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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단을 쌓거든 (출 20: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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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단을 쌓거든 (출 20:18-26)


저는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하는 동안에 처음으로 장례식을 집례하게 되면서 '장로교 예식서'와 함께 장례에 관한 일반 서적도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확인하게 된 사실은 우리나라의 유교 전통적인 장례식이 미국의 장례식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복잡하고도 많은 절차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전통적인 장례법에 따른다면, 미국 땅에서 그냥 미국식으로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한인 교포들은 모두가 다 '불효자'가 되고 마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습니다.
  
비단 장례식뿐 아니라 '제사 지내는 법'도 그 얼마나 복잡하게 짜여 있습니까?
제사상에 무슨 음식을 차려야 할지를 조목조목 지정하는 것만 해도 그렇지만, 그런 음식들을 각각 어떤 방향에, 어떤 위치에 차려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도 온갖 까다로운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 전에는 아내가 제사상 차리는 문제로 남편과 다툰 후에 자살해 버린, 실로 어처구니없는 비극까지 발생한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그런 쓸데없는 일에 그토록 신경을 쓰느니보다 살아 계실 때 그런 정성의 몇 분의 일만 부모에게 더 바친다면 정말 효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교가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식으로 하여금 '죽은 부모를 신처럼 모시고 섬기게 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끼친 크나큰 병폐입니다. 
  
자식은 물론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그 부모를 하나님의 자리에 갖다 모셔 놓고 섬긴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직후에 연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 가운데도 가장 기초에 해당되는 법, 즉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법'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 섬기는 법'은 유교에서 가르치는 '부모 제사법'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간단하고 쉬운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어떤 자질구레한 '격식'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진정한 '마음자세'를 중점적으로 강조한 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께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에 과연 어떤 '신령과 진정'의 자세를 요구하고 계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으로 그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본문 18절로 21절에 "18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18절의 내용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짐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가 동반되었습니다.
여기서 "산의 연기"라는 말은 21절에 "암흑"이란 말이 시사해 주듯이 '빽빽한 구름'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성막이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주 나타나셨고, 특히 이 장면에서는 거기에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가 그 출현 배경의 효과 음향처럼 함께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장엄한 장면을 보고 다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강림"을 지척에서 뵙게 되었던 그들은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모세에게 간청할 정도였습니다.
즉 그처럼 두려운 광경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네들이 직접 서게 되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모세더러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말씀을 듣고 자기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어떻게 대답해 주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두려워 말라"고 한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공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원하시는 두려움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고 경외하게" 하기 위하여 강림하셨다고 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두려움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림하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셨다는 것은 곧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달아 보고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연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으로 대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어떤 공포감이 아니라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떠는'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성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경외심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아올 때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와 같은 '영적 두려움'을 스스로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기 전의 우리는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찰서에 잡혀 갈 나쁜 짓도 하지 않았고 자기 딴에는 준법적이며 도덕적이고 꽤 착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즉 사람 앞에서는 아무 부끄러운 것 없다고, 이 인간사회에서는 별다른 하자가 없다고 자타가 공인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테스트'해 보실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기준에 의하여 우리의 인생이 저울에 달리게 될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처럼 더러운 죄인에 불과한 자신이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연히 우리는 그 앞에 두려움으로 벌벌 떨면서 엎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 결과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자신을 더럽히는 죄를 짓지 않아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게 됨으로써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처럼 당신의 거룩하심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범죄치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모나 스승이나 직장 상사를 만날 때에도 긴장하면서 준비하고 윗사람을 존중하는 자세와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뵈옵는 자리에서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아올 때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그 하나님을 높이고 받드는 참된 경외심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혼이 떨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배자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22절과 23절에 기록하기를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리 서" 있는 가운데 혼자 "하나님의 계신 암흑" 즉 '빽빽한 구름'으로 "가까이 나아간"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으면서 또한 이런 특별한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제2계명을 통하여 그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특히 "나를 비겨서" 그 어떤 신상도 만들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비단 우상 신을 섬기는 사람들뿐 아니라 명색이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우상의 형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분명히 엄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불가시적인 당신의 존재'를 '가시적인 우상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서 그 앞에 절하며 섬기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같이 명하신 이유는 그 어떤 이유로 우상을 만들든지 간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믿기 힘들다.'는 핑계로 어찌하든지 그 형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행위는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너희를 위하여" 즉 '사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신상의 형태로 전락시키는 것은 원래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에게는 큰 신성모독인 동시에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만 채우려는 이중의 죄가 될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런 신상 대신에 과연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을 뵈올 수 있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2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므로 너희는 나를 비겨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들은 백성이므로 무슨 눈에 보이는 신상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신이신 당신을 사람에게 나타내고자 하실 때에 결코 어떤 '형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본'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며, 또한 말씀 외에는 다른 어떤 길로도 결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역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요 1:14) 분이 아니겠습니까? 

