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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자 (창 1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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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자 (창 13:1-18)
   
로마 바티칸 궁에 ‘피에타’라는 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인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이 저미는 아픔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3년간에 걸쳐 조각한 작품입니다. 

피에타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교황과 여러 추기경과 귀족들이 피에타 제막식에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에타 상에 압도 되고 말았습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예술가요’라고 치하했습니다. 교황의 치하에 미켈란젤로는 ‘교황 성하, 피에타상은 제가 조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신이 이미 대리석 덩어리 안에 만들어 놓으신 피에타상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곁에 붙은 부스러기를 제거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에타’는 ‘경건한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피에타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말을 빌려 ‘경건’이라는 말을 해석해 보면 ‘온갖 죄와 탐욕으로 얼룩진 모습을 닦아내고 다듬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담아 두신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경건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경건의 시간을 가져보려 하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잡념을 털어버리고 집중하는 일마저도 몹시 힘겨워합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우리 중에 바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직접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고,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경건으로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 했던 경험을 듣는 것이 약간의 유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경험을 듣는 것 자체로 자신의 몸이 단련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몸의 단련을 위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경건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듣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손에 쟁기를 잡은 자’라는 제목을 설교를 드릴 때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았던 롯’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중심으로 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를 경건의 훈련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많은 양과 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양과 소가 너무 많아지자 가축을 지키는 목자들이 좋은 목초지와 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 일로 아브라함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 목자와 롯의 가축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즉 이방인들이 함께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재산 문제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모습이 이방인들에게 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가족끼리 다투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덕이 되지 않으니 독립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오른쪽을 선택하면 내가 왼쪽으로 갈 것이고, 네가 왼쪽을 선택하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선택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그 선택이 그들의 미래를 축복과 멸망으로 갈라 놓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이전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롯보다 더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도리어 아브라함의 연약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심한 기근이 든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물어 보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또한 애굽에서도 위험에 처하자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 하고 아내 사라를 바로왕의 침실로 밀어 넣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바로 왕으로 하여금 사라를 범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만 아브라함이나 그의 조카 롯이나 온전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4절에 보면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헤어지자고 제안하는데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화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하는 모습은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던 이기적인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18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르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더라’ 말씀합니다. 자신이 거하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평안만을 위했던 신앙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위한 신앙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감을 볼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자신의 약함과 욕심, 거짓을 닦아내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조금씩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유약하고, 참을성이 없고, 이기적인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숙해 지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이하에 보면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띠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띠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반면에 롯의 모습을 보면 그에게는 경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선택하는 기준이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은 행복이 보장된 곳처럼 보였습니다. 롯은 그 곳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롯이 처음부터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해서 그곳으로 들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롯이 선택한 것은 풍요해 보이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12절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요단 동쪽의 도시들에 머물며 조금씩 조금씩 이동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물질과 향락의 세계로 조금씩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면서 향락의 대명사인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향락과 악에 빠지는 우리들이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이 물질의 풍요와 향락을 추구하다가 결국 흘러 들어간 마지막이 소돔입니다.   13절에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세상의 문명이 꽃을 피우고, 즐거움과 향락이 있었지만 성경은 소돔을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물질이 풍부하고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롯은 소돔이 그러한 도시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한 도시이고, 매력 있는 도시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화려한 것에 속지 마십시오. 그럴듯한 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아브라함과 롯에게만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렇게 우리를 유혹하고 매료시키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쾌락의 자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거주지를 선택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동산 재테크입니까? 자녀 교육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다 중요합니다. 그 여러 가지 조건 가운데 믿음의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건한 삶입니다. 교회와 예배를 중심으로 한 거주지 선택은 복 중의 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직장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자녀들이 미래에 어떤 일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월급을 많이 주는 곳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끄럽지 않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일이기를 원합니까? 월급도 많고 그런 일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 선택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배우자 선택, 문화 선택 등에 있어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흠이 없는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모함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과 죄의 때를 벗고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순간적으로는 그 선택이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특히 경건 훈련과 경건한 삶을 위해서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경건은 제사를 소중히 여김에서 세워졌습니다. 그의 경건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입니다. 경건의 가장 아름다운 향기와 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속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무속인이 50만 명이라고 합니다. 100명 중의 한 사람이 무속인입니다. 아이들을 제외하면 그 비율은 더 클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져도 영적인 세계가 바르게 서지 못하면 방황하게 되고 불안해집니다. 그곳이 바로 소돔이고 고모라입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물질 만능주의를 상징하는 풍요와 향락, 음란과 폭력의 세계로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끝없는 자살 소식,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음란한 소식, 난폭함과 참혹한 살인 사건 소식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놀라운 소식이 아닌 일상적인 사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의 선택에서, 하루하루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을 드러내는 경건을 기준으로 하는 선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로 나의 삶의 자리를 다듬고 바르게 세우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이 성품,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를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과 찬양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 생활을 통해 물질도, 재능도, 시간도, 건강도, 직장도, 자녀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르게 세워져 아브라함이 누렸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성도들의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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