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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하보다 귀한 목숨 (마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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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다 귀한 목숨 (마 16:24-28)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서는 한 해에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살은 전쟁보다 더 무서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 사망률이 4위이며, OECD 29개 국가 중 22개 국가는 자살 사망률이 감소추세이나, 우리나라는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여 최근 20년간의 자살 사망률의 증가속도는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또한 통계청에 의하면 청소년의 사망원인으로 자살이 2위라고 합니다. 이렇듯 생명경시의 풍조가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때, 오늘 본문의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는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저마다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즉시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따르고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대단히 기뻐하시며 그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 신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떤 분이시냐? 그 분이 어떤 일을 하셨느냐? 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등의 분명한 깨달음을 통하여, 비로소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수 년 간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직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며,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이 신앙고백이 있기 전 까지는, 신앙생활의 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자들은, 그 입술로 고백한 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약점은, 우리의 신앙고백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여 말만하는 사람이라는 둥,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둥, 따지기를 좋아하고 말을 잘 한다는 둥, 나아가서 믿는 사람이 더한다는 식으로 비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그룸’이라는 종교교육 학자는, 믿음의 내용을 세 가지 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백하는 행위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행위, 둘째, 의뢰하는 행위 즉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행위, 셋째, 순종하는 행위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행위라고 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베드로는 신앙 고백은 아주 훌륭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주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못하리이다.” 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만류하다가 주님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혹독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란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통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말하고,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영광만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여, 십자가의 고난 없이 높은 자리와 영광만 생각하고 있음을 아시고, 이를 엄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자신이 고백한 신앙고백대로 삶을 살지 못하므로 인하여, 주님께 사탄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라는 엄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순종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일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인정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만류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일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결코 악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람을 유혹하지 아니하고, 천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일과 인정 앞에서 우리는 택일을 잘 해야만 할 것입니다. 

자신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여 고난 없는 영광만을 구하고, 또한 인정을 앞세워 십자가 수난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제자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도의 첫 걸음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기 자기를 ‘부인하고’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또한 ‘거절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요구 혹은 유혹을 허락지 않고 물리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의지와 뜻을 부정하고, 또한 자신의 욕구와 육체의 유혹을 허락지 않고 단호하게 물리치는 적극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이전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사탄을 섬겼던 진노의 자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에 원하던 바를 행하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로 인해 죄 용서를 받아 구원받은 지금, 죄의 종노릇하던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한다면, 육체의 죄악 된 유혹과 의지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물리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였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 분에게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자기를 부인 한다’는 말은 “자기 본래의 것에 대한 모든 신뢰를 포기하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매달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려면, 먼저 우리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신뢰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파른 절벽을 지나다가 발을 헛디뎌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다행히 조그만 나무 하나를 붙잡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쌓여 그 나무를 움켜쥐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 살려! 그 위에 누구 없습니까?” 그 때 위에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를 살려 주겠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하나님이 거기 계시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살았다고 생각하고는 “하나님, 빨리 구해 주십시오!”라고 외치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살려 줄 텐데, 먼저 네가 정말 나를 믿는지를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 물론이죠. 나는 주일마다 교회를 나갔으며, 십일조도 했고, 교회 봉사도 했으며, 나는 교회의 집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내 말대로 하라고 하시고는 “네가 움켜쥐고 있는 그 나무를 놓아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소리 지르기를 “거기 다른 사람 없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이시며,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도,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나무는 무엇입니까? 그 나무를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에 내 인생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 리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때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붙잡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에,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중요한 요소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만히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권리’는 주장하면서 ‘자기의 의무나 책임’은 소홀히 여기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도 보여 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많은데,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바라는 삶은 등한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맡기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가 져야만 합니다. 그 십자가를 바로 질 때에 영광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나 힘들고 아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을 때에, 주님은 부활의 영광을 맛보셨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우리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함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 하나님이 반드시 위로하시고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이든지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십자가를 바로 질 수 있는 강한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의 꿈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너무나 힘들어서 톱으로 자르면서 갔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했는데, 한참 후에 큰 강이 나왔고, 그 건너편이 축복의 땅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다리가 없는데, 소리가 나기를 너의 십자가로 강을 건너라고 하기에, 십자가를 다리삼아 걸치니 자신이 자른 만큼 모자라서 한없이 울다가 깨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만 의뢰하십니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십자가를 바로지고 예수님을 따릅니까? 좀 더 힘차고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 나태하거나 뒤쳐지지 말고, 더욱 더 앞을 향하여 도전하며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생즉사, 사즉생’ 이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최고의 역설 법이자, 생명에 대한 최고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결국 생명과 진리의 언저리만을 맴돌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가는 비밀의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생명이 지니는 최고의 가치와, 그 절대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주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를 올바로 판단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인생은 판단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나서 죽을 때까지 매순간마다 판단과 결정을 내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모두가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한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그 순간 무수한 판단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물건을 구입할 때, 지불할 돈의 가치와 구입할 물건의 가치를 순간순간 비교하면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하루를 살아가거나, 사업을 하는 등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소중한 자원을 무엇을 얻기 위해 투자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보면 이해타산에 대단히 밝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리 속은 참으로 컴퓨터처럼 빠르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불행한 일은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계산과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판단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생명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반면,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는 생명마저도 불사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결국 ‘헛되다’라는 한마디의 탄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한 번밖에 없는 귀중한 인생을, 결국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위해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진정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에게 참된 영광과 축복을 주신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한 그릇의 팥죽을 위해 장자 권을 팔아버린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세상의 헛된 것들을 위해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반대로 하늘의 것들을 위해, 잠시 있다 사라질 우리의 모든 삶을 투자함으로써, 영생과 영원과 영광을 얻는 참된 성공 자, 참된 영적 지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7절을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자신이 마지막 때 아버지의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그 날이야말로, 모든 인생들에 대한 완전한 회계가 이루어질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이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는 어떠한 의미에서 교훈과 소망이 되고 있습니까?

옛날 어느 시골마을에 가난하였지만 성실한 의대생이 여름방학을 맞아 서적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하였기에 방학 동안에 학비를 벌려는 것이었습니다. 허기지고 기진맥진하고 너무 목이 말랐습니다. 어느 집에 갔더니 미소를 지으며 한 소녀가 나왔습니다. 물을 한잔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시원한 우유를 한 잔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습니다. 그 의대생은 한 컵 더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소녀는 웃으면서 한 컵을 더 가지고 와서 주었습니다. 그 의대생은 책을 팔다가 지친 터에 시원스럽게 목을 축일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 의대생이 의사가 되어 일하는 병원에 한 여인이 응급 수송되었습니다. 그가 외과 과장인데 그 여인의 수술을 맞게 되었습니다. 퇴원을 앞두고 입원비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담당 간호사가 치료비를 낸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내밀었습니다. 이미 계산이 끝났으니 나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수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우유 두 컵으로 모든 진료비 계산이 대체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우유 두 컵을 주었던 소녀였습니다. 희생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속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배들이 흘린 순교의 피와, 고난 속에서도 순수하게 믿음으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헌신과 봉사, 기도, 전도, 충성은 그대로 믿음의 씨앗이 되어 우리 후손들이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더욱 아름답게 믿음으로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목숨 곧 생명의 가치, 영혼의 가치는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이고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귀중한 생명 곧 영혼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명 곧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을 추구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며, 짧은 금생이 아니라 영원한 내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이 있을 지라도 절대로 생명 곧 영혼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 영생을 얻어서, 결국은 모든 복을 세세무궁토록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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