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찻잔 속의 태풍 (눅 8;22-30)

첨부 1


‘찻잔 속의 태풍’ .com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26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눅8;22-30)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거의 2살도 안되어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부모님과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보다 더 많이 지난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입니다.  아주 슬픈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바로 아래 여동생이 연년생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어머니께서는 젖먹이 동생을 돌봐야하니 자동으로 저는 할머니 손에서 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제 여동생은 ‘가시나 때문에 장남이 젖도 제대로 못먹었다’ 하시는 할머니의 욕을 듬뿍 받았습니다. 제 여동생으로서는 많이 억울한 일이지요.  그런데 한집에 살게 된 후에도 처음에는 부모님과는 좀 서먹서먹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서로 부대끼면서 살지 않아서 그런지 정을 많이  느끼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근거 있는 이론은 아니지만... 저는 말이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착한 아이인데, 친구가 없었습니다. 친구를 잘 사귀지를 못하는 외톨이 학생이었고, 맨날 책이나 읽고  혼자 글이나 쓰는... 좋은 말로 문학소년 이었습니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지나고,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갈 때까지 저에게서  가장 분명한 철학이 하나 있었다면, ‘인생은 혼자다’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은 혼자’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즐거움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100% 이해할 수도 없고,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99%까지는 함께할 수 있어도 100%는 안 된다. 인생은 결국 혼자다.’  그런 것이 당시 나의 철학이었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인간은 우주에 버려진 존재’ 라고 하는 말에 나름대로 공감하기도 하고,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군중 속의 고독' 이라고 하는 말에 ‘맞다 맞다’하면서 동의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나는 혼자다. 인간은 혼자다. 아무도 내 삶을 대신 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혼자다’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목사로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상담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참 자주 느끼는 사실이 있는데, 많은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 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子女)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즉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말이 ‘아바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님들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기도는 들어주시지도 않고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버린 자식이요, 자기를 영적인 고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 심한 풍랑에도 주무실 만큼 피곤하시기도 하시겠구나 하는 마음보다는 ‘우리는 죽어가는데 예수님은 잠이오나?’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주여 주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더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믿음이 없다고 제자들을 야단치십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나 몰라라 하고 주무신 예수님이 ‘아 미안하다. 고생했지?’ 하시며 제자들에게 사과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제자들이 꾸지람을 들은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보면서 ‘영적인 고아’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있다면 해결 받으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 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경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제자들이 경험한 풍랑에는 예수님의 명령(命令)이 있었습니다. 

(22절)“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병행본문 (막4;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합니다.         

그날은 오병이어(五餠二魚)의 날이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였고 수천의 군중들의 온갖 소리에 파묻혀서 보낸 날입니다.  그 하루의 마지막 저물때에 예수님께서 호수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호수 건너편 즉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지금의 자리에서 다음 목적지를 지시해 주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도 베드로는 그곳에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짓고 내려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산을 내려오셨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그곳은 주님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땅에서의 최종 목적지는 갈보리 십자가 였습니다.  그렇게 항상 목적을 잃지 않으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음 목적지를 설정해 주십니다.   

"호수건너편으로 가자!"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들의 다음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지시하시는 다음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은 목적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목적 없이 이리 저리 방황하는 삶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다음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달려왔습니다. 공부를 하고,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에게서 다음 목적지를 지시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내 맘대로 세운 목적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시하신 다음 목적지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2. 제자들이 감당 할 수 없는 풍랑(風浪)이 있었습니다. 
  
다음목적지를 제자들에게 설정해주신 예수님께서는 23절에 보면 배에서 주무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것도, 다음목적지인 호수건너편까지 가는 것도 그리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 절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일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호수건너편으로 건너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늘 가던 길, 늘 하던 일, 어느 누구도 긴장하지 않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무셔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은 파도가 일어나 점점 거세어지더니, 평생 처음 경험하는 광풍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합니다.  

