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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닮은 사람 (창 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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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닮은 사람 (창 1:26-28)
 

저는 감사하게도, 참으로 감사하게도 4대째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감사하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저는 예수 믿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렇다 할 회의 한번 없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생활을 해왔고 예수를 믿어 왔습니다. 제 인생 전체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예수를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믿음을 빼고 저를 생각할 수 없고, 제 인생을 논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처음부터 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니 그때 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제게 가져다 준 복이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믿음이 저에게 준 은혜와 축복이 무엇일까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지혜입니다. 

말씀 속에서 얻는 삶의 지혜처럼 소중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말씀 속에 길이 있고, 말씀 속에 식이 있고 말씀 속에 법이 있었습니다. 길을 알면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식을 알면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풀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혜가 저의 삶을 승리로 그리고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말씀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한 모든 것은 실패로 끝이 났고, 쉽지 않았지만 믿고 순종했던 말씀은 모두가 다 성공과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수 없이 많은 말씀을 간증 할 수 있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는 말씀이 제게 복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 (Lord) 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이심을 고백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성공이 있을 때마다 그 때가 제게는 위기였습니다. 그때 마다 선악과를 따먹고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사탄의 유혹이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내려옴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려오고 버릴 때마다 혹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인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은 제 삶과 목회의 유일한 철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 6:23)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리라.>(약 1:15) 는 말씀이 제게 복이 되었습니다. 첫 담임목회를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교인 배가 운동이었습니다. 출석 150명 교인을 연말까지 300명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도 중에 물으셨습니다. ‘왜 300명이냐?’ 그때 깨달았습니다. 교인배가 운동이 소명을 가장한 야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자랑하고 내 세우기 위한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야망을 버리고 소명으로만 목회를 해야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실수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 씩 정신을 차리고 야망을 버릴 때마다, 소명을 붙잡을 때마다 성공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마 6:33)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 은혜를 받고 동안교회 시절 동안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기 이전에 먼저 일산 동안교회를 개척했고, 그것이 제 목회 인생에 큰 보람과 의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예배당 건물 없이 길거리로 내 몰리게 되었을 때에도 탈북자와 사회적 취약계층을 돕고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다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이 말씀이 결국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이라는 목회 방향을 결정하게 하였습니다.

얼마 전 정말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우리 교회 청년 결혼 주례를 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자기 예배당이 없어서 다른 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결혼식을 하는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 미안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우리가 건축하려고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성전이 정말 이 근사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아름다운 것일까? 하나님께 떼를 쓰듯 기도하였습니다. 꼭 그렇게 해 주셔야 한다고 떼를 쓰며 기도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고전 13장)

둘째가 대학을 다닐 때 귀걸이를 하였습니다. 둘째가 귀걸이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들었을 때 지금은 저도 참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 ‘사랑은 오래 참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제게 큰 지혜를 주었습니다. 몇 달 정도 참다가 이야기를 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도 무례하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이가 이해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그것을 떼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이 제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릴 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을 ‘하나님의 예의’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정말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그 깨달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가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깨달음이 제게 복이 되었습니다. 막내 아들도 이제 30이 되었는데 아들 셋과 감사하게도 사이가 좋습니다.

말씀은 제게 길이 되었습니다. 일을 결정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게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큰 복이었습니다. 말씀의 지혜들이 제 인생의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평안입니다.

여러 번 설교 중에 예화로 이야기 했던 말씀입니다. 막내가 여섯 살 때 손을 잡고 함께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골목 아래에서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아이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막내가 그 아이를 보더니 제게 일렀습니다. ‘아빠 저 형아가 나 때렸어.’ 못 들은 척 그냥 지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제 막내가 제 손을 뿌리치고 그 아이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그 5학 년 짜리를 발로 차주고 의기양양하게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때 매우 중요한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는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였습니다. ‘골리앗 5학 년, 다윗 여섯 살, 하나님 80키로’ 그것을 통하여 다윗의 유명한 고백들을 그냥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

