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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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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요즈음 윤리가 땅에 떨어진 모습을 풍자하는 유머하나 소개합니다. 요즘은 가정에서도 아내의 힘이 더 센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듯 싶습니다. 어느 병원에 아내에게 손찌검을 당해 치료를 받으러 온 남편들이 함께 모여 신세타령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어쩌다가 아내에게 구타를 당했는지에 대해 각각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의 남편들이 털어놓았습니다.

40대 남편: 나는 어제 밤에 술 먹고 들어와 아침에 일어나서 wife에게 해장국 끓여 달라고 했다가 이렇게 됐지 뭡니까!

50대 남편: 나는 친구들과 계모임으로 외출중인 아내에게 어디에 있냐고, 언제 들어 오냐고 전화했다고 이렇게 됐다오.

60대 남편: 나는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가 이렇게 됐지요.

70대 남편: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장국 끓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계모임으로 외출중인 아내에게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언제 들어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아내에게 손찌검을 당했다오.

50대 남편: 그럼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습니까?

70대 남편: 눈 앞에서 얼씬거린다고 이렇게 혼났지요.

80대 남편: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장국 끓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계모임으로 외출중인 아내에게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언제 들어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외출 준비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눈 앞에서 얼씬거리지도 않았는데도 혼났지요.

40대 남편: 그럼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습니까?

80대 남편: 아침에 일어나 눈 떴다고 이렇게 됐지요.

하나 더 소개합니다. 앞집 암닭은 알도 잘 낳고 꼬꼬댁 울음소리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집 수닭은 날마다 그 암닭을 두둘겨 팼습니다. 이웃의 닭들은 몹시 의아해 했습니다. 왜 맨날 저렇게 이쁜 암닭을 패는 것일까? 오랜동안 짝사랑하고 있던 옆집의 수탉이 그 암닭을 불러내 조용히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날마다 맞고도 참고 사는 이유가 뭐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나랑 삽시다.” 그러자 그 암닭이 수탉에게 얻어맞은 눈두덩이를 달걀로 문지르며....“지 ~가 ~유.... 오 리 알 을 낳 았 걸 랑 유” 미가 선지자는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라며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미7:5-6)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미가 선지자의 고발대로, B.C.700년 경 이스라엘은 최악의 부패로 사회가 불신으로 팽배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직 자신의 치부(致富)를 위해서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이용하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신의(信義)가 상실되었고,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의 부패와 타락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 단위인 가정의 파괴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들인 이웃, 친구, 그리고 가족들끼리도 서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심지어 한 이불속에서 잠을 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까지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조차도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부패가 매우 심각하여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우리 가족 관계는 과연 서로 신뢰할만한 것인가?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이며 권위있는 철학자이기도 한 슬라보이 지제크 박사는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합니다. 그에게 ‘이웃’은 근처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웃’은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입니다. 주차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동기, 임금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입니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기 때문에 ‘이웃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웃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삶의 현장,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이웃’이 언제든 ‘원수’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이웃이 비록 원수로 돌변했을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원수가 자신보다 더 잘 될 수 있도록 축복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B.C.845년경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아람은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게 하는 원수같은 나라였습니다. 아람 왕은 이번 공격을 은밀히 진행하기 위해 비밀 작전계획을 세우고 보안유지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그리고 작전대로 비밀히 잠입해서 이스라엘이 꿈에도 생각못할 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이스라엘 군대가 그곳에 정확히 기습 공격하여 아람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아람 왕은 기가 막혔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곳에 진칠 것을 알았을까? 아마 우연이었겠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좀 더 철통보안으로 작전을 짜서 공격하도록 하자’ 그래서 왕은 모든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비밀리에 공격할 곳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 군대의 공격루트를 알고 미리 와서 지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아람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배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빈번히 아람 군대가 가는 곳마다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람 군대는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보안을 아무리 철통같이 세울지라도 물새는 듯 새버리는 바람에 아람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참모들을 불러모아 추궁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참모 하나가 ‘왕이시여,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말하는 것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모두 일러바치고 있습니다.’ 며 작전 보안의 실패 원인이 엘리사에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아람 왕은 즉각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엄청난 병력을 보내 그 밤으로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 보니 수많은 말과 전차를 갖춘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엘리사에게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하고 두려워 외쳤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는데 그가 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람 군대가 공격해 올 때 엘리사가 “하나님이시여, 저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일순간 눈뜬 장님이 된 아람 군대에게 엘리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길을 잘못 들었다. 이 곳은 너희가 찾는 성이 아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안내하여 너희가 찾는 그 사람에게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통째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갔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이시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아람 군대는 사마리아 성 안으로 끌려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무기 하나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생포당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자신이 손 하나 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굴러들어온 아람 군대를 보고 엘리사에게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라며 원수같은 적군을 몰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건 안 됩니다. 칼과 활로 생포한 전쟁 포로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그들의 왕에게 돌려보내십시오.” 라며 원수에 대해 선으로 갚으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왕이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자 실컷 먹고 마신 다음 아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아람 군은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는 원수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로마서12:17-21을 보겠습니다.

