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디서든 주도적인 사람이 되라! (창 50:19-21)

첨부 1


어디서든 주도적인 사람이 되라! (창 50:19-21)


오늘 저는 먼저 여러분들에게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앞에 있는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진이 일출이겠습니까, 일몰이겠습니까?  똑같은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일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몰이라고 합니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에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입니다.

또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서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그 유명한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폭포를 보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다같이 한 번 크게 외쳐 보겠습니다.
"나이야∼ 가라∼"

결국 생각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만듭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환경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얽매여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꿈과 비전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은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꿈과 비전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환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넘어지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내 처지를 바라보면 답답한 것이 한 숨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꿈과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환경을 바라보면서 낙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꿈과 비전을 향해 더디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꿈과 비전을 품고 나아가는 그 길에도 때로는 나를 낙심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낙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꿈과 비전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처럼 빨리 도달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과 비전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인내하면서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비록 더디기는 하겠지만 어느 때엔가 반드시 거기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또 인간이 젊은 나이에 실수들을 다 딛고 일어서서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내 방식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 하나만 붙들어도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셨을까?" 그것이 신앙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내 경험으로는, 내 이성으로는, 내 재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갈까?  그렇게 결정한 다음에야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장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문제를 소망으로 보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꿈과 비전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사건과 일들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그림이 현실을 창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저 유대 언덕의 주님과 함께 창조적인 그림을 그리십시오.  지금의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을 그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어주실 그 꿈과 비전의 소망을 그리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믿음대로 됩니다.  꿈대로 됩니다.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입술에 찬양이 있습니다.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마음에 감사가 있습니다.  꿈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그 영혼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소망의 눈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의 눈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눈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 속에 제일 무서운 죄는 믿음 없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붙들어야 됩니다.  믿고 살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들이 이 땅에서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서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수많은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소망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이들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불과 얼마의 시간의 차이로 에서는 형으로 태어났고, 야곱은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불과 몇 분도 되지 않는 그 태어난 순서 하나 때문에 에서에게는 가정의 엄청난 모든 복이 그대로 상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야곱이 모든 복과 장자권을 쟁취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차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처음부터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복에 대한 남다른 눈을 뜹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과 인도를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는 그런 인생으로 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때마다 시간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절대로 소중히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우습게 알면 안됩니다.  이 땅에는 정말 때마다 일마다 시간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복과 인도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눈만 뜨면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사모하던 야곱은 드디어 복의 대열에 서서 역사의 한때를 책임지는 위대한 주인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를 보십시오.  그는 복된 장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장 배고픈 것만 생각하다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인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그 시대의 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에서의 문제는 물질 제일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서 미래의 소중함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는 에서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침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들에 얽매여서 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라면 한 그릇에 바꿔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주병 한 잔에 따 버리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길에는 나의 선택의 능력을 초월해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 길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장자권을 돈 몇 푼에 팔아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인색하려다가 장자의 복된 권한을 내버려서는 안됩니다.  세상에는 푹푹 쓰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인색하여 뱃속에 집어넣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한한 우리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을 결코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새들이 날개에 병이 났습니다.  새가 날개를 잃어버리면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날아오를 수 있는 하늘을 잃어버립니다.  인생이 꿈을 잃어버리면 무엇을 잃어버릴까?  미래를 잃어버립니다.  새가 날개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푸른 하늘이 있어도 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꿈을 잃어버리면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꿈의 날개를 꺾어버리면 미래를 어떻게 올라가느냐 말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생은 결국에는 내일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꿈과 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온 몸으로 함께 세워가야 할 하나님의 몸된 성전인 이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꿈과 비전은 무엇입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현재의 내가 처한 내 가정과 교회의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꿈과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기회와 때로 충만했던 야곱처럼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사모하면서 꿈과 비전을 향해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잠깐 타고 끝나버리는 촛불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다음 세대를 향하여 물려주고 물려주어야 할 횃불입니다.  그러므로 꿈과 비전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꿈과 비전을 무시하는 사람은 씨앗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습니다.  씨앗을 무시하면 절대로 농사를 못 짓습니다.  꿈을 무시하면 인생에서 추수의 날이 없습니다.  씨앗이 추수에 관계되어 있다면 꿈은 풍요로운 미래의 정신적인 그런 수확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꿈과 미래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추수의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꿈과 미래는 주도적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 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습관의 피해자들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알든 모르든 습관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닙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10년, 20년의 성장과정에서 형성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성장 과정에서의 습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개인적인 습관의 지배를 먼저 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환경의 피해자가 아니라 습관의 피해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습관은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얼마든지 마음의 습관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마음의 습관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고 우리의 마음의 습관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습관이 곧 자신은 아닙니다.  습관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습관은 버릴 수도 있고 익힐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습관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습관도 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습관도 변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매 한 가지입니다.  그 입술에 감사가 있는 것도 마음의 습관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의 습관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크고 놀라운 복을 받은 우리들이 이 작은 세상적인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늘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마음의 습관이 창조적으로 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슨 습관해도 마음의 습관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마음의 습관이 그러하면 내 인간 됨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붙잡고 항상 흑암의 권세를 기도로 정복하십시오.  그 영혼에 감사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 항상 기뻐함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성령님의 위로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마다 일마다 일어나는 모든 흑암의 권세와 모든 어려움 속에서 기도와 찬양으로 흑암의 권세를 묶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1은 2입니다.  그러나 좋은 습관은 이것이 천이 될 수도 있고, 십만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좋은 믿음의 습관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매사에 어디를 가든지 주도적인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주도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은 인생에서 가치의 산물이 되라는 말입니다.

