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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 속에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 (암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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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 (암 2:6-16)

아모스서는 모두 아홉 장이고 그 구조는 8:3:5:5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8:3:5:5가 무엇이냐? 8은 아모스서가 여덟 나라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했다는 의미이고 3은 아모스의 세 편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며 5는 다섯 개의 환상, 또 5는 다섯 가지 회복의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드고아의 목자인 아모스는 1장과 2장에서 이방 여섯 나라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모스가 이방 여섯 나라에 대해서 메시지를 증거할 때 이방 사람들은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모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아모스가 증거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듣겠습니까? 이방 사람들은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방 여섯 나라에 대한 메시지도 궁극적으로는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시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방 나라의 죄악까지도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유다와 이스라엘도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라는 의미에서 이방 여섯 나라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방 나라의 죄는 주로 “비인도적인 죄”(inhumanity)였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서 인간답지 않은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이방 여섯 나라를 책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죄는 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선한 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지키지 않은 것이 유다의 죄였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증거하는 핵심적인 대상인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는 이방 나라의 죄와 유다의 죄가 혼합된 형태였습니다. 유다의 죄가 뿌리가 되고 이방 나라의 죄가 열매가 되어 뿌리와 열매가 공존하는 나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좋은 뿌리와 좋은 열매가 공존하면 좋겠지만 북 왕국은 좋지 않은 뿌리와 좋지 않은 열매가 공존하는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런 형태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 역사 가운데도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침례교단의 역사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에서 아모스의 말씀이 현대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Ⅰ.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목”은 무엇인가? 

 아모스 2장 6-16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죄를 일반적으로 송사하는 것이고 3장 이하에서는 좀 더 세밀하고 자세하게 송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 2:6) 은을 받으려고 의인을 팔고 신발 한 켤레를 받으려고 궁핍한 자를 팔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은이나 신발 한 켤레를 얻기 위해서 정의도 희생시키고 인간 생명의 가치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은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돈을 그 가치 이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죄입니다. 돈 때문에 정의를 희생하고, 돈 때문에 양심을 팔아먹고, 돈 때문에 가정을 희생하고, 심지어는 돈 때문에 신앙마저 팔아먹고, 돈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돈 때문에 온갖 인간의 생명조차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 나왔던 축구 승부조작에서 보듯이 축구선수들이 돈만 주면 누구한테 지든지 이기든지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돈만 받으면 스포츠 정신이나 페어플레이 같은 것은 희생시켜도 좋다는 것 아닙니까? 

최근에 참으로 경악할만한 사건은 나이지리아에 아기 공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처녀들을 감금시켜놓고 강제로 임신시킨 후 낳은 아이들을 밀매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악할 만한 사건입니다. 돈 때문에 인간의 생명도 아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물질숭배”(materialism)의 죄인 것입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하면 우상이 되어 하나님께서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7절 전반의 죄는 “약자를 억압하는 죄”(oppression)입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하며” (암 2:7)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 보면 “가난한 자의 머리를 밟는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도 “trample on the heads of the poor” 가난한 자의 머리를 밟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를 억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약자 편에 서야 되고 약자를 위해줘야 됩니다.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죄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잠 14:31) 주님을 존경하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7절 후반의 죄는 “성적인 부패의 죄”(sexual immorality)입니다.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암 2:7) 부자라고 하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 즉, 창기에게 다닐 정도로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제대로 된 하나님이 맞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8절의 죄는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하는 “뻔뻔스러움”(brazenness)의 죄입니다.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암 2:8)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전당 잡은 옷을 돌려주지 않고 그것을 깔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보면 가난한 사람의 옷을 전당 잡아 돈을 빌려주었으면 저녁이 되어 돈을 못 받더라도 옷은 돌려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옷이 이불입니다. 밤에 잠을 자려면 이불을 덮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돈을 못 받아도 사람을 얼어 죽게 하는 것보단 돈 못 받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당하게 돈을 벌었으면 공익을 위해 써야지 술 먹고 향락에 사용하는 것이 신앙인이 할 짓입니까? 하지만 이것이 나쁜 짓인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굴에 뭘 깔았다고 합니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계속해서 나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뻔뻔스러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뻔뻔스러운 사람과 상종하거나 친구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10절의 죄는 “감사치 않는 죄”, “배은망덕의 죄”(ungratefulness)입니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였고” (암 2:9-10)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것은 출애굽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생활과 가나안의 정복 이 세 가지는 옛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백성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노예에서 해방된 것도 이스라엘 백성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고 산 것도 이스라엘 백성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도 이스라엘 백성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는 칠족이 이미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대표자가 되는 아모리 족속은 키가 백향목 같이 엄청나게 크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을 쫓아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치 않는 죄”, “배은망덕의 죄”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죄 중에서도 뿌리에 해당되는 죄가 감사치 않는 죄입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 1:22)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죄인 것입니다. 
 
11-12절의 죄는 선지자와 나실인을 핍박한 “핍박의 죄”(persecution)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암 1:11-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 선지자나 나실인들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나실인들은 세 가지를 하지 않는데 첫째,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둘째, 시체를 만지지 아니하고 셋째,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나실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에게 바른 예언은 하지 말고 재미난 이야기만 하라고 합니다. 또 나실인들에게 술이나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목사에게 성경말씀 설교하지 말고 재미난 이야기만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모스 7장 12-13절에도 벧엘의 제사장인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말합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암 7:12-13) 우리나라에서는 떡이 아니라 엿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에게 너는 엿이나 먹고 여기서 예언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핍박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물질을 숭배하며 약자를 억압하고 성적으로 부패하고 뻔뻔스럽고 배은망덕한 이 모든 죄들은 이방 사람들이나 저지르는 죄인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죄에 빠져 하나님의 인내심이 극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지도 못하고 읽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심각한 죄들의 근본 뿌리입니다. 요즘 젊은 아이들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부부냐고 물어본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아이들 중에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하면 네 가지 정도 외우는 아이들이 40%도 안 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자 그것이 뿌리가 되어 도덕적인 죄들이 저절로 맺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무엇인가? 

