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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림과 심판의 성격 (눅 17: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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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과 심판의 성격 (눅 17:26-37)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의 나라로 구분되지만 장차 주님이 심판의 주가 되어 임하시는데 이루어지는 우주적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리고 내세의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우주적 하나님 나라는 심판의 나라다. 초림의 예수는 이 세상에 버린 바 되고 고난을 받았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는 철창 권세를 가지시고 심판의 주로 오신다. “심판이 무엇이냐?”하며 심판을 불신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심판은 내가 외면하고 믿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리우고 하늘에 해가 없다고 하여 해가 없는 것이 아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은 반드시 있다. 롬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고, 롬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처럼 심판이 있음을 알고 다시 오시는 인자의 날, 주의 재림과 함께 나타날 미래의 심판을 피할 준비를 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재림과 심판의 성격은 이렇다. 

눅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눅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심판 이야기, 홍수 심판 이야기와 불심판의 이야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죄를 다루는 이야기, 죄 때문에 멸망 받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죄악 중에서도 살려냄을 받고 구원 얻는 자가 있는 이야기이다. 심판의 때의 이야기가 인자의 나타나는 재림의 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과 심판이 어떻게 언급되는 것인가?  

1. 미리 알려주시는 예고성이다. (히11:7)

노아의 홍수 예고는 하나님이 당대에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알려주었다.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이야기를 히11:7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심판은 분명코 예고해 주시고 있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롯이 살던 소돔 성 심판의 이야기도 분명코 하나님이 보내신 두 천사가 예고하여 준다. 창19:13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심판은 이렇게 미리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 주고 있다. 재림이 임박한 때를 예고해 주는 것이다. 

재림과 심판은 하나님의 D-Day이다. 그 날은 예고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2.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돌연성이다. (눅17:27~28)

재림과 심판에 대해 경고를 받고 그것을 믿는 사람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방주를 만드는 신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불신자는 마음대로 산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코미디 같은 재림과 심판이 갑자기 임하는 것이다. 

눅17:27을 보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 간다. 이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뜻하지 않은 때 일상 속에 돌연히 임할 심판의 긴박성을 말하는 것이다. 

눅17:28을 보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생각지 않고 사는 일에 분주할 때 돌연히 임할 재림과 심판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세상 사는 일에 바쁘고 영혼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일에 무관심한 것이다. 당장 내일에 있는 일만 잘 되면 성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지혜로운 것 같으나 짐승보다 못하다. 짐승은 아니 곤충들도 징조를 안다. 지진이 나려면 원숭이도, 개미도 이동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치를 못챈다. 이미 주어진 시대의 징조, 말씀에서 다 언급하고 있다. 계시에 눈이 열리고 눈치 채는 자가 되자.
  

3. 매일 준비해야 하는 예비성이다. (눅17:31)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몇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①드릴 준비, ②섬길 준비, ③기도 준비, ④죽음 준비, ⑤재림과 심판에 대한 준비다. 준비하는 자가 되면 홀연히 임할 심판 앞에서도 다 멸망되지 않는다. 사실 준비하는 자는 산다. 홍수의 심판 날, 노아의 가족은 살았다. 불심판의 날, 롯이 살았다. 재림과 심판을 외면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소망이 없다. 

눅17:31을 보면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재림과 심판의 날이 다가올 때 세상의 것, 세간에 마음이 끌려 돌아가면 안된다. 주의 오심만을 대망하고 지붕과 밭에 머물러야 한다. 

눅17: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이는 심판의 날에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된 이야기이다.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그 날의 징조를 볼수록, 그 날이 지금이라고 할 때 재림과 심판은 오직 매일 매일을 준비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 허둥 지둥대고 세상이 좋아보인다고 세상 것을 지키려고 뒤돌아보고 선택해서는 안된다. 암4: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4.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지는 구별성이다. (눅17:34)

눅17: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눅17:35에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누가 구원 받는 자인가? 둘 중에서 데려감을 얻는 자인가? 버려둠을 당한 자인가? 데려감을 당하는 자, ‘데려가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천국으로 제자들을 데려갈 것이라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반면 ‘버려두다’라는 단어는 팽개쳐 버리다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사는 것이다. 버려둠을 당하면 주검에 던져진다.

