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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간구하라 (에 8: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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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간구하라 (에 8:21-31)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많은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들어 정복하게 하시고 페르시아의 왕들로 하여금 유다 백성을 놓아주어 그들의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명하게 하신 역사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멸망하고 흩어졌던 민족공동체를 복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단지 유다 백성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일로 그치지 않고 새 성전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제사를 드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바른 신앙을 회복하게 하시는 일로 이어졌음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영적 회복운동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이가 율법학자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였습니다. 

에스라는 당대의 페르시아 왕인 아닥사스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자신과 자신의 일곱 자문관의 이름으로 에스라를 유다로 보냈으며(스7:14) 그를 보낼 때 하나님께 성심으로 금과 은을 보냈습니다(스7:15). 그뿐 아니라 그는 바벨론의 온 도와(스7:16) 궁중창고와(스7:20)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의 모든 창고에서도(스7:21)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내다 쓸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일체의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면제해주도록 했습니다(스7:24). 

에스라는 자기와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갈 백성을 아하와 강가로 모았습니다. 아하와 강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바벨론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에스겔서에서 말하는 그발 강가처럼 사로잡혀 온 유다 백성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추측됩니다. 에스라는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을 치고 머물며 함께 돌아갈 백성들을 점검했습니다. 

특히 그의 주된 임무가 예루살렘 선전에서의 바른 제사와 신앙의 회복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수행할 제사장들을 살폈습니다. 그 때 알게 된 사실이 같이 갈 일행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스8:15). 그래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으느라고(스8:16-20) 바벨론에서 길을 떠난 지 열하루 뒤인 첫째 달 십이일에야 아하와 강에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본문 31절). 

예루살렘을 향한 이주의 행진을 시작할 준비는 끝났지만 그 일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까지의 귀향길은 약 900마일 즉 1440킬로미터였으며 삼천육백리 길이었습니다. 군대가 행진한 것이 아니고 본문 21절에서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한 데서 보듯이 남녀노소와 함께 각 가정의 온갖 살림살이가 들어있는 이주이삿짐 외에도 성전을 위해 드려진 모든 예물을 끌고 가야 했습니다. 

본문 25-30절에서 언급된 성전을 하여 바쳐진 예물들은 어마어마한 물량의 것입니다. 또 조심히 다루고 지켜져야 할 물건들이었습니다. 삼천육백리 길을 이러한 물량을 운반한다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걸어서 귀환했습니다. 넉 달이 걸려 간 길이었습니다(스7:9). 그 이주경로에는 떼강도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매우 고되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린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까지 있어 느리고 숱한 귀한 물건들을 갖고 가는 이런 이주자의 무리는 강도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었을 것입니다. 

이 길고 험난한 길을 떠나기에 앞서 에스라가 한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 21절은 보여줍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합니다.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했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했으며 그에게 평탄한 길을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보다 후에 금식을 더 많이 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가기 전에는 금식은 특별한 경우에만 행해졌고 온 백성이 다 하는 때는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하곤 했지만 잡혀간 후로는 금식이 더 강조되었습니다. 슥8:19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합니다. 

금식이 훨씬 자주 행해졌으며 또 정례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했다는 것은 자기 혼자만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온 일행이 다 같이 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금식이 어려운 처지에 놓일수록 더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모으기에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스라는 또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에스라나 유다 백성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지켜주셔야 할 일임을 잘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스라와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간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라 한 것은 “약한 자들”이란 말로 어린아이뿐 아니라 여인들과 노약자들을 다 가리킨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에스라 일행의 귀향길은 길고 고되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호위하는 군대 없이 여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자기를 절대 신임하고 직접 자기를 명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며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페르시아 왕에게 호위군대를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 땅으로 돌아올 때는 페르시아 왕이 보내준 군대 장관과 마병과 함께 왔습니다(느2:8-9). 

그 사실로 보아 에스라도 왕에게 요청하기만 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페르시아 왕에게 그런 요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봅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에스라는 이미 페르시아 왕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 놓고 말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실 것이므로 하나님을 믿고 가면 달리 도와줄 군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했는데 이제 와서 갈 길이 멀고 험해서 걱정이 된다고 호위해줄 군대를 요청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에스라의 일행 중에는 아무래도 군대의 호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왕에게 호위군대를 요청하자는 제언을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고 오로지 하나님의 보호에 의존하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다 같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동행하시며 보호해주셔야만 할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위한 다른 준비에 앞서 에스라가 행한 것은 바로 이 영적 준비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1절을 봅니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에스라 일행을 대적하거나 매복했다가 공격을 감행한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에스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귀한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친히 지켜주시기를 간구하는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교회가 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국가적인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새 성전 건축>이라는 큰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진행시키는 데도 많은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들도 있고 숱한 어려움이 매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금식하는 자세로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을 모으고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지켜주셔야만 될 일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추진하는 <새문안 새 생명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기를 힘쓰는 우리 앞에 얼마나 많은 대적과 장애가 매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우리의 목표를 이루려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과 겸비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다른 힘을 빌리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되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만 한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자성과 개혁의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이 운동에 대해 저항하고 방해하며 오늘의 부패한 상태를 외면하고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을 지키려고 혈안이 된 자들이 많습니다. 안팎으로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개혁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떻습니까? 북한은 갈수록 더 적반하장의 태도로 우리에 대한 협박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는 그들의 협박 때문에 불안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정부나 군대는 국민을 안심시키며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분명한 대비를 해야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어떤 군사적 보호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적 준비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믿음의 자세를 확고히 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들이 눈으로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후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의 강림과 충만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그들은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뛰쳐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복음의 결실을 할 수 있었으며 숱한 박해와 고난을 견디며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를 대적하거나 매복하여 공격하는 모든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령의 오심과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놀랍게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우리 개인과 교회와 나라의 모든 일을 성취해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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