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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광야로 이끄시는 성령 (눅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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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이끄시는 성령 (눅 4:1-13)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519명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일본인은 37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범죄를 훨씬 적게 저지른다는 의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개 정직하고 질서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 범죄를 적게 저지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한 일본 남자가 살인죄로 15년 동안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습니다만, 15년 동안 단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출감하는 날 아내와 아이들이 왔는데, <앞으로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무도 그를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차갑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그런 냉대가 무서워서라도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잘못한 일이 많지만 그래도 위로받고 싶고, 용서받고 싶고, 다시 회복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외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중에 <세상의 국회의사당, The Capitol of the World>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파코라는 이름의 아들이 가출해서 마드리드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다 용서한다.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아버지가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호텔 앞에는 무려 8백여 명의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파코였다는 것입니다.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인데, 가출한 파코가 그렇게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신문에 난 광고를 자기 아버지가 낸 광고인 줄 알고,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망가진 인생, 용서받길 바라는 인생,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울고 싶은 인생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모두 상처가 깊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용서와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 이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나가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열어 먹이고, 다시 아들로 받아줍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우리들이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감사와 감격으로 살길 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아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까요? 이제 고생 끝입니까? 이제부터 배불리 먹고, 더 이상 돼지우리에서 일하지 않고, 편안히 쉬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종결지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응답을 끌어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펌프의 마중물과 같아서 아버지의 사랑을 붓자 아들의 가슴에서도 사랑이 솟아오릅니다. <아버지, 저 같은 탕자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아버지를 사랑하여 섬기겠습니다. 날마다 밭에 나가고, 품꾼들을 관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편해질 수 있다면 제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그 사랑은 어떻게 표현될까요? 아들은 그 때부터 새벽의 고단함, 낮의 뜨거운 뙤약볕도 두렵지 않습니다. 몸의 피곤함도, 흐르는 땀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품꾼들과 함께 밭으로 나갑니다. 아들은 전과 달라졌습니다. 몰라보게 강해졌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궁극적 목표는 아들을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운반하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이 바뀌고, 멋진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하여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요? 이제 고생 끝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편안할까요? 그 해답을 본문의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 대목을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령충만하셨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광야로 가시게 되었는데, 그것을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우리는 성령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멈칫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한 게 아닙니다. 아늑하고 시원한 거실로 인도한 게 아닙니다. 산해진미가 쌓인 멋진 레스토랑으로 인도한 게 아닙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메마른 땅,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땅, 그늘도 없는 피곤한 땅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환상이 깨집니다. 성령 충만하면 평안하고 아늑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쉬운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안방으로 인도하는 대신, 오히려 광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마주서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이끌리신 후에 마귀를 만나게 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잡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리셨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자 고통이 왔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 매력적입니까? 그렇게 되고 싶으십니까? 나도 광야로 이끌렸으면, 나도 굶주렸으면, 나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란 기도를 드리기가 두려워집니다. 차라리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면 광야로 이끌려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금식도 하지 않고, 따라서 주리지도 않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마귀는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마귀는 예수님을 세 번 시험했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험에 국한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귀는 사십 일 동안 굶주린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의 시험은 비열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높여 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 조롱하듯 말합니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상대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사십 일이나 금식하셔서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 떡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초라해서 되겠어? 눈이 쏙 들어갔네.....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겠어?> 마치 어린아이를 가지고 놀듯이, 조롱하듯이 시험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괴롭히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예수님이야말로 온 세상의 구주임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죄악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멸망하게 하는 죄악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배후에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범죄를 보세요.