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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 범죄의 결과 (창 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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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범죄의 결과 (창 3:9-24) 
 
 
오늘은 첫 범죄의 결과와 그 후 인간이 소망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라고 대답했습니다. 죄는 아담을 변하게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는 것과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11)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아담이 숨게 된 것은 벗었다는 수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가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멸시하고 불순종한 것이 문제였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여자를 원망하고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그 여자를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하나님을 은근히 원망합니다. 자기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변명합니다. 여자 입장에서는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말입니다. 딴에는 남편 출세시키려고 선악과를 정성껏 따주었는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남편의 이전 고백에 배신감을 느낄만합니다.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께도 몹시 불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변명을 꾸짖는 대신 아담의 말에 따라 여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는 남편의 변명을 응용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자기는 다만 유혹 받은 피해자일 뿐이고 뱀이 문제라는 변명이지요. 최종 선택은 자기가 했음에도 아담처럼 남 탓만 합니다. 죄는 빨리 전염되었고 신속히 모방되었습니다. 회개치 않은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까지 모두 파괴했습니다. 이처럼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이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시작됩니다. 사단의 도구 노릇했던 뱀에게는 회개의 기회 없이 곧바로 저주가 선고됩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14). 모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했던 뱀이 모든 짐승 중에 가장 저주를 받았습니다. 뱀을 이용했던 사단에 대한 심판도 선고되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모든 후손은 ‘남자의 후손’으로 불리는데, 성령님으로 잉태되신 예수님만은 유일하게 ‘여자의 후손’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곧, 사단에게 치명상을 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뱀에게 “발꿈치를 상하게”되는 수난도 겪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구속역사를 완성하셨지요. 이 때문에 15절은 ‘원시 복음’이라 불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에게 형벌을 선언하시기 전에 구속하실 것부터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중에도 죄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천지 창조를 위해서는 6일을 할애하셨지만, 구속을 위해서는 수천 년의 세월을 공들이셨지요. 그만큼 죄 문제의 해결은 심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시기까지 참으로 오랜 구속사의 시간을 참으셨지요. 이를 볼 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언약적 저주의 공의로운 시행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여자에게는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셨습니다(16). 생육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복의 출발점이었습니다(1:28). 범죄 후에도 생육은 여전히 여인의 후손을 소망하게 하는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에 고통이 크게 추가되었습니다. 이제 복을 누리기 위해서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도 여자는 남편을 소유하려고 갈망하게 될 것이며, 남편은 여자에 대해 감독하고 통제하는 지배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죄는 부부관계를 동반자에서 힘겨루기의 관계로 만들었습니다.

언약의 대표자였던 아담에게는 언약을 파기한 문제부터 지적됩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17a). 단지 주니까 먹었을지라도(6), 책임을 면할 순 없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17b-19). 언약이 파기되므로 땅은 저주를 받았고 그저 주셨던 풍성한 공급은 중단되었습니다.

원래 노동은 에덴의 한 조건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즐겁게 노동하다가 영생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복으로 주어졌던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중노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담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종신토록 수고하고서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언약에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인데(2:17; 롬 6:23), 죽음의 첫 형태가 남녀 모두에게 ‘수고’와 ‘고통’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그 날로부터 인간은 이미 죽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성경에는 네 가지 죽음이 언급되는데 ‘소멸’이 아닌 ‘단절’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의 공급으로부터 단절되어 수고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slow death), 육체와 영혼이 단절되는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어 둘째 사망이라고도 불리는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아담이 대표였던 인류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죽음과 더불어 수고하고 고생하며 서서히 죽어가다가 육체적인 죽음을 거쳐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운명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선고가 끝난 후 아담은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 지었는데, “모든 산 자의 어미”를 의미했습니다(20). ‘모든 죽을 자의 어미’라 하지 않을 것을 보면, 탓하던 마음을 그치고 여인의 후손을 통한 생명의 회복을 소망했던 것 같습니다. 죄의 속성 중에 탓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한 자는 ‘아담 때문이야’ 혹은 ‘뱀 때문이야’라고 변명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최종적으로 내가 선택한 일임을 인정합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탓하는 태도를 그치고 그리스도를 통해 소망을 가지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21)신 사건은 구약의 피 흘림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 한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죄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에서 추방하셨는데, 그 이유는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셨는데 죄를 범한 후에는 인간도 선과 악의 기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선’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악’은 그분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로 떨어진(墮落: 떨어질 타, 떨어질 락) 것을 뜻하지요. 하지만 이제 타락한 인간은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선으로 자기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을 악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버린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영생하면 영원한 단절, 곧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됩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이 형벌이지만 동시에 사랑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으나 에덴을 없애지는 아니하시고 “생명나무의 길”로 회복될 날을 소망하며 살게 하셨습니다(23-24).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 인류는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특권을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자신의 이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 없이도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무서운 재앙이 되어왔습니다. 에덴에서 쫓아내신 분이 받아주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에덴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된 삶으로부터 다시금 하나님께서만 선악의 기준이 되시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자리가 비록 수고스럽고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분의 말씀만을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삼고 생명나무의 길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이 최선입니다.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로 ‘원죄’(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가 발생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죄와 형벌에 대한 책임인 ‘죄책’(guilt)과 ‘부패’(pollution)를 가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원죄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고 자범죄(peccatum actuale, Actual Sin)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심각한 죄의 결과 속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아담이 여인의 후손을 소망하며 살았듯이,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인을 구속하신 예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첫 에덴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던 것처럼 에덴으로의 회복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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