주도적으로 되는 것의 반대는 대응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대응적이라는 말은 기 기분과 감정과 충동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응적인 사람은 환경과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분위기와 자기 감정에 민감합니다.  그래 가지고는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도적인 사람은 환경과 상황이 어떠하든 날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새롭게 하면서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환경과 분위기가 어두우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그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민족이든 영원한 주역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며 준비하고 훈련하는 국가나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습니다.  훈련된 자만이 역사의 주역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훈련받은 사람만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주역이 도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훈련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훈련을 싫어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훈련을 회피합니다.  훈련을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훈련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세워질 그날을 사모하면서 훈련받는 것을 인내하면서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타조는 한 때 잘 날아다녔던 새라고 합니다.  그런데 먹이가 풍부하고 맹수가 사라지니까 아예 날 줄을 모르는 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면 우리도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는 타조의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솔개를 보십시오.  솔개는 40년쯤 산 뒤에 부리와 발톱과 날개를 뽑아내는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 70년을 넘게 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꿈과 비전을 향해 더 높이 날기 위해서 이 솔개와 같이 뼈를 깎는 자기 훈련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남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 역사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에서든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분위기에 끌려가는 주변인이 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성령의 거룩한 영적 파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어디를 가든지 매사에 주도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제안을 한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미를 잃지 마십시오.  주도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고, 영적 분위기를 장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미를 잃지 말아야 됩니다.  삭막한 세상입니다.  멋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맛과 멋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간미가 물씬 풍겨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강력한 자기 도덕성의 회복이 있어야 됩니다.