이같이 명백하기 짝이 없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신상 속에 '가두어 놓고'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초상'이라도 그 앞에 엎드려 절하든지, '십자가 목걸이'라도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기도하는 것은 갈 데 없는 '우상숭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결코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이며, 가시적 존재를 초월해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엄청난 죄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처럼 어떤 '형상' 앞에 절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뵈옵고' 있음을 체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잘 듣고 바로 깨닫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어떤 형상 따위가 전혀 필요할 리가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육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하나님'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높은 어른을 만나러 가서 '얼굴'만 보고 눈인사만 한 후에 돌아선다면 그 얼마나 큰 실례이겠습니까?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만약 단 한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면 그보다도 더 어색한 일은 없습니다.
반면에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도 전화를 통해서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실제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이 선포되고 들려지는 예배 시간이 곧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뵈옵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 예배 시간에 설교하는 목사는 어디까지나 사람이지만, 그 목사가 대언하는 설교는 곧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육성'인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하여 우리 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육안(肉眼)이 아니라 영안(靈眼)으로 하나님을 친히 뵈올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배자는 '제단이 곧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4절 이하 26절의 말씀에 "24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5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화려한 제단을 만들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예배받기 위하여 필요하셨던 제단은 "토단"이라도 충분했던 것이었습니다.
'흙으로 쌓은 단'이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가장 쉽고도 검소한 양식의 제단이었습니다.
또한 "돌로 단을 쌓을" 경우에도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여호수아가 에발산에 쌓은 것이나 엘리야가 갈멜산에 쌓은 그 유명한 제단들 역시 '다듬지 않은 돌'들로 만들어진, 실로 '간단한 돌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단 자체는 간단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단이 되기 위해서 제물만은 꼭 있어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바쳐지는 "번제"라든지,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또 일부는 사람들이 교제하며 나누는 "화목제" 같은 제물들이 필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물'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한 단을 쌓아도 '제단'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비록 검소한 단이라 해도 '제물'이 올려지기만 하면 분명히 '제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비록 '제단' 자체는 쉽게 쌓을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서 '제사를 올리는 사람'까지 해이해져서는 결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는 명령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체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고 불경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제단에는 아예 층계가 없었고 그 대신에 '경사면'을 사용했으며, 나중에 성막이나 성전이 지어졌을 때에는 제사장이 "고의"(출 28:42) 즉 '속바지'를 입음으로써 하체를 가리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정말 중요한 일은 '제단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단 앞에 나아오는 몸가짐을 바로 갖추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이처럼 '제단'이 필요했고 그 위에는 '제물'이 놓여야 했으며 또 그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예배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온전한 제사가 성립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 제단 위에 "강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가리켜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이며 "(내가)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준비하고 스스로의 몸가짐을 갖추는 등 모든 것을 사람 편에서 다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제단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시려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처럼 예비하게 하신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스스로 지정하시고 명하신 대로 준비된 제단에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심으로써 그 제단은 이제 진짜 '복스러운 제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는 바로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축복해 주신다는 것은 실로 사람으로서는 그야말로 '고소원불감청'의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은혜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모여 예배드리는 이 장소, 이 시간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임재해 주시는' 그 엄청난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장인 것입니다.

제단이 어떤 형태로 된 것인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 제단은 한 성도의 집 안방과 같이 아주 쉬운 '토단'일 수도 있고, 건물을 빌려 쓰는 예배당 같이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제단'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제단이든지 간에 거기에 '몸과 마음이 준비된 성도'들이 모여 있고 '정성으로 마련한 제물'이 올려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곳에서 '당신의 이름을 기념하기를' 기뻐하시며 그 예배 시간 내내 임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사람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스러운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우리는 어김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기독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틀림없이 만날 수 있는 축복의 시간과 장소가 항상 자동적으로 예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신자는 소위 '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하는 사이에서 초조해 하는 무당의 처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즉 참된 성도는 예배당에 와서도 소위 '성령이 임했는지 안 임했는지'를 몰라서 소리치며 뒹구는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라고 경건한 자세로 시종일관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향제단에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며 '온전한 예물'로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바로 이 자리에 임재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베풀어 주시는 한량없는 평안과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네가 단을 쌓거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매우 간단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슨 육류, 무슨 나물을 이런 저런 위치로 상에 차려라.'는 '형식'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를 진실로 '경외하는 심령'으로 준비해야 하는 제단입니다.
그것은 '들어올 때 몇 번, 나갈 때 몇 번씩 절을 해라.'는 '외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 교통'이 일어나는 제단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죽은 귀신의 영을 사람이 부르는' 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임재해 주시는' 실로 은혜로운 제단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이런 제단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가 불신자들이 자기네 죽은 부모를 위한답시고 헛되이 쏟아 붓는 정성보다 못하다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예배 시간에는 먼저 죄인인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부름 받고 나아오게 된 감격으로 떨리는 '경외심'이 자신의 인격의 지성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동되어야 합니다.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를 들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성경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통하여 사람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눈으로 목도하듯이 분명하게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야말로 우리 각자가 하늘 아버지를 친히 만나 뵙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축복의 자리인 것을 맛보듯이 실감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제단을 쌓을 때마다 바로 이런 진짜 제단, 이런 온전한 제단, 이런 아름다운 제단을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전에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심령의 기본예절을 갖추고, 말씀을 경청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 보아 알게 되며, 또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교통하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항상 충만히 체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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