아모스 2장 13절은 지진심판의 징벌에 관한 내용이고 14-16절은 지진심판의 결과입니다.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암 2:13) 수레가 곡식을 가득히 실으면 무겁겠습니까? 가볍겠습니까? 무거울 것입니다. 무거운 수레가 길을 누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갈라지는 심판을 두 글자로 하면 지진입니다. 

아모스 1장 1절에도 아모스가 지진 2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증거하고 2년 후에 지진이 온 것입니다.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 (암 6:11) 여기서 집들이 갈라지고 터진 것도 지진 때문인 것입니다. 지진이 나면 몇 만 명 죽는 것은 기본입니다. 지진 중에서도 좌우지진이 있고 상하지진이 있는데 상하지진은 땅이 갈라지면서 위에 있는 것이 안으로 다 들어가 버립니다. 로마제국 시절에도 이 지진 때문에 로마제국이 건설해놓은 어마어마한 문화들이 다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2:14-16) 

이 말씀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속도(speed)가 빠른 사람이고 둘째, 힘(strength)이 있는 사람이며 셋째, 활을 잘 쏘는 기술(skill)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그리고 힘이 세고 활을 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진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속도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힘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기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모두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데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무관심함으로 인하여 갖가지 죄악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지진이라는 무서운 죗값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Ⅲ. 침례교 역사 속에 되풀이 된 동일한 현상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침례교단의 역사 속에도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기독교 한국 침례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한국 침례회는 미국의 남침례교(Southern Baptist Convention, SBC)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남침례교는 44,000개의 교회와 1,660만 명의 성도가 소속된 개신교 최대의 교단입니다. 
 
그런데 이 SBC가 지난 3-40년 동안 갖가지 신학적 논쟁에 휩쓸렸습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 혹은 출판사, 선교회와 같은 기관들에는 보수적이지 않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61년 랄프 엘리오트(Ralph Elliott)라고 하는 신학교 교수가 창세기 주석을 출간하여 교회에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읽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11장까지는 신화이고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해설한 것입니다. 목사들이 이 책을 보고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69년에 침례교 출판사인 선데이 스쿨보드 오늘날은 라이프 웨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열두 권의 브로우드맨이라는 주석을 출간했습니다. 여기서도 창세기 주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 현상에 불과하고 이 사람들이 점점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책을 저술하고 성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신학교와 출판사를 장악하니까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교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1976년 교단장악 10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휴스턴의 평신도이면서 판사였던 폴 프레슬러(Paul Pressler)와 나중에 침례교 총회장이 된 페이지 패터슨(Paige Patterson) 이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교단 장악 10개년 계획을 세웠고 W. A. 크리스웰(W. A. Criswell)이라고 하는 목사님과 아드리안 로저스(Adrian Rogers) 같은 근본주의 목회자들이 동조했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79년 멤피스의 벨뷰 침례 교회 목사인 아드리안 로저스(Adrian Rogers)가 총회장에 당선되면서 미국 남침례교는 교단 전체가 다시 보수적인 방향으로 회귀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신학교와 교단기관에서 대거 추방되었습니다. 

미국 남침례교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다 쫓아냅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수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어도 쫓아내기가 대통령 탄핵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도 그대로 존재하게 되었는데 미국 남침례교는 모두 쫓아낸 것입니다. 결국 남침례교는 다시 성경을 중시하는 교단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자신은 근본주의 신학보다 더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개신교에 합당한 정통신학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근본주의가 싸우면 그래도 근본주의 편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성경을 우습게 여기지만 근본주의는 그래도 성경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유주의자들이 교단에서 나가버렸습니다. 

1991년에 협동침례교단(Cooperative Baptist Fellowship, CBF)이 SBC에서 약 1,900개 교회를 이끌고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CBF는 성경에 대한 존중심이 SBC보다 약합니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목사도 있고 동성연애자를 목사로 안수하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낙태를 허용합니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에는 대한민국 형법으로도 낙태가 허용됩니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면 우선 산모를 살려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데도 낙태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만 부르느냐고 하면서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자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서의 오류가 없다고 믿는 것은 성경을 우상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존중하고 사랑하자는 것이지 성경 자체를 놓고 절하거나 우상숭배하자는 것입니까? 


결론 

이렇게 성서에 대한 자세가 틀어지니까 온갖 도덕적인 타락과 부패와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1992년 남침례교 총회장을 지낸 모리스 채프먼(Morris Chapman) 목사는 모든 논쟁과 분열의 뿌리는 성경이 정확하고 신뢰할만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약화시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평화로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진리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무시하고 약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패망으로 가는 근본원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온갖 도덕적인 타락과 부패의 근본 뿌리는 성경 멀리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성경만 사랑하고 성경을 늘 가까이하고 읽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면 죄가 멀어지고 성경을 멀리하면 죄와 귀신이 가까이 온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멀리하십니까? 그렇다면 죄와 귀신이 가까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가까이 하면 죄가 멀어지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칠십 배 붙어도 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해도 나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들을 거두어 가시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아모스서의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들을 잘 지키고 증가시키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주무실 때 성경을 안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읽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도전 골든벨을 울려라” 성경퀴즈대회를 여는데 오늘 문제집이 나왔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여름에 하느냐? 여름에 신앙이 나태해지기 쉽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으시고 상도 타시고 축복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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