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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집, 내 나라 (대상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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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내 나라 (대상 17:1-15)

  
자녀가 점점 자라게 되면 부모는 그들에게 자율권을 조금씩 부여해 주게 됩니다.
물론 갓 태어난 유아에게는 자율권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는 그저 부모가 입에 물려 주는 대로 먹고 입혀 주는 대로 입을 수밖에 없으며, '거주이전의 자유'는커녕 집안에서조차 자기가 원하는 곳에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부모가 눕히는 곳에 눕고 앉히는 곳에 앉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의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가 먹고 싶은 것과 먹기 싫어하는 것을 가리게 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니 어쩌면 유치원 다닐 때부터 벌써 자기가 입을 옷은 자기가 직접 고르려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매일 밤 몇 시까지 귀가해야 하는지를 가지고 부모와 실랑이를 하게 될 즈음이면, 이미 부모의 통제하에서 실제적으로 거의 떠난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부모는 이런 자녀의 성장 상태를 눈여겨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하도록 허용해 주게 되는데, 특히 자기 자녀가 부모의 눈에도 대견스러운 판단과 처신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더 많은 자율권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그 자녀 된 성도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의 다윗으로 말하자면 신앙인으로서 완전히 성숙한 위치에 도달했다고 할만 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의 그 어려운 고난들을 잘 인내하면서 통과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위대한 군주로서의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 초기에 제일 먼저 언약궤를 모셔 오는 일부터 그처럼 기쁨과 정성으로 완수했습니다.
  
부자(父子)의 경우로 비교해 본다면, 이제 키울 만큼 다 키웠을 뿐 아니라 아주 능력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했으며 게다가 부모에 대한 효성까지 극진하게 발휘하는 정말 대견스러운 아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제부터는 자기 할 일은 그저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가만 두어도 아무 염려할 것이 없어 보이는 경우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완전한 자유를 주면 줄수록 더욱더 잘할 것처럼만 보이는 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처럼 모범적으로 보이는, 그처럼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잘할 것 같은 다윗을 대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만 행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내 집'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요 '내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 중에 한 명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행사하고 계시는 절대적 주권이 특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방법'에 대해서도 오로지 주권적이십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에 "1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2나단이 다윗에게 고하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3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5내가 이스라엘을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6무릇 이스라엘 무리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자 하는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모셔온 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송구스러웠습니다.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좋은 궁전에 사는데 여호와의 언약궤는 천막 안에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의도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는, 정말 순수하고도 기특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그런 자신의 의사를 말했을 때 나단 역시 쌍수를 들고 찬성했습니다.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즉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해 주셨는데, 왕께서 그런 갸륵한 마음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이라면 오죽하시겠습니까? 어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십시오.'라고 나단이 다윗을 격려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나단뿐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누가 다윗 곁에 있었다 해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그 서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여쭈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왜냐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옳게만 보였으니까, 그저 "그렇게 하십시오."라고만 대답해 주고서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잠 잘 자고 있던 나단을 일부러 깨우기까지 하시면서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명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스라엘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어떤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그냥 이 장막, 저 장막, 이 성막, 저 성막에 언약궤를 두고 거기 임재하며 지내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불만을 가지고 성전을 빨리 지으라고 어느 사사에게 압력을 주거나 독촉한 일이 있었느냐?"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정말 의외의 대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더 좋은 곳에 잘 모시기 위하여 제가 가진 힘과 재력과 정성을 다 바쳐서 성전을 짓겠습니다."라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천만뜻밖에도 "너는 그 일을 하지 말라."고 딱 잘라 거절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성전 짓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를 가리켜 '그가 군인으로서 사람의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던지 간에 이런 하나님의 응답은 나단이나 다윗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시 한 번 확연히 보여 주시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주권적인 하나님이신지 '당신을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도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라, '사람의 창조주로서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위치, 비슷한 위치에 있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경우라면 마다할 이유도, 마다할 사람도 없습니다.
친구가, 가족이, 이웃집 사람이 자기에게 선물을 주겠다는데, 무언가 대접해 주거나 도와주겠다는데, 그것을 굳이 거절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는 이렇게 해 드리는 것이 좋겠다.'라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에 그것을 무조건 다 좋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결코 '높고 위대하신 진짜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이란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쪽이 상대방보다 확실히 높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릅니다.
고객이 점원에게 이렇게 저렇게 서비스해 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문자 그대로 '고객은 왕'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무엇을 해 드리려 할 때에 "기왕에 해 줄 바에야 이렇게 저렇게 해 다오."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란 '하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진짜 높으신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에야 오죽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스스로 정하시고 성경에 명백히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어떤 성일을 지켜야 하고, 어떤 경건생활을 해야 하고,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지에 대하여 하나하나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결정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요구, 아니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기특한 마음'이 하나님을 찾거나 사람의 '갸륵한 정성'이 하나님을 섬기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사람의 창조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으로 섬긴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 당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코 자신의 신심(信心)이나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따라야 함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방편'에 대해서도 역시 주권적이십니다. 

