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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와의 복권(復權) (창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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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의 복권(復權) (창 3:17-21)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 근본이 바로 서야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골방 문을 열고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가 주님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고백은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갈릴리 출신의 한 사내가 주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인류’였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가 오늘을 기념하는 것은 그 최초의 자리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주님이시다’. 이 한 마디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다른 것들을 ‘주lord’로 섬깁니다. 

성령강림절인 오늘은 또한 감리교회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특별한 날을 정하여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환경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반증해줍니다. 엊그제 신문들은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코끼리의 난동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식지를 잃은 코끼리들이 먹을 것을 찾다가 도심에 들어와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호주에서는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해 메탄가스를 많이 방출하는 야생 낙타를 대규모로 죽이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합니다(한겨레신문, 6월 10일 자 15면). 지금 우리나라의 남부 지역은 이미 장마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지구 도처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우리 삶의 패턴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새로 환경부 장관이 된 분이 이런 모든 문제들은 과학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일들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 우리가 성경을 펼치는 까닭은 삶의 근본이 바로 서야 다른 문제들도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와를 위한 변론

성경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하와입니다. 하와의 이름은 언제나 ‘선악과’, ‘타락’, ‘유혹’과 결부되곤 합니다. 순진한 아담을 꾀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위반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유혹과 하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하와는 요즘 말로 팜므 파탈(femme fatale, 남자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운명의 여인)이 아닙니다. 하와는 솔직합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자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며 자기 잘못을 시원하게 시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라며 장황하게 변명했던 아담보다는 훨씬 쿨해 보입니다.

어느 여성 신학자는 우스갯소리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단단한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보다는 뼈가 들어간 도자기 본차이나(bone china)가 더 단단하듯이, 흙으로 만들어진 남자보다는 뼈로 만들어진 여성이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살고, 고통을 견디는 힘도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와라는 이름의 깊은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란 뜻의 하야(hajja)에서 유래된 단어(라틴어 Eva)로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학자는 그 이름이 고대 히타이트 족의 천둥신의 아내인 헤바Heba와 연결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와에게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영예스러운 호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만 창세기에는 창조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혼돈과 위협을 극복하는 강인한 전사(warrior)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에게 축복을 겸해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1:28) 

여기서 사용된 ‘정복하라rada’는 단어는 ‘힘을 행사하라’는 뜻이고, ‘다스리라kabas’는 단어는 피정복민을 다스리듯이 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단어에는 ‘돌봄의 책임’이 내포되어 있다는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존재의 위계질서가 엄연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예술가입니다. 물이 솟아서 땅이 젖자 하나님은 그 보드라운 흙으로 사람을 공들여 빚으시고는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명체’라고 번역된 nepes hayya를 개역성경은 ‘생령’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이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다를 바 없는 ‘생명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창세기 2장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동양적 사유를 닮은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와에게 부여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성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 타락, 땅의 신음

타락 이야기를 전하는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어려움과 보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결국은 땅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여성들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수고를 해야 하고, 남성들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나는 땅을 개간하며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정말 면목이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땅이 사람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신화적으로 들리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적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풍요의 신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땅이 신음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초록별 지구를 위해 인간이 기여한 바가 무엇일까요? 어느 목사님은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아주 늦은 시간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인간은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저녁 무렵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많지 않지만 자비로운 주인은 그의 필요에 따라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거저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은혜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늦게야 들어온 인간이 그 포도원을 다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아가2:15)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꿀벌들이 집단 폐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원인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지구에 있는 식물의 1/3은 곤충이 꽃가루를 옮겨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매화蟲媒花입니다. 꿀벌의 죽음은 결국 인류에게 심각한 식량난을 가져올 게 분명합니다. 구제역 파동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에 묻었던 가축들의 침출수가 지하수를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공포가 심각하고,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파헤쳐놓은 강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가공할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 네이멍구 지역에 사는 몽골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몇 년째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푸석푸석해지고 풀들이 잘 돋아나지 않아 가축들을 먹일 것이 없어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상대대로 풍요로운 초원에 의지해 살던 유목민들의 문화와 삶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몇 년째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지만 그 땅 어딘가에 세상을 푸르게 하고 싶은 우리의 꿈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옵니다.

저는 몽골이라는 광활한 땅 가운데 바트슘베르, 바양노르, 아르갈란트에 조성되고 있는 ‘은총의 숲’을 생각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무덤을 생각합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눈을 감자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막벨라 굴을 아주 비싼 값에 사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라의 주검을 정성껏 모십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매장지가 있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 어느 곳을 떠돌고 있더라도 항상 그곳을 기억해낼 수 있었고,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던 주님의 약속을 상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에 묻은 것은 아내의 시신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었던 셈입니다. 몽골에 조성되고 있는 ‘은총의 숲’은 황폐하게 변해가고 있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였는지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자원 고갈, 생물종들의 죽음, 대기 오염, 오존층 파괴, 원자력의 공포, 기후 변화 문제 등은 우리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지구적 위기의 징후들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생명의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 살림의 원리

지금은 ‘하와’가 복권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의미하듯이, 하와는 생명을 북돋고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와는 곧 ‘여성적 원리’입니다. 남성들이 주도해 온 세상은 지배, 정복,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처음 만나 제일 먼저 하는 게 서열 정하기입니다. 나이, 학번, 군번 따위를 묻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지만 요즘은 “어디 사세요?”라고 묻는답니다. 사는 곳과 그 사람의 경제력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남자들만 사는 세상이 있다면 여러분 거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여성들의 문화는 배려, 공감, 보살핌, 양육, 협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여성들을 그런 역할에 고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들은 계급적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일은 자비의 심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훨씬 가깝습니다. 

어느 여성 시인은 아기를 낳은 후 젖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했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과 수시로 찾아드는 오한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곁에서 밤새 뜨거운 찜질로 젖망울을 풀어주려고 굳었던 가슴을 쓸어주시며 기도하시더랍니다. 어머니의 땀이 시인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고,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뭔가가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딸의 가슴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성’을 불러낸 것입니다(나희덕의 <해빙>을 풀어서 적다). 

이런 기적은 여성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여성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에는 데도 익숙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생명 이야기, 환경 이야기를 하면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대개 여성들입니다. 남성에 비해 다른 생명의 욕구와 필요를 잘 알아차리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겁니다. 남성 교우 한 분이 아들과 5분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데, 아내는 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하더군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수용력은 남성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다른 의미의 ‘하와’ 즉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임을 믿기에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주의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덜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탐욕을 부추기는 이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의 독립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홀로는 갈 수 없는 길이기에 그런 자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연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생명 살림’과 ‘평화 만들기’야말로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아름다운 꿈이 백일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이 개인적인 쾌락과 만족이라는 환상을 뛰어넘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가히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현자가 태어나면 그 근방에 있는 강물은 더 맑아지고 식물들과 산의 나무들은 더 푸르러진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생명 살림의 일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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