갈릴리 호수가에 있는 헐몬산은 해발 3,000m 가 되는 높은 산입니다. 백두산과 높이가 거의 비슷한데, 백두산과 아주 다른 것은 백두산은 계속 이어진 장백산맥의 줄기로 점진적으로 높이 올라가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로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헐몬산은 바로 급경사로 올라갔기 때문에 더 높게 보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주변이 더운 공기로 가득 찰 때 3000m 가 되는 높은 산의 찬바람과 대류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는 찬바람은 아래로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것을 당해본 어떤 분이 경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벽돌이 날아가더랍니다.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것이랍니다.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하는 표현이 이런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이 정도 일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일이 평생처음 경험하는 환란과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잘될 것 같았었는데, 내 실력이고 내 경험이면, 나 정도면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였는데, 그 일이 평생 처음 겪는 죽을 것 같은 풍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음목적지를 향할 때 생길 수 있는 일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을 뿐인데 이런 풍랑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배안에 같이 계신데 이런 풍랑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을 했는데 이런 풍랑이 불었던 것처럼,  그 분과 함께 하는 배에 이런 풍랑이 불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는 때로 큰 풍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술적인 신앙을 가르칩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무병장수하고 무엇이든 다 잘 된다고... 제가 단언합니다. 그것은 사기(詐欺)입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도 풍랑은 있고, 말씀하신대로 순종했는데도 풍랑은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그날로 환난풍파가 싹 없어질 거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3.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1)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그 광풍 앞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합니다. 정말로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 같습니다. 어부 출신들의 지휘로 ‘이까짓 것이야’하다가 이제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절망입니다. 그제서야 주님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외칩니다.  

(마8;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막4;38)“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을 깨우는 것을 기도라고 표현한다면 원망이 듬뿍 담긴 기도입니다. 이제까지는 주무시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었습니다. 왜냐면 자신만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대단하신 분이지만 목수출신 아닌가! 바다에서야 예수님께서 우리 보다 나을 리가 없지 않는가! 예수님은 주무시게 그냥 두고 우리가 이 풍랑을 이겨내자. 사실 깨워봐야 뭐하시겠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만만,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 등이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언제 찾습니까? 죽을 지경이 되어야,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때에라도 주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죽어도 예수님은 안 깨운다’ 하면 안 됩니다.  사실  언제 주님을 깨우느냐가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침몰되기 직전에 주님을 찾았습니다. 우리 중에도 너무 늦게 주님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을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기도하고 풍랑이 다가오면 먼저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십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왜 갑자기 믿음이 작다고 하실까요? 무슨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면 배가 침몰하게 되었는데도 예수님을 깨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깨우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했는데,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왜 꾸지람하실까요?  본문의 맨 처음에 답(答)이 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22)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지시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에 당면합니다.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남편이 직장에서 갑자기 퇴직해 앞길이 막막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가정의 경우, 남편이 출근했는데 그 아침이 남편을 본 마지막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불가능의 문제,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험조차도 이미 다 주님의 말씀하심 안에 있습니다. 

(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는 창세 전에 이미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롬8;30-31)“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 있습니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너편으로 간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으면 건너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바람과 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래서 풍랑이 일어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청명한 날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바람 부는 날에 믿지 못하면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공할 때 예수 믿다가 실패할 때 예수 안 믿으면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형통의 날에 예수 믿다가 고통의 날에 믿음이 사라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실패 때, 여러분의 고통 때, 여러분의 좌절 때, 여러분이 억울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들에게 얼마나 자주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성경은 이런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여러분,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대군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제 다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방향으로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연히 홍해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홍해 앞에서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길을 내실 것이다’ 하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으면 건너가는 것입니다. 풍랑 때문에 못 건너가고 중간에서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풍랑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풍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왜 주님이 초기에 개입해 주시지 않느냐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하시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길을 가다 넘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바라봅니다. 호들갑떨면서 일으켜 세워주지 않습니다. 아들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홀로 일어섭니다. 그 다음에 또 넘어지면 또 홀로 일어섭니다.  

