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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모두 다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전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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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전 12:1-11)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공생애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육신을 가지신 당신은 세상을 떠나가지만, 당신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6:7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데,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주시고, 그 분-성령님이 예수님이 떠나가신 자리를 메우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그 이름도 많고, 나타나는 모습도 다양하기에 성령님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이론적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깊이 경험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영이십니다.  우리도 영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좁은 머리로 하나님의 영이시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말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하여 알고 경험한 바를 말하고 가르치지만 매우 추상적인 이론이고, 막연한 감도 없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형이하학적인 말로 설명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성경이 가르쳐주신 범위 안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성령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추상적인 면이 많고,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신 성령이신데, 우리의 좁은 머리 안에 성령을 담으려고 하니 담겨지지 않는 것을 봅니다.  성령님의 인격성만 강조하는 이들은 성령의 권능이 약하고 성령의 권능만 강조하는 이들은 신비주의로 흐르거나 잘못된 성령운동으로 탈선하는 이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전적이고 전인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체험한 것만 옳고, 내가 아는 것만 정통이고 다른 이가 아는 것은 잘못된 것이요, 성령에 대한 다른 견해는 무조건 배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편협한 신앙입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령에 대한 신학만이 옳고 순복음교회가 체험한 성령론은 잘못이란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에 대하여 겸손히 수용할 수 있어야 좋습니다.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성령에 대한 이해는 다소 문제점도 있다고 하지만, 나름대로 공헌한 바가 아주 큽니다.    또한 세계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도 성령님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편협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성령님을 짜 맞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 머리통에 다 들어오실 성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구원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세계를 기대하여야 합니다.

성령을 말할 때에 본체론적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본체가 무엇이냐, 성령의 본질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제3위의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나 감화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은 아버지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입니다.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은 하나님이시지 않고,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도 되고, 아들 예수님이 성령도 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롬8:11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누구이십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이의 영이요, 그 분이 아들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살리신 이와 살아나신 분은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아들이 성령이고 성령이 아들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중보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대언의 기도를 드리시고 있습니다.  요일2:1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셨습니다.  

롬8:34에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계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기도하시는 대언자, 그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한 친히 간구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롬8:26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온전한 기도입니다.

성령님은 제3위의 하나님이십니다.  고후13:13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셨고, 마28:19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분명히 구별되고 있으며, 독립된 위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방의 기독교회에서는 4세기 후반에 니케아신조를 재확인하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채택하였는데, 여기서 성령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니케아신조에서는 단순하게 “그리고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 분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숭앙되고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라고 하는 고백은 하나님과 같은 신성에 대한 고백으로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신앙과 예배의 대상임을 지적하며 성령의 신성과 인격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한 본질의 하나님의 영이시며, 우리의 구속을 인치시고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을 가지신 성령에게 예배하고, 순종하고 우리의 전 삶을 드리면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어떤 능력이나 감화력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가 그의 호주머니에서 성령을 꺼내어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싸구려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주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생각할 때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재한 성령을 생각할 수 없고, 아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제외하고 예수님만을 홀로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아들과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배재하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아들과 성령이 없는 성부 하나님만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인식할 수도 없고, 그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삼신론은 이단으로 정죄된 신학의 오류입니다.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강조하면 결국 삼신론이 됩니다.     삼신론은 역사적으로 1202년에 죽은 ‘피요르의 요아킴’이란 사람이 삼위일체를 역사의 세 시대에 결부시켜 설명하면서 자기 당대가 바로 성령 시대이며, 그 성령의 역사로 온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갱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은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구별되면서 완전히 유사한 본질을 가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도 삼위를 한 본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그 삼위의 일치성은 사실상 유사성이요 집단성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삼신론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의 사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 신이 아니고, 하나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장신대학의 조직신학자이신 김명용박사는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라고 하는 사실은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 되는 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인간의 어떤 논리로 설명하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지고, 어떤 근사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양태론적 삼위일체로 이단이 되고 말고, 한 분 하나님만 강조하면 성부가 성자가 되고 또 성령이 되고 맙니다.   삼위일체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분명히 하시는 일은 구별되지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한 분으로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성자 안에는 성부가 계시고, 성령 안에 성자가 계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아들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가 되면서 각기 인격을 가지고 있어 구별해야 됩니다.   이렇게 성부는 우리를 지어주셨고,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셨고, 성령님은 구원을 인쳐주시고 보존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행19:6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행2:4에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므로 방언을 합니다.    찬양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헌신합니다.  성령이라고 해도 거룩하신 영이라고 부름으로 존칭어가 됩니다.  성령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다만 성령이라고 해도 높이는 마음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갈5:16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역사와 임재하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하였어도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성령님에게 온전히 내어드리고 성령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우리의 의지와 지혜로 살아갈 때에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존재 한쪽 구석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시고, 마음 아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소원과 상관없이 완력으로 통제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고, 성령님과 동역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성령께 나의 의지를 온전히 내어드리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순종하면 성령께서 온전히 우리를 소유하시고 통제하기 시작하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아버리는 체험,  이런 경험을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세례라고 하며,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성령에게 사로잡히고 성령 안에 잠기(세례)는 경험은 단회의 경험이 될 수 없습니다.  계속적인 경험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는데, “계속적인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다양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때도 있고, 우리와 함께 활동하실 때도 있고, 우리 위에 강력히 임하시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고, 우리 위에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온전히 주님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려면, 성령님이 온전히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빌1:19-20에서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우리 주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성숙한 성화의 자리로 구원받습니다.  성령님을 말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하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당신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고전12:1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것”이란 공동번역에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고, 새번역에는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있습니다.  고전12:31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나, 다 한 성령으로 주어진 은사들입니다. 모두 다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하여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해야 겸손한 사람이요, 은혜 받을 사람입니다.  모두 다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전12:8-11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은사를 받으셨다고 해도 교만할 것도 없고, 나는 알아주지 않는  은사라고 의기소침할 것도 아닙니다.  다 성령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를 주님의 사역에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와 손잡고 일생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살아계신 성령님, 예수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어주신 성령과 동사하고 동역하셔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14:26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경을 읽게 되고, 또 연구하게 되고, 그 말씀이 오늘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능력 있는 검으로 사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증거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찍이 약속해주셨습니다.  요엘2:28에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사모하시며 소원해야 합니다.  빌2:13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오래 믿은 성도들, 장로교회의 오랜 전통 속에서 바르게 믿겠다고 다짐하시는 이들은 복음주의 지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주의 지성인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를 내가 이기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갈5: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가운데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시면서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함이요, 모두 다 한 성령님의 역사임을 아시고, 우리 모두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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