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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 충만하십니까?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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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하십니까? (행 2:42-47)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목사가 기도하다가 천국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국 문을 지키는 베드로를 보자 웨슬리가 질문을 하였답니다. 자신과 함께 전도하다가 먼저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감리교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천국에 왔는지 궁금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명부를 뒤적거립니다. 잠시 후 그들의 이름이 없다고 대답하자 웨슬리는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는 감리교 운동이 잘못된 모양이군요.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칼빈의 교리를 따르는 장로교인들은 몇 사람이나 들어왔습니까?” 한참 살펴보던 베드로는 이름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더욱 놀랐습니다. “종교개혁운동도 실패한 것 같군요. 천주교인은 얼마나 들어왔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의 이름도 없다고 대답합니다. 웨슬리는 깜짝 놀라며 “그러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 즉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는 곳이 천국입니다. 감리교인이냐 장로교인이냐 천주교인이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누구든지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하면 천국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화려하게 교회를 건축하고, 좋은 시설을 갖추었다고 교회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교인이 교인다우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예배드리는 중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말씀 중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하고 기도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초대교회는 초라한 건물에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모였어도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살아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명을 다하는 교회였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회였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이 없이 아무리 기도해도, 찬양해도, 일한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모든 것을 행할 때에 기뻐하십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에 무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저버리면 세속화가 됩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들의 공동체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논쟁의 주제가 아니라 축복의 주제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어디에 힘을 쓰는지 살펴보면 성령 충만한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어디에 힘쓰게 됩니까?
 
첫째로 기도하기에 

하비 콕스(Harvery Cox)의 '하늘로부터의 불(Fire from Heaven)'이라는 저서에 의하면 20세기말에 교회마다 하나의 징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교리는 모르지만 말씀 그대로 붙들고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은 21세기를 열어가는 시점에 이르러 전 세계의 교회로 확산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점잖은 교회와 교파는 20%에서 40%의 교인이 감소했지만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 라며 밤낮없이 기도하는 교회들은 183%나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놀라운 역사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42절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여기의 ‘전혀 힘쓰니라’는 미완료과거형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으로 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즉 기도에 지속적으로 힘을 쏟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능력은 사라집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성령을 받았다 해도 연약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면 모든 것이 다 꺼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결코 안 됩니다. 기도하기 쉬는 죄를 범해서도 안 됩니다. 기독교를 기도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이 기도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만이 성령 충만의 모습이며 또한 성령 충만할 때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기도에 힘쓰게 됩니다.

기도의 실패는 신앙의 실패입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성령과 일체감을 갖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나는 할 수 없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신에 차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시기 바랍니다. 기도시간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쁠수록 기도의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힘들고 피곤해도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 기도이며 그 길만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랑하기에 

히말라야 산속 동굴에서 평생을 기도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원 원장이 찾아와 자문을 요청합니다. 수도원에 사람들이 다 떠나고 문 닫을 처지에 놓였는데 어떻게 하면 수도원이 부흥할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원장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졌다고 하십니까? 살인을 했겠습니까? 강도질을 했겠습니까? 아니면 간음을 했겠습니까?”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무지라는 죄가 있습니다. 

당신들 속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오. 그런데 당신들이 그분을 몰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을 잘 모시면 부흥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으로 돌아온 원장이 수도사들을 불러 이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변장한 하나님이 계시다는데...” 그때부터 서로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저 사람이 그 하나님이신가?” 서로 바라보며 말을 조심하였습니다. 

서로 하나님을 대하듯 대합니다. 자기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생각하니 수도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사랑이 넘쳤습니다. 수도원에 은혜가 넘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수도원이 크게 부흥하게 됐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공동체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니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44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본래 제자들은 직업도 달랐습니다. 출신 지역도 달랐습니다. 나이도 차이가 났습니다. 취향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부르심 때문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승천하신 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달라졌습니다. 서로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상호간에 이루어진 영적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사랑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면 네 것 내 것이 없습니다.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랑이 있을 때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 하게 되면 서로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집니다. 더 이상 싸움과 갈등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개인적 욕심과 감정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의 열매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모이기에 

갈보리교회 척 스미스(Chuck Smith)목사는 베이비부머(Baby Boomer) 즉 60년대 이후 히피족으로 등장한 젊은이 선교로 유명합니다. 히피의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새 카펫을 깔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발도 신지 않은 히피들이 교회를 휘젓고 다니자 중직들이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미스 목사를 찾아와 히피들 때문에 교회가 지저분해진다고 불평합니다. 그러자 스미스 목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만일 새 건물과 깨끗한 카펫 때문에 젊은이들이 들어올 수 없다면, 카펫을 당장 걷어버리십시오!”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교회가 카펫 때문에 그들을 밀어낸다면, 카펫을 걷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복음을 위해 세워진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회로 바뀐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교회에 모이는 일을 훼방해서는 안 됩니다. 가로막아도 안 됩니다. 교회는 영혼 구원의 목적으로 모이기에 힘쓸 때 비로소 능력 있는 교회가 됩니다. 피곤하고 바쁘지만 모이기에 힘쓸 때 교회는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으로 더욱 잘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모습을 보면 성령 충만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6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행동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습니다. 모임에 힘쓰고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림도 성령 충만함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 놓고 순교적 자세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기자는 10장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경고하였습니다. 

사탄은 모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워도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모이는 것은 내 힘과 의지로 안 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모이는 것이 행복합니다. 기뻐집니다. 모임에 힘쓰게 됩니다. 

무디 (D.L Moody) 선생이 시카고 교회 교사로 봉사할 때 교인들이 이렇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무디, 당신이 성령 받기를 기도합니다.” 무디 역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필요한 성령을 주십시오.” 어느 날 뉴욕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무디는 너무 뜨거워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제 거두어주소서” 그 이후 무디의 삶은 기쁨과 능력이 넘쳐 났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모름지기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기도에 힘쓰게 됩니다. 사랑에 힘쓰게 됩니다. 모이기에 힘쓰게 됩니다. 부디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나가는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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