(롬12:17-21)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참조:(잠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엘리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았습니다. 엘리사는 원수를 자신이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엘리사는 ‘원수가 주리고 목마를 때 먹이고 마시우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성도가 원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가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베푸는 방법입니다. 은혜를 베풂으로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렇게 행하여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아람으로부터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베드로 전서3:9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반면, 한반도의 북괴는 그들의 악행에 대해 선으로 갚아주어도 도리어 악을 쏟아 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만행을 남한의 조작극이라며 뒤집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악에 대해 은혜를 베풀어도 자신의 악행을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아예 기대조차 하기 힘든 도당들입니다. 참으로 원수치고는 인간말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베풀고 은혜를 베풀지라도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아무리 놓아도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를 회개하거든 용서하되(은혜를 베풀되) 하루 일곱 번이라도 죄를 범하고 일곱 번 회개하면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은혜를 베풀되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회개하거든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눅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원수를 갚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W. 헌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단의 방법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는 하나님의 수준으로 성도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을 때 하나님의 아들과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눅6:27-35) 

오늘 본문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축복을 누리려면 원수마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악을 선으로 갚는 삶,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이 가장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 하기 때문에 유명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루스는 결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결혼이란 용서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다.” 가정에 용서가 있을 때 그 가정은 얼마든지 행복한 가정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자라나고, 부부가 서로를 세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매듭이 묶인 줄다리기와 같습니다. 서로 잡아당기면, 매듭이 더 강하게 조여 들어서 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쪽이 놓으면, 풀릴 수 있습니다. 한쪽 줄을 놓아버리는 용서가 가정의 매듭을 풀게 합니다. 이웃이든 그 이웃이 원수로 변하든 그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고 잘 되도록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아담과 하와가 사탄에 미혹되어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냉큼 선악과를 따먹어버린 죄악을 범했습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창3:6)사탄에 미혹되어 선악과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로마서 8:7 말씀대로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러나 이렇게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원수같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단번에 죽이시지 아니하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었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동물을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하나님의 원수된 인간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를 로마서5:10, 에베소서2:16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동생 아벨을 죽이려는 가인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4:5-7)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나 가인은 동생을 들에서 돌로 쳐죽이고 매장해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창4:9-1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당장에 처벌하시지 아니하고 너무나 관대하게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되는 벌을 주셨습니다. 

