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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접붙이신 하나님의 은혜 (롬 11: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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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접붙이신 하나님의 은혜 (롬 11:13-24)


사도 바울은 본문 첫 절에서 말한 대로 비록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며 자기의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관심 또한 지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마음을 이미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숨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9:1-3에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10:1-3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으며 10:16 상반절에서도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계속되는 11장에서는 이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족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림받은 것인가?” 하는 물음을 먼저 던집니다. 물론 바울이 준비하고 있었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에서 그는 쓰기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전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통째로 모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보라 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의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열심히 전하며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시던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통째로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통째로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한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예로서 선지자 엘리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듭니다. 11:2-5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왕상19:10)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왕상19:18)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의미를 설명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11:6을 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일 행위를 보시고 선택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 뒤에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제시하신 “오직 믿음에 의한 의”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그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 데 반해,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신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선택받은 남은 자들 외의 모든 유대인들은 우둔하여져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1:7-10을 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사29:10; 신29:4)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시69:22 이하) 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신분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보장해주는 것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구원은 사람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달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11:1에서 던졌던 물음과 같은 뜻의 물음을 다시 한 번 던집니다. 그리고 그 답 또한 여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1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많은 유대인이 실족하기는 했지만 모든 유대인이 완전히 다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일부 유대인은 남겨놓으시며 다른 자들은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1 하반절)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사도들로 하여금, 특히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열렬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사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도 결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완전히 버림받은 백성이 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실족한 것이지 전적이고 결정적으로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자기의 숨은 믿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심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고 믿는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들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충만해진다면 얼마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이방인을 유대인이 시기하게 해서 결국은 자기 동족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 자기가 열심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유대인이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렇게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의 실족의 긍정적 의미를 제시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 다른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받는 결과 즉 하나님과 화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에 매달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다 죽은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시게 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의 뜻은,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쁜 일이 생겼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이나 더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뜻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 즉 부활의 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가 주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이 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회복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사도 바울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민15:20-21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 때 떡반죽에서 일부를 떼내어 과자를 만들어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받은 족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떡덩이”와 “가지”는 누구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거룩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 속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을 일방적으로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권고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그들 스스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해지면 바로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과 꼭 같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관심이 자기 동족으로부터 다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로 갑자기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이라 한 것은 “너희가 만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이란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을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잊지 않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면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함께하시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본래 돌감람나무에 붙은 가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나무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찍혀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람나무에 접붙여주신 하나님에 은혜에 겸손함과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응답하는 한국교회가 되어 하나님나라의 건강하고 튼튼한 가지로 영원히 남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 기도하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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