7절 이하 10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7연하여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8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9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는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0a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 짓는 일은 허락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에 그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다른 길로 크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목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아 주시고, 그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줄 것이라고 즉 매사에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겠다고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자신은 "존귀한 자의 이름" 즉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군주가 될 것이며,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백성들은 "한 곳에 심기어서 다시는 옮기지 않는" 즉 그야말로 확실한 안전보장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그전에 "악한 유" 즉 이방의 '악인'들에게 침략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느라고 매일을 지새우던 사사 시대 때와는 달리, 이제는 거꾸로 "모든 대적을 복종케" 하는 승리하고 점령하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엄청난 축복이었습니까?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복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축복이었습니다.
특히 일개 목동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고의 축복이 다윗에게 쏟아 부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런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 복은 다윗이 하나님께 요구해서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복은 다윗이 "저는 성전을 지어 드릴 테니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보답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흥정해서 얻은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작정하시고 다윗에게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는 대신에 당신께서 달리 계획하신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윗을 그렇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 받고 싶은 복을 정하고 그것만 하나님께 요구해서 받게 된다면, 그런 복의 질은 아주 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동'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복이란 '양 몇 마리' 더 소유하는 정도에서 머물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혹 좀 잘 되어서 '목장주' 정도만 될 수 있어도 그야말로 복바가지가 터졌다고 좋아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목동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는 복'이란 오직 하나님께서만 '뜻'하실 수 있으며 '실천'하실 수도 있는 복입니다. 
그런 엄청난 복은 사람 편에서는 스스로 성취하기는커녕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정하시고 내려 주실 때에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에게 그런 최고의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선한 일에 자신의 인생이 유용하게 쓰이기를 원하는 진실함과 충성됨이 있는 성도입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복'에 매달리게 되면, 그런 사람은 평생토록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자기 욕심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소원만 남발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무한정의 축복의 약속은 오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영적 우선순위가 분명한 신자에게만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복을 주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처럼 철저하게 주권적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계시고 또한 그대로 베풀어 주실 능력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좁은 마음'으로 '작은 그릇'을 채워달라고 보채는 철없는 아이가 되지 말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상상 이상의 것'을 '잔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을 사모하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도 철저히 주권적이십니다.

10절 하반절에서 15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0b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지라 11네 수한이 차서 네가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12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3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자비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며 14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5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다윗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하시는 '집'이란 직접적으로는 '솔로몬이 세울 성전'을 말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약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네가 죽고 나면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부분적으로는 다윗의 뒤를 이을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말씀 역시 궁극적으로는 장차 그 뒤에 따라올 더욱 크고도 완전한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 왕조 자체가 "영원히" 견고하지는 못했습니다.
세속 왕조로서의 다윗 왕조는 솔로몬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을 뿐이며 그 뒤로 곧 남북 분열 왕조가 되었고 끝내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게 그 왕권을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위"란 의심할 바 없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왕위를 가리키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자비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인 솔로몬을 신격화시켜서 하시는 말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그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특별한 관계는 오직 성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선포를 통해서 이 모든 사실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이 아니라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집'인 교회의 머리로, '당신의 나라'인 천년왕국의 주로 세우실 것이며 그 왕권은 영원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대로, 비록 솔로몬으로 이어진 다윗 왕조는 얼마 지나지 못해서 끝나고 말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금까지도 문자 그대로 '영영히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대해서도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예정해 두셨습니다.
그 교회는 오직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실 것이며, 그 '왕 중의 왕'께서 교회를 통하여 발휘하시는 권위는 이 세상뿐 아니라 내세에 이르기까지 영원하도록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이 미처 세워지기도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를 시작하기 훨씬 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창립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설립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해 놓으시고 택한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중세의 로마 천주교는 사제들과 교황이 교회의 권위를 독점하고 악용했습니다.
그때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머리가 되시는 참된 교회'를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세웠는데 그것이 곧 '장로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천주교에 대한 반발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서 '회중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장로교회에도 아직 천주교적인 잔재가 남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권리가 철저하게 교인들에게만 집중되는 회중교회를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회중교회의 결정적인 약점은 '교회를 교인보다 밑에 두게 되는' 잘못에 있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양심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보다,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앞에 나가는 위험에 빠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인이 선한 뜻을 모아서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집'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인이 지혜롭고 양심적이어서 교회를 잘 운영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를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통하여 상세하게 지시해 놓으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우시는 역사에 있어서도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주권적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오직 '성경 중심'으로만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식은 자라면 자랄수록 점점 더 부모와 대등해집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도 차이가 없게 됩니다.
자연히 그 관계에서는 어떤 권리의 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똑똑해져도,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아무리 인격이 성숙해져도,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위치로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유능한 왕이었고 그토록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신자였던 다윗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자기 의견' '자기 양심' '자기 선행'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동에 불과했을 때부터 왕이 된 후에까지, 도망자 시절부터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룰 때까지도 다윗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당신의 집'에 살고 있는 '어린 자녀'요 '당신의 나라'를 맡기신 '종'일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항상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과 모든 관계에 있어서 그 주도권과 우선권과 결정권 전부가 오직 하나님께만 일방적으로 몰려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진짜 살아 계신 주권자로 믿을 줄 아는 신자는, 그 하나님 앞에서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위치를 겸손히 깨달을 줄 아는 신자는, 그 무엇보다도 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그 어느 순간이나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간과하지 않는 법입니다. 
  
당신을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는 방편에 있어서도, 또한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는 문제에 대해서도 홀로 절대주권으로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 앞에 오직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자세'로만 신앙생활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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