(창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런데 가인이 이렇게 가벼운 처벌에도 ‘내 벌이 너무 가혹하여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고 하자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끝까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자기를 배신하여 팔아 넘길 자가 누구인가를 다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베드로가 ‘내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리다.’면서 거절하자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하자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시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13:8-11) 제자에서 원수가 될 가롯 유다가 아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후 마음이 몹시 괴로우셔서 드러내 놓고 제자들을 앞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니라.”(요13:21) 이미 그 가운데 가롯 유다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자신을 두고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에게 두 번째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몰라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내가 빵 한 조각을 찍어서 주는 바로 그 사람이니라.” 하시고 빵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롯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가 그 빵 조각을 받자 예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인 예수를 배신하여 팔아 넘길 일을 속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으면 당장에 무릎 꿇고 회개할 만도 한데 가롯 유다는 그 길로 뛰쳐나갔습니다. 영영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가자.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가까이 왔도다.” 

예수님의 말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많은 무리들과 함께 칼과 몽둥이를 들고 같이 왔습니다. 유다가 ‘내가 예수에게 입을 맞출 테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과 미리 암호를 짜 둔 후 곧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며 예수님께 입을 맞췄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친구야,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서 하라.” 하시자 그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마 26:50) 자신을 배신한 가롯 유다에게 그렇게도 회개할 기회를 수없이 주셨지만 끝까지 자신을 팔아넘기며 가증스럽게 입맞추는 그 유다에게 “친구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에서 원수로 돌변한 가롯 유다에 대해 전혀 보복하시거나 원수처럼 여기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가롯 유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배신할 것을 아시고도 사랑하셨습니다. 
(마26:31-34)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 그러면 원수에 대한 보복은 어떻게 되는가? 끝없는 용서 가운데 베푸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듯이 ‘보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엘 네카모트)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는 말씀, 이른바 “모세의 노래”가 신명기 32장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신32:35) 보복은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It is mine to avenge) 고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타락하여 우상숭배하며 불의하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보복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보복은 내 것이라.”는 말씀은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러므로 보복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라멕’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보복과 복수의 피로 얼룩져 왔습니다.(창 4:23-24)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직접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대신 ‘복수는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94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억울한 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시94:1-3)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불의한 일을 당한 억울한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복수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악한 자들”(미 3:9), 아무리 악한 일을 계속해도 “하나님이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시 94:7),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들을 징벌해서 복수하시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들에게 정의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복수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약한 자들을 대신해서 복수해 주시고, 정의를 실현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피해를 당하고도 호소할 곳도, 보복할 힘도 없는 약자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복은 내 것이라.”고 하신 것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 인간 보복의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공의로 처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보복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보복은 인간의 잘못된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보복은 사랑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실 정도로 인생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 사랑하는 것을 질투하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면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계속 등을 돌리면 그 잘못된 사랑에 대해 보복하십니다. 다윗은 사무엘상24:12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다윗의 신앙을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다윗은 아무리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왕일지라도 하나님께 그에 대한 보복 심판을 맡겼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반면 원수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고 산 다윗과 그 가문은 점점 강하여지고 흥하게 되었습니다.(삼하3:1)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보복은 하나님께 맡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이 여인을 돌로 쳐죽이라 했는데 이에 대한 예수의 판단을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요8: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주여, 없나이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요8:9-11) 

그렇다면, 간음죄를 범한 그 여인의 죄는 어떻게 된 것일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된 것일까? 예수께서 “나도 너를정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그 여인의 죄값을 자신의 십자가에서 치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에서 맡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죄 값을 치루어야만 하는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자신의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을 용서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보여주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복은 십자가의 공의에 맡기고 이웃을 끝까지 사랑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신대로 원수를 사랑할 때 여러분의 삶과 존재 가치가 달라지며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역사하시어 이웃과의 가장 행복한 삶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과 인류 공동체를 구원하시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讐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讐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讐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든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가지고 실제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합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습니다. 

그 청년은 어머니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청년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바로 이 어머니의 심장이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신대로 원수를 사랑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집니다.’ 다시 말해 가장 복된 하나님을 닮은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닮은 삶이 되어 모든 원수가 가장 사랑하는 이웃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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