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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일한 해답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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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이 가장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소원이 있다면 ‘회복’일 것이다. 잃어버린 것의 회복, 놓친 것의 회복, 빼앗긴 것의 회복일 것이다. 건강의 회복, 경제의 회복, 가정의 회복, 사업과 직장의 회복, 사랑의 회복 등을 바랄 것이다. 믿음의 회복, 기도의 회복, 사랑의 회복을 원할 것이다. 나라의 정치가 회복되고 경제가 회복되고 양심이 회복되고 정의와 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누가 우리의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언제쯤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실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고 따랐다.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서 고통을 당하던 유대민족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빨리 오셔서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생각했고 제자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계속 병자를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만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유대인 지도층의 미움을 받아 모함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고, 실망한 제자들과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열 두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해서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도망갔던 그들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께 대해서 가졌던 기대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은 것이다. 6절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말은 언제 나라를 독립시켜 주실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지금 제자들의 최고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까지도 이기고 부활하셨으니 이제는 당연히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7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잃어버린 나라를 언제 회복시켜 주실지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실 것인데 그러면 너희가 능력을 받을 것이고 그래서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 온 나라와 사마리아 땅과 더 나아가서 땅 끝까지 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이게 웬 뚱딴지같은 대답인가? 언제 이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을 구해 주시고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인가를 물었는데 한 마디로 잘라 버리셨다. “그것이 언제인지 너희들은 알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리고는 성령이 임하신다느니 증인이 될 것이라느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하늘로 훌쩍 올라가 버리셨다.  

얼른 보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안 해 주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만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의 간절한 소원과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들어 있다. 

우리들도 이 제자들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과연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들의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들의 간절한 소원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다.

믿음이 회복될 때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하셨는가? 7절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이 말씀은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임을 믿고 맡기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도록 믿고 맡기라는 것이다. 내가 맡기지 않아도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 맘대로 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일이 닥치면 내 뜻대로 해버리고 마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왜 내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냐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 하는가? 

또한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느긋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 맡겼으면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조금 기다리다가 곧 안절부절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 맡기고도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불안해하거나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문제이다. 믿음이 식어졌기 때문에 맡기고도 못 기다린다.

그리고 맡기려면 일의 결과와 방향까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주시고 꼭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게 해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인지, 언제가 더 좋은 때인지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왕 맡기려면 일의 결과의 방향까지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한다.

이렇게 믿음이 회복될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한다. 믿음으로 맡길 때에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내일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삶의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를 바라기 전에 잃어버린 믿음을 먼저 회복하라.

은혜와 능력이 회복될 때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곧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고 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이미 그 앞에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4,5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24: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지,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하라고 하시든지 그전에 먼저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권능을 받고서야 하나님이 원하시고 맡기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잃어버리고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말씀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없는 것이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돈을 잃어버리고 명예를 잃어버린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 떠난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내 가슴에서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뜨거웠던 가슴이 식어진 것이 문제이다.

언제부터인가 예배를 드려도 감사와 감격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과 감동이 없고, 기도를 해도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봉사를 해도 지혜가 없고 즐거움이 없고, 전도할 힘조차, 사랑할 힘조차 없게 된 것이 문제이다. 그 믿음의 은혜를 회복하려 하지 않고 다른 것을 회복하려 하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고, 성령 충만이 회복되고,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다른 것이 회복되어도 곧 다시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오직 기도에만 힘쓰다가 열흘 째 되던 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과 능력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들의 믿음이 달라지고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졌다. 