그와 같은 깨달음이 제게 믿음이 주는 평안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배우고 깨닫게 되니 그것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앞이 캄캄해 지는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최근의 일이 출석 교인 5천 명을 데리고 길가로 내 몰리게 되었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신기하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주는 축복은 평안이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편안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평안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니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게 되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5천 명 교인과 함께 길거리로 내 몰리게 되었을 때,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순간에 제가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한 말 중에 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을 대보라면 ‘망할 자신이 없다’였습니다. 참 건방지기 짝이 없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은 저에게 망할 자신을 없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닮음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프로였는지 어떤 내용들이 방송되었었는지를 다 잊었습니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성공한 남성들의 공통적인 얼굴 표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얼굴이 웃음이 없어지고 평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은 꼭 다물어지고 동시에 조금 앞으로 나온답니다. 그리고 양쪽 입 꼬리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 약간 반달 모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표정이 말하는 것은 ‘나 성공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한데 함부로 까불면 안 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그리고 부끄러웠던 것은 내게도 바로 그와 같은 모습과 표정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텔레비전을 보며 아내가 웃었습니다. 그냥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 갔지만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나온 소위 성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지고 뻣뻣해 져서 인간미가 없어지는 그 공통적인 모습이 내게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조금 아니 많이 속상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저를 닮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다 저를 닮아 둘째 발가락이 깁니다. 그것은 우리 아들들 뿐만 아니라 우리 손녀 셋까지 모두 다 그렇습니다. 눈 두덩, 입의 모양과 사이즈, 두개골 모양 등등 저를 닮은 구석이 많지만 가장 확실하게 닮은 것은 발입니다. 둘째 발가락이 제일 긴 발입니다. 그게 저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제일 기쁘셨습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그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하나님 닮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정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모습과 모양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지혜와 평안에 대한 욕심은 앞으로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보통 세상 사람들이 욕심내는 복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더 잘 믿어 그 지혜와 평안의 복을 더 많이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림으로 구원 받은 사람의 특권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여기서부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욕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다 알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큰 아들 둘째 딸 아이가 커가며 지 애비를 꼭 닮아갑니다. 얼마 전 아이들 홈 페이지에 올라 온 둘째 손녀 딸 사진을 보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얼굴과 표정과 모습과 꼭 같은 지 애비 어렸을 때 사진이 저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희 큰 아들 가족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느 할머니가 그러셨답니다. ‘둘째는 지 아빠 도장을 박았구먼 도장을 박았어.....’ 어느 날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을 빼다 박은 사람’ ‘하나님 도장을 박은 듯 한 모습을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그리고 잘 믿으면 그 본래의 모습이 되 살아나겟지요? 생각과 마음과 정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얼굴에서 조차 사람들이 그 모습을 찾아 낼 수 있겠지요. 

제가 이제껏 받은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제 아이들이 제게 해 준 평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는 치열한 삶의 투쟁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품고 예수를 위하여 늘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내가 죽은 후 묘비에 새겨 주었으면 좋겠다 싶으리만큼 감사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더 욕심이 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특히 내 아이들이 나를 생각할 때 나를 ‘하나님을 닮은 사람’ 으로 기억해 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점점 더 생각과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속 모양 뿐 아니라 겉모습까지 바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에 반듯하고 옳으면서도 입 꼬리가 올라가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욕심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정말로 잘 믿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혜의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지혜로 모든 일에 승리하시고 성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의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확신하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도 늘 푸른 초장에 누운 사람처럼, 쉴 만한 물가에 놀러온 사람처럼 평안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절망적인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세상 속에서도 늘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망할 자신이 없어서 늘 평안한 그런 삶을 복으로 누리며 사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모두다 하나님을 닮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닮고, 정신이 하나님을 닮고,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가다가 삶의 태도와 표정과 자세까지, 삶과 생활속에서 풍겨나는 냄새까지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많은 말씀 중에 오늘 말씀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내 본래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앞으로 몇 년이나 이 세상에서 살 시간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여 더 부자가 되고, 더 성공을 하기 위하여 살아가지 아니하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더 닮아가기 위하여 애쓰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 복을 받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 복을 사모하다가 다 이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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