰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월절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였다면, 오순절은 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연명하다가 가나안 땅에서 첫 곡식을 수확함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사망 권세에서 건져낼 능력으로서의 성령님이 영혼의 양식으로 부어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에 기록된 내용은 신약 시대가 시작되는 때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숨가쁘게 진행되던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신령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40일간이나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배웠고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흘 동안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경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5-6절) 다 놀라며 당황할 때에, 사도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는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살펴봅시다. 그날 일어났던 성령님의 사역은 오늘도 계속하여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1. 회개하고 말씀을 받게 하심 (=회심 사역)

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오순절에 회중 가운데 임하신 성령님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마음이 찔린 그들의 입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의 말이 절로 터져나왔습니다. 성령님은 모여든 군중들로 하여금 가슴을 열고 베드로 사도의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셨습니다.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설교를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로 놀라운 성령님의 회심 사역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사역 중 대표적인 사역은 죄인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회심케 하는 것입니다. 이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찾아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군중들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말씀을 받은 3천 명 중에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주님의 원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50일전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며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예수님에 대해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복음의 원수 된 자라도 성령께서 감당치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님이 텃치하시면 어떤 강퍅한 심령이라도 깨어지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님은 어떤 말씀을 사용하셔서 무리들의 마음을 여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세우셨다는 ‘확증의 메시지’(a message of conviction)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22절).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행해진 인류 구속(救贖)을 위한 ‘십자가의 메시지’(a message of the cross) 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3절).

성령께서 무리의 마음을 깨뜨리시기 위해 사용하신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는 ‘부활의 메시지’(a message of the resurrection)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회심은 모두 성령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집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마치 폭탄을 맞은 듯 크게 흔들렸습니다. 37절을 다시 봅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여기 ‘찔려’(카테뉘게산) 동사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그들이 찔려 관통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그들에게 강한 회개의 마음을 불어넣으셨고, 부정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회중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회개의 영을 받은 무리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대망하였던 메시야를 자신들이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두들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마치 그들의 마음이 창에 찔린 듯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바울 사도를 향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했던 고백과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입니다. 단지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고,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사도의 회개하라는 선포를 통하여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 16:9= “그(=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 교회 회중 가운데 회개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계속되어지기를 바랍니다. 


2. 세례를 받게 하심 (=공적 고백)

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구원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교회 앞에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성도요, 종이요, 그리스도와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교회와 온 세상에 고백하고 선포하는 행위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여 공적 고백을 하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회중 가운데 성령께서 강력한 권능으로 임하자 그날에 세례받은 사람들이 삼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마음속으로만 믿어서는 아직 부족합니다. 입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 되심을 시인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로 인정하십니다(롬 10:9-10).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을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이 세례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십니다.
<Solomon Island Christianity>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뉴질랜드 근처에 있는 솔로몬 군도(群島)에 사는 원주민 피지 족속에게 선교했던 선교사가 쓴 책입니다. 원주민에게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되면 세례를 주는데 ‘킬링 스톤(Killing Stone)’이라고 하는 바위 옆에서 베풀었습니다. 

‘킬링 스톤’이란 말 그대로 사람을 처형하는 바위입니다. 처형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목을 쳐 죽이는 방법, 교수형, 그리고 불태워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 행해졌습니다. 동네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못된 죄를 짓게 되면 사형에 처하게 되고, 처형을 할 때에는 사람을 꽁꽁 묶어서 붙들고 머리를 그 바위에 짓이겨서 죽입니다. 피가 바위에 흘러도 그 피를 절대로 닦지 못하게 합니다. 그대로 피가 벌겋게 흐르면 사람들이 ‘아! 죄 지으면 저렇게 된다' 하고 일벌백계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이 예수 믿게 된 자들을 늘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그 바위에 데려가서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 죽는 거요. 옛사람이 완전히 죽는 시간입니다' 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진정한 뜻이고, 성령님은 믿는 자에게 역사하셔서 세례 받고자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서울 중동학교를 다닐 때 믿은 지 3년 만에 승동교회의 김영구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김재준 청년은 세례받을 생각이 없었다는데, 그 이유는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고 생각했고 형식은 군더더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세례 받았다는 신자나 제직들에게서 별다른 변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영구 목사님은 이러한 김재준을 끊임없이 설득하였습니다.