이것은 아이를 미워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아이를 강하게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왜 넘어졌는데도 일으켜주지 않느냐?  아버지인 내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으니... 아이가 넘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평소에는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모두가 다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그리고 그 문제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당합니다.  오늘 제자들의 믿음의 정도는 "우리가 죽게되었나이다" 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미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는데, 심지어 같은 배안에 함께 계시는데도, 죽게 되었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호수건너편으로 반드시 건너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 계신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지 않았어도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배는 건너편으로 갑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풍랑이 앞길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풍랑은 허상입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그 다음 말씀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 믿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면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도 예수님은 왜 날 깨웠냐고 화내지 않으십니다. 단지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하시면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지적해 주시고, 즉시로 풍랑을 잔잔케 하심으로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안기고 싶을 때, 아이는 칭얼거립니다. 안아달라는 말이고 부모에게 안기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이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안아주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품이 따뜻하고 좋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것입니다. 그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안 돼. 너는 강해야 되. 내가 안아주지 않아도 너를 사랑하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돼’ 하면서 끝까지 안아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랑을 가르쳐야 할까요? 이렇게 자녀를 키워야 할까요?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훈련은 필요하지만 사랑과 믿음은 느끼고 체험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믿음을  충분히 느끼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들아 이배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아. 반드시 건너간다. 내가 말했으니 믿고 좀 더 노력해봐라. 나는 좀 더 자야겠다’  하지 않으시고, 즉시로 일어나셔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셔서 제자들의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이 충분히 믿어도 되는 분이심을 확실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목숨 걸고 믿어도   되는 분인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찻잔속의 태풍’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종종 쓰는 말인데... 태풍은 태풍인데 찻잔 안에 있는 태풍입니다.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못하는 태풍입니다. 지금 갈릴리에서 일어난 풍랑이 바로 찻잔속의 태풍입니다.  아멘입니까!!!

2) 귀신을 다스리시는 예수님.

끝으로 우리가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27) ...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30)” 건너편으로 온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것은 군대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 이편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군대 귀신들린 그 사람을 고쳐주시려고 호수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먼저 찾아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일찍 기도하든지, 늦게 기도하든지, 바른 기도이든지 잘못된 기도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싶을 때 우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4명의 친구들에 의해 침상 째로 들려와서 친구들의 신앙으로 고침을 받았던 중풍병자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마9;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자기는 기도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중보기도를 통해서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는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믿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아멘입니까?  그리고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군대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지도 못하며, 다른 사람이 중보 기도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구원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찾아가셔서 고치시고 온전하게 하십니다.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살리셨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도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살렸습니다.  

군대귀신 들린자를 고치시는 것이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깨닫는 것은 ‘무생물에 대한 꾸지람’ 입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돌맹이에 발이 미끌어졌습니다.  또 사무실에서나 학교에서 책상 모서리에 손을 부딪쳤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돌맹이나 책상을 꾸지람합니까? ‘야 이 돌맹이야 너 왜 거기 있는거냐 넘어질 뻔 했잖아. 이놈의 책상 왜 옆으로 움직이지 않았어. 아프잖아’ 합니까? 하다 못해 고양이나 개를 꾸지람을 할 수 있지만... 물이나 바람은 돌과 책상처럼 무생물입니다. 꾸지람의 대상이 아닙니다. 칭찬이나 꾸지람은 인격적인 존재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물을 꾸지람하십니다.  왜냐면 이 풍랑이 자연적인 풍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은 예수님을 못 오게 하려는 군대귀신의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풍랑뒤에 있는 인격적인 존재를 꾸지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즉시로 풍랑이 잔잔하게 됩니다.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마8;26)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막4;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우리가 당하는 일 중에는 자연적인 고난이나, 당연한 고난도 있지만, 지금 제자들이 당하는 풍랑처럼 영적인 문제로 당하는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의 권세로 명령을 하면 됩니다. 귀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예수님 앞에서는 또 예수님 믿는 성도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멘입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 이십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아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이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풍랑도 ‘찻잔속의 태풍’ 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버지의 섭리안에 있음을 깨닫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