결국 주의 재림과 심판은 사람을 두 부류로 구별하는 것이다. ‘양이냐, 염소냐’, ‘알곡이냐 껍데니냐’, ‘주님과 함께 거하느냐, 버려지느냐’의 구별이다. 재림과 심판은 죽음과 생명으로 나누어지는 매서움과 혹독한 구별이다. 이 구별의 날, 심판 받을 자들은 ‘바위야 나를 가리워다오, 나무 뒤에 숨어 나를 가리워다오’라고 외쳐야 할 날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은혜에 감격하고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날이다. 

재림과 심판은 그것이 그것인 날이 아니다. 확실하게 빛과 어두움이 구별되듯 천국과 지옥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구렁이 있듯 구별성을 가진 것이다. 
  

5. 누구나 주님 앞에서는 보편성이다. (눅17:37)

데려감을 당하는 이들과 버려둠을 당하는 이들의 교훈 앞에 제자들은 그 장소를 물었다. 눅17:37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 때 주님은 그 장소를 어디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 얻을 장소와 버림 받을 장소가 어떤 골짜기가 아래라고, 어떤 황무지 나무 있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신다. 이는 버려둠의 장소에 대한 대답으로서 심판이 행해지는 곳에는 주검이 있기에 독수리가 모여든다고 하셨다. 즉 주검이 있는 곳은 어느 특정한 곳이 아니다. 독수리가 어느 곳에든지 살육이 있으면 모여들 수 있듯 지구상의 어느 장소, 특정한 장소를 초월하여 사망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재림과 심판은 5대양 6대주에서 일어나게 된다. 아프리카에 살든지, 아시아에 살든지 그 날에 재림을 피할 수 없고 사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재림의 때에 벌어지는 심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성을 지닌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있든지 피할 수 없이 나와 관련된 사건이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재림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피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길은 심판의 경고를 믿는 것이다. (요5:24)

말씀의 경고를 그대로 믿는 것이다. 또 그 말씀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다. 믿는 자는 재림과 심판이 아무리 돌연히 온다 할지라도 준비된 것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들을 보낸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심판이 시작되나 심판으로 가지 않는다.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길은 철저한 회개이다. (계2:21)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계2:21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계2:22 “침상에 던질 터이요 ...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계2:23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사망은 무서운 것이다.

막9:42~50을 보라. 범죄하는 손과 발, 범죄하는 눈을 다 버리라. 두 손과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장애인으로, 손과 발, 눈이 없는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즉 죽음을 피하려면 죄를 버리는 회개를 하라는 뜻이다. 죄 지은 사지백체를 자르라는 것은 회개자가 되라는 것이다. 회개하면 산다. 회개하면 죄를 씻었기에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세 번째 길은 미혹을 이기고 말씀 따라, 기도 따라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딤전4:5)

마지막 때는 미혹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내가 재림주라고 한다. 재림의 주는 그렇게 오지 않는다. 반드시 우주적 심판을 행하신다. 또 어느 장소에 있는 이들만 알도록 오시지 않는다. 만민이 알게 오신다. 눅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주님은 동서남북 어느 누구나 다 알도록 오신다. 동시에 보게 된다. 그러므로 미혹을 당하지 말라. 아무리 멋있는 거짓 선지자가 와서 미혹하더라도 따라가지 말고 말씀을 따라가라.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매일 매일 성화되어 가야 한다. 

네 번째 길은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살후3:12~13)

일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일하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신부 단장이다. 재림의 날은 심판의 날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혼인 잔치의 날이다. 신부에게는 기쁨과 설레임의 날이다. 재림의 날은 두려워 떠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상급 받는 날이다. 재림의 날은 예수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보응 받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은혜의 날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기다림의 날이요, 심판은 내게 상관없는 소망의 날이다.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생명을 보장 받았는가? 
재림과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사는 크리스챤인가?
나는 그 분의 애인으로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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