은혜와 능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령의 은혜를 회복하기를 힘쓰라.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라. 왜 내가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잃어버렸는지 원인을 찾아내고 다시 회복하라. 다른 무엇보다도 은혜와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라.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회복될 때 모든 것이 회복된다.
사명이 회복될 때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8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택하신 본래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었다. 그런 그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만나주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셨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쳤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사명을 버리고 도망쳤던 그에게 처음에 맡기셨던 사명을 다시 맡겨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늘나라로 돌아가시면서 그들에게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는 것도, 그들에게 권능과 능력을 주시는 것도 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사명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목적이다. 하나님이 내게 권능과 능력을 주시는 목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목적이다. 아직까지 나를 하늘나라로 불러가지 않으시고 여전히 이 땅에 살게 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사명이 회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사명이 회복되는 것이 모든 것의 회복이고 대답이다. 다른 모든 것이 회복되었더라도 사명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떠났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사명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대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마리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에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명이란 나중에 시간이 나고 여유가 생기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방해가 있으면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방해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힘들고 어려우면 그만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반드시 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되리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선택사항이거나 권고사항이거나 요청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받으면 당연히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도 증인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전도를 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전도를 안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전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인 것이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고 당연히 증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직설적으로 바꾸면 이런 말이 된다. “전도가 나의 본업이고 지금의 나의 직업은 부업이다.” 본업은 먹고 살기 위한 주업이고 부업은 본업을 잘하기 위해서, 본업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관과 인생관을 바꾸어야 한다. 아니 바뀌어야 한다. 전도가 본업이고 내 직업은 부업이다. 연예인들이 부업을 많이 하는데 왜 부업을 하는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예활동을 마음 놓고 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도를 마음 놓고 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전도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전도할 기회를 얻기 위해, 전도에 부족함이 없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들면서 전도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인생의 최대 최고의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일이다.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 모든 것의 문제이다. 내 안에 사명감이 회복될 때, 나의 삶이 사명으로 사는 삶이 될 때,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삶이 회복될 때 나의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된다.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에 2005년도에 내가 전도할 사람들을 작정해서 태신자 카드에 적어서 내시라고 했다. 그리고 그 때에 못 내신 분들은 1월 중에 태신자를 작정해서 내시라고 했다. 그러면 아직 못하신 분들은 무엇 때문에 못하셨는가? 혹 곧 해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못하신 것인가? 아니면 주위에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이 별로 없어서인가? 아니면 태신자를 작정하고 전도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서인가? 전도는 나의 사명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가? 혹 지금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가?

전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내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모태신앙이라고? 그러면 여러분의 부모님은 누가 전도했는가? 누군가가 전도했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살까? 

첫째, 날마다 전도하며 살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전도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과 성령의 권능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둘째, 전도할 대상자를 정하라.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 자주 만나는 사람들, 잘 아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고 그 중 네 사람을 올해의 전도할 태신자로 정하라. 목표와 대상이 분명해야 전도를 잘할 수 있다.
셋째, 태신자들을 위해서 매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매일 기도하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전도할 수 있는 용기도 주시고 지혜도 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시고 할 말도 가르쳐 주신다.
특별히 구역모임이나 기관이나 부서모임에서 서로의 태신자카드를 내놓고 함께 합심해서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생각지 않은 좋은 결과를 주신다.
넷째, 항상 태신자들을 의식하고 전도할 것을 의식하고 예수 믿는 사람의 좋은 모습과 좋은 인상을 주도록 힘쓰라. 전도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다섯째,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초청하라. 그들이 듣든 안 듣든,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예수를 전하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전도하기를 힘쓰라.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중에서 누군가를 나에게 붙여주신다. 이렇게 해서 올해 한 사람이 한 명씩 주 앞으로 인도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라.

30년을 목회하면서 Pulpit이라는 신앙잡지까지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가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이렇게 비교해서 설명했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의 문제가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군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군을 찾을 필요가 없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과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서 애를 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생색내는 자로 차 있다. /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서 운영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의 판단 위에서 운영된다. /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에 바쁘고, 죽어가는 고회는 별 일 없이 편안하다. /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열심히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석회처럼 점점 굳어진다.” 

우리 교회가 항상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까, 죽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까? 우리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가 죽어가는 교회인가? 개인도 교회공동체도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굳어지고 죽어가게 된다. 앞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교회와 성도는 계속 열심히 전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점점 굳어져서 죽어버리고 만다. 열심히 그리고 쉬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믿음이 회복되고 잃어버린 은혜와 능력이 회복되고 잃어버린 사명감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도 회복하게 해주신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라. 내 뜻은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힘쓰라. 내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하라.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해 주신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의 유일한 대답이다. 믿음을 회복하고, 은혜와 능력을 회복하고, 사명을 회복해서 날마다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이 회복되는 삶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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