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했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멸망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먼저 마귀를 굴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가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이기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간교하고 막강한 마귀도 예수님 앞에서 엎드러지고 도망치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마귀가 제아무리 강해도 감히 예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고, 그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참 구원자요, 승리자요, 메시아>임이 온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운 광야에서 세 번 시험을 받으셨고, 세 번 모두 이기셨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19세기 독일에 <요한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1842년 산골마을 뫼트링겐 교회의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얼마 후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처녀가 귀신에게 사로잡혀 마비와 경련을 일으키게 됩니다. 얼마 후에는 그녀의 자매들에게도 전이되어 세 자매가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열심히 모여 기도했지만,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탄절 무렵 성도들과 모여 밤을 새워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때 막내였던 카타리나의 입에서 <예수는 승리자!>라는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이웃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습니다. 그 순간 이 자매들을 사로잡았던 악령이 물러갔습니다. 그 후 영적 침체를 면치 못하던 교회가 활기를 얻었고 부흥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불룸하르트 목사님의 아들도 목사로서 유명한 목회자요, 정치인이 되었는데, 평생 그의 가슴에 살아있는 메시지는 <예수는 승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씻으심으로써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간 것은 예수님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이야말로 위대한 메시아임을 선포하고, 승리자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기선을 제압하신 후에 복음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오순절날 성령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다락방에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불같은 모습으로, 바람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님은 제자들을 광장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성전 뜰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 곳이 제자들에게는 광야였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 마귀가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이 나간 성전 뜰에도, 예루살렘 길거리에도 마귀가 있었습니다. 그 마귀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마귀는 성전 뜰과 길거리에서 제자들을 조롱했습니다. <아, 드디어 나오는구먼.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골방에만 숨어 있으면 되겠어? 길거리로 나와 봐!>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그 길거리에서 마귀와 맞섰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편안하고 아늑한 곳에서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광야로 나갈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하면 광야로 나가게 됩니다. 길거리로 나가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곳, 많은 사람의 비방과 조롱이 있는 곳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왜 우리를 광야로 끌고 가십니까? 그 대답은 예수님의 경우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마귀에 대해 승리하시는 분임을 드러내기 위해 광야로 이끈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모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아랫목에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온실 안에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누구나 길거리로 달려 나가고, 찬바람이 부는 시베리아 벌판과 같은 곳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편안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조용히 예루살렘에 앉아 있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다로, 유다를 넘어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편안한 삶은 포기해야 합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사람처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교우님들이 성령 충만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모험가, 탐험가가 되길 원합니다.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뛰어 일어나고, 도전하길 원합니다. 우리도 사명이 기다리는 길거리로 뛰어나가길 원합니다. 여러분, 일어서십시오. 방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도전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실전에 강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운전면허 필기시험도 잘 치고, 실제로 운전도 잘합니다. 울퉁불퉁한 자갈밭에서도, 좁은 길 같은 인생길에서도 차를 잘 몹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동차에 대한 이론을 많이 알고 지식이 많아도 핸들만 잡으면 오그라드는 사람은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다. 
성령에 의해 이끌리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이끌리는 교회나 교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광야가 두려워서 온실에 숨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슴 가득 꿈이 있지만 이루지 못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은 많이 하는데 실천은 두려워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하면서 산 아래 사명의 땅으로 내려가지 못합니다. 지금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이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광야로 나가서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시고 증명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편안한 거실에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신 게 아닙니다. 마귀와 맞서는 광야에서 위대한 승리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문을 닫아  걸고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자신들이 승리자라고 주장한 게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로마 병정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살벌한 공격이 난무하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광장에서, 길거리에서 위대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요, 승리자임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조만간 우리는 리모델링된 예배당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기념으로 우리는 느슨해졌던 허리띠를 동여매고 7월 넷째 주일에 <해피데이 페스티발 새생명 초청잔치>를 하려고 합니다.이를 위해 작정하고 7월에는 다양한 강사님들을 통해 도전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 일에 열심히 참여해 주십시오. 빈자리를 채워 주십시오. 이 일을 위해 길거리로 나가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온 교우들이 성령의 불이 붙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반드시 세 명 이상씩 초청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광야로 이끌려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본문 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13절을 보면 결국 마귀는 세 가지 시험을 연속으로 하다가 결국은 굴복하여 떠나게 됩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이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신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이 바탕이 된 사역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제일 먼저 한 것이 말씀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장에서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열심히 복음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믿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이 선포될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복음 말씀을 증거하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령의 역사를 받아 우리를 조롱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마귀 권세를 이기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인 오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광야로 이끄시는 성령님을 따라 멋진 모험 여행을 떠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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