분명한 예의범절과 에티켓이 있어야 됩니다.  예의범절은 남하고의 문제이지만 에티켓은 자기와의 문제입니다.  자기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서 맛과 멋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을 보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주도적으로 미래를 창조하십시오.  교회는 변화의 진원지입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발전하지도 못합니다.  발전을 모르면 정신적 불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주도적으로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신앙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미래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그 변화를 수용하는 주도적인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이곳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모인 이곳에 성령님께서 충만함으로 강력하게 운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내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우리 언양 영신교회의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흑암의 권세에 끌려가는 주변인이 되지 말고, 그 흑암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적 분위기를 장악하는 주도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일어난 성령님의 역사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언양 영신교회에서 일어난 성령님의 역사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 창조적인 이야기는 주도적인 믿음의 사람만이 만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인간적인 면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를 모든 방황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으십시오.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성경 전체가 아주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답답하게 살아왔던 모든 재주와 경험과 판단과 이성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고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생각의 다스림이 필요합니다.  생각은 성격과 행위를 형성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보이지 않는 비밀스런 조각가의 작업장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이 어떠하면 행동도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 생각의 중요성을 아주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통제해야 합니다.  생각의 통제는 바로 위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골로새 교인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결국 사고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떨쳐버리십시오.  자신을 나약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메뚜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 속에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의심과 낙심과 절망과 불평의 생각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생각들은 사단이 한 순간 내 생각 속에 던지고 간 가라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생각이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자신을 파멸과 불신의 늪으로 이끌어갑니다.  미움과 불평과 낙심의 생각이 결국에는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의 평안을 파괴합니다.  이것은 포도원을 허물어뜨리는 작은 여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무릇 자기 생각을 다스리십시오.  내 마음의 포도원을 허물어뜨리는 작은 여우를 잡으십시오.

우리는 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같은 질그릇이지만 된장을 담으면 된장그릇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수동적으로 남에 의해서 지배되는 그런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 목적 없이 끌려가는 그런 존재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삶이라는 행복도 불행도 결국 자기 반응이 만들어 가는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은혜의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감사와 찬양의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반응만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은혜의 반응만 나오게 하옵소서.  감사와 찬양의 반응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반응만 나오게 하옵소서."

성공적인 사람이 가지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습관은 주도적인 삶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 속에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시대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시대를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주도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은 언제나 본질적이고 주도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항상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분이나 분위기, 조건, 주변 여건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감정이나 충동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단히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을 붙들고 주도적인 무리에 들었을 때와 감정에 붙잡혀 충동적이 되었을 때의 지난날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주도적인 믿음의 사람들도 외부의 자극이나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믿음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믿음의 사람일진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당하든지 항상 믿음으로 반응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감정으로 반응해서는 안됩니다.  감정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아직도 초등학문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유아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소망으로 반응하십시오.  사랑으로 반응하십시오.  그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 어디에 있든지 그 한 시대 속에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환경과 시대를 이끌어 가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좋은 일이 저절로 일어나거나 기다려 주는 줄로 아는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환경 결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시대 속에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환경을 다스리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성령에 취하여 이 도시를 점령하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주도적인 사람을 붙들고 일하십니다.  역사는 주도적인 사람들이 만들어갑니다.  우리 언양 영신교회도 주도적인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시대 속에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도적인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우리가 쓰는 말은 자신을 얼마나 주도적인 사람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측정 기준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말은 씨가 되고, 예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삽니다.  그래야 교회가 삽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삽니다.  기억하십시오.  에스겔의 그 권세 있는 말 한 마디가 골짜기에 죽은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입술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혀는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깨끗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힘을 빼기도 하고, 힘이 솟아나게도 합니다.  언어의 통제에 인생의 행복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언어를 세우면 생활은 세워진다."

그렇습니다.  언어를 세우면 생활은 세워집니다.  언어가 주도적이면 어디서든지 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안에서 주도적인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변화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꿈쟁이 요셉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는데 110세에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형제들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또 외롭고 고생스러운 노예생활에서 얼마나 형제들이 원망스러웠겠습니까?  불쌍한 자신의 처지에 얼마나 좌절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도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조금 나아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결정적인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13년간이라는 긴 세월동안 억울한 지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절망했습니까?  그가 좌절했습니까?  그가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도 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국 지하 감옥에서도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알 듯이 요셉은 그 기나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형제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하 감옥에 갇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어도 집안 주인의 탓이라든지, 못된 여자 탓이라든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 그런 삶의 반응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주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주도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들은 나를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버리고,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증거가 되게 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듯이 하나님의 생기를 온 백성들에게 선언할 수 있는 주도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주시기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