“남녀가 연애하고 동거하면 다 된 것같이 여길지 몰라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자녀들에게도 거리낌이 되는 걸 알아야 해. 세례 받는 건 자네가 예수님의 사람이 됐다는 데 대한 교회의 '공인증'이란 말이야!” 김재준은 결국 세례를 받았고, 후일 두고두고 김영구 목사님의 인도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아니고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추종자들에 대한 주위의 분위기가 얼마나 적대적이었습니까? 오늘 우리의 주위 환경이 복음 전도에 아무리 불리하다 하더라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도들의 사정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예루살렘에서는 성령님의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삼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 위에도 이런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가 사는 대구 땅에도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를 기대합시다. 오늘 한국교회 위에 오순절의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3. 말씀, 교제, 예배, 기도에 힘쓰게 하심 (=성도의 영적 성장)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성령님은 이날 회개하고 세례 받아 예루살렘 교회에 새로이 들어온 수천 명의 사람들 가운데 지속적으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말씀 교제 예배 기도에 힘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Spiritual Growth)에 성령께서 직접 간섭하시는 모습입니다. 

여기 ‘오로지...힘쓰니라’를 다시 번역하면 ‘(그들이) 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었다(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ves)’입니다. 원문상으로 보면 그들이 계속하여 전념했던 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 모두를 포괄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예수를 따르는 강력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42절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생활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를 바르게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기본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들 기본적인 본분에 충실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첫째,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사도로 세우신 신앙지도자의 가르침에 잘 순종하고 협조했습니다(행 6:1-7). 또 그들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행 12:5). 이것은 주님이 세우신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고 협조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들은 한결같이 목회자와 성도들이 혼연 일체가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둘째, ‘서로 교제하고’ 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일반적인 사교(社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 서로가 주 안에서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서로 간에 위로하고 간증하고 권면하고 돕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의 교제가 없는 교회는 극장과 같습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뿔뿔이 흩어지는 교회가 극장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교회는 사탄이 조금만 시험해도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성도간의 풍성한 교제가 교회를 유지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성도들의 본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떡을 떼며’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배와 함께 늘 성찬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늘 기념하고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냉랭하고 비판과 정죄만 가득하고 분쟁과 정욕이 넘치는 인간 집단으로 전락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항상 기념하고 예배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중단 없는 교제를 하는 교회가 잘 유지됩니다. 앞의 세 가지(사도의 가르침, 교제, 떡 떼는 일)도 계속해서 힘써야 하지만, 특히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과 늘 교제하는 교회가 든든하게 유지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우리보다 먼저 받아 먼저 교회를 세웠던 유럽의 교회들은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강점은 새벽기도회, 수요밤 기도회, 금요밤 기도회 등으로 성도들이 늘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 말씀을 잘 받으며 구역과 전도회 활동을 통하여 교제에 힘씁니다. 예배마다 감동이 넘치며 은혜 받고 변화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성도들이 기도회로 모이기를 좋아하며 소리 높여 함께 부르짖는 합심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합심기도는 사탄의 왕국을 흔들어놓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의 영적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어 갑니다. 

막스 비어의 소설 「행복한 위선자」는 비양심적인 악인 로드 죠오지 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도 야비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미어리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얼굴이 저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어” 하고 그를 거절했습니다. 로드 죠오지 헬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고심한 끝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인자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미어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게 된 그는 날마다 그의 위선을 감추고 참을성 있고 너그럽게 보이려고 힘썼습니다. 좋은 사람같이 보이려고 끊임없이 그의 나쁜 성질을 억눌렀습니다. 

어느 날 옛 친구가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로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면이 벗겨졌을 때 거기에는 거룩한 얼굴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얘기는 소설이지만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사람은 날마다 노력했던 만큼의 선한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인격이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연습에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성도를 영적으로 성장시켜주십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풍성하고 무한합니다. 39절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했는데, 여기서 ‘약속’은 선지자 요엘을 통해 주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욜 2:28-32).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이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교회 위에 오셨습니다. 오신 성령님은 말씀을 듣는 자들을 감동시켜 회개케 하시고,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케 하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의 역사를 얼마나 실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성령님의 감동으로 가득차 본 적이 언제입니까? 
구역 모임 중 성령님의 감동을 경험해 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구역원 중 회개의 눈물로 고백하는 간증자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령님으로 하여금 마음껏 사역하시도록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성령님의 능력의 손길은 오늘도 겸손히 순복하는 자 위에 임하십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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