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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 때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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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 때 (마 4:1-11)

세계적인 일렉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자기가 기타를 연주할 때 두 가지 감정을 표현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욕설이고 하나는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충격적이지요. 욕설과 기도. 어떻게 이 상반된 감정이 그 속에 내재돼 있고 그것을 표현하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가장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제 의사 친구가 그러는데 수면내시경을 하는 사람들 중에 수면상태, 무의식 상태에서 욕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저도 내시경 검사 받기가 두려워졌어요. 검사 도중에 욕을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한번은 친구들이 먹이는 술에 완전히 취해서 거의 의식을 잃을 뻔한 적이 있는데 제 친구가 저를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궁금하게 물어보더라구요. 무슨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느냐. 알고 보니까 제가 만취한 상태에서 방언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저도 그렇게 성령 충만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래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 양쪽에 강도가 함께 달려 있었는데 그 중의 한명은 예수님에게 욕을 하고 한 명은 예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절박한 순간에서 한 사람은 욕을 하고 사람은 기도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둘 다 정직한 외침입니다. 욕하는 사람이든 기도하는 사람이든 그 속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둘 다 절박함과 고통 속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다만 욕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하려는 것이고 반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욕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욕을 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가장 힘든 순간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기도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처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이 기도문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속사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만큼은 온 세상의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셨기 때문에 온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에게 임하고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은 것이라는 지론이고 또 다른 해석은 실존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는 지론입니다. 이 두 가지 지론, 구속사적인 해석, 또 실존적인 해석 다 일리가 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굉장히 괴로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굉장히 힘드셨어요.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다보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50 하나님이고 50 인간인 게 아니고 100 하나님, 100 사람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이 성육신의 신비에요. 인자가 되신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시험을 당하실 때 우리와 마찬가지로 괴로우셨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시면 우리처럼 슬프셨어요. 주리시면 우리처럼 배고프셨어요. 우리처럼 고독하실 때가 있었어요. 우리처럼 예수님도 믿음으로 행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괴로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신본주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어려운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지 않았어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물었지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왜 내 소리를 듣지 않으십니까.’라고 외치지 않았어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의 겉옷을 이어받아서 그 겉옷으로 요단강 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지요. 또 시편을 보면 ‘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아니하십니까’라고 묻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생각해보면 그보다 도 더 큰 의심은 없는 것입니다. 

북한을 방문한 어느 목사님이 이산가족이 된 어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어머니를 수십 년 만에 만나 뵈었는데 이 목사님이 기억하시는 어머니는 늘 기도하시는 분이었어요. 수십 년 만에 상봉을 하고 여쭤봤습니다. ‘어머니, 요즘도 기도를 열심히 하십니까.’ 그랬더니 그 어머님이 ‘기도하면 뭐하냐? 응답도 없는데.’ 이렇게 대답하시더라는 겁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무엇이 이 어머니로 하여금 기도를 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느냐. 정치적인 고난보다, 물질적인 가난보다, 또 인간적인 아픔보다 제일 슬픈 것은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건 완전히 인간이 절망에 도달했다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정말 하나님이 계시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에 사람은 그 영혼에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마 여러분 경험해 보셨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시련 자체도 괴롭지만 그 시련이 더 괴로운 이유는 첫째는 의미를 알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이 시련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무슨 목적이 있을까를 알지 못할 때 무의미한 시련은 더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더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둘째로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이 더 괴로운 이유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시련도 시련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낙심하게 만들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시련은 영적인 시련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 어떤 시련을 겪든 간에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겪는 모든 시련은 결국은 영적인 시련인 것입니다. 욥의 시련이 위험했던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몸의 병이든 그의 사업의 실패든 가정의 비극이든 그것이 욥의 신앙을 흔들었다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시험할 때 굳이 신앙 자체를 시험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아픔을 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아픔을 주면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흔듭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은 모든 면에서 시험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십일 금식을 하셨기 때문에.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왜 ‘밤낮으로’라는 말을 넣었느냐. 구약 성경에도 그렇고 타종교에도 그렇고 금식을 한다고 할 때 낮에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슬람의 라마단은 낮에만 하는 금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해가 지면 그때부터 축제, 만찬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에만 금식하신 게 아니고 밤낮으로 사십일을 연속으로 금식하셨어요. 주리셨습니다. 그 시점에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체적인 괴로움 그 자체가 사람을 취약하게 만듭니다. 그 자체가 사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옛 말에 사흘 굶어서 도둑 되지 않는 사람 없다고 신체적인 괴로움 자체가 사람을 연약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둘째로는 심리적인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약점이라고 하면 좀 어패가 있지만 약점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취약한 부분이 있어요. 예수님의 약점은 시장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귀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했어요.

만일 그때 예수님이 금식을 하고 계시지 않았다면 마귀의 말은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떡이 필요 없으니까. 배고프지 않으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말이 시험이 되지 않지요. 그러나 시장하실 때에는 그것처럼 매력적인 시험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약점이 노출되고 원수가 그 약점으로 당신을 시험한다는 것이 심리적인 시련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은 영적인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마귀의 유혹, 그 내용 자체도 시험이지만 마귀가 유혹하는 순간에 예수님이 당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배고픔은 강렬하게 느껴지지요, 마귀의 시험은 강렬하게 다가오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나를 도우시는지,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인지 그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느껴지는 것은 신체적인 배고픔, 그리고 마귀의 시험, 그로 인한 괴로움 이것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데 비교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냥 방치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시험이에요. 

마귀는 이전에도 똑같은 시험을 써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시험한 사람들은 다 굴복했어요. 왜냐하면 광야와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배가 고프고 그리고 마귀의 시험이 강력하게 다가올 때 거기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지요. 여기에 중요한 믿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건 오늘의 설교 주제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느낌으로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절박한 순간에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권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느냐. 이런 순간에 하나님은 왜 나를 안 도와주느냐. 어디 계시느냐. 왜 침묵하시느냐. 익숙한 질문이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안 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에 안 해보셨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잘 읽어봐야 됩니다. 

1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시험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괴로운 시험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고린도전서 10장에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당하는 시험도 하나님의 허락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시험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냥 우연한 일이 아니고 무의미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시고 이미 계획하시고 허락하신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마귀의 시험이 세 번으로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 시험을 한 후에 11절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떠났어요. 두고두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분량의 시험을 한 후에 떠나갔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도 당신이 감당할 만큼, 필요한 만큼만 시험을 당하시고 그 이후에는 마귀가 떠나갔어요. 시련이 끝났습니다. 시련이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범주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그 말은 시험당할 때는 괴로웠지만 일단 시험이 끝나니까 위로와 평강이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위로를 받았어요. 평안이 되돌아 왔어요. 괴로울 때가 있었지만 그때가 끝나고 나니까 천사들이 나와서 도와주더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평강 위로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천사들의 수종을 필요로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험을 물리쳐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물리치고 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밀물처럼 찾아옵니다. 그럼 왜 좀 더 일찍 천사들이 수종들지 그랬느냐. 그건 그때까지 우리가 감당해야 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몫, 하나님이 예정하신 몫을 감당하고 나니까 그 시험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옛 말에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지요. 쓴 것이 가니까 단 것이 온다. 쓴 것이 먼저 가야됩니다. 그게 아니고 감래고래 그러면 안 되지요. 단 것도 오고 쓴 것도 오고. 그게 아니고 쓴 것이 일단 가면 단 것이 옵니다. 우리는 쓴 것을 인내해야 됩니다. 그러면 단 것이 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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