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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 있을때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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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 있을때 (롬 6:23)
 

오늘은 “주 안에 있을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 부실한 신앙상태에 있으면서 과거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했다고 말하거나 미래에는 잘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까닭인즉, 믿음은 과거지사나 미래의 포부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믿음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더라도 지금 믿음으로 살고 있다면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과거에 아무리 잘 믿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의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가졌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지금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잘 믿은 것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내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과거의 믿음 또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내일 잘 믿겠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그리고 지금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보고서 ‘주 안에 있다’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대홍수로 멸하셨습니다.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노아와 그의 식구, 도합 여덟 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홍수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자들과 멸망당한 자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방주 안에 있었느냐, 방주 밖에 있었느냐, 이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한 가지 차이가 생과 사를 결정지었습니다.

노아가 지은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받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처해진 자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 심판이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을 멸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주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를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현 주소는 “주 안에”입니다. 또한 이는 우리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지금 “주 안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은혜롭고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받는 은혜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주 안에 있을 때 정죄함이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정죄 받은 죄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구해 낼 수 있을까요? 타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도를 닦고 수양을 하면 살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선행을 많이 하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 죽을 몸에서 건짐을 받게 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과 관련해서 볼 때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행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단 말입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으셨다면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4-5) 그렇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한량없이 크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 인생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주셨으므로 율법에게서 해방되었고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당치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할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경이 그토록 죄 사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첫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게 되는데, 이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1장에 이르기를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양심이 정죄 의식에 눌려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기가 의롭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의 내면은 언제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결과, 그 마음이 고아와 같이 어둡고 슬프고 절망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고 심판을 겁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믿는 자들을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같이 사죄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 “나 속죄함을 입은 후 한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도님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변함없이 주 안에 거함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는 한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 안에 있을 때 죄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야지’ 결심하고서도 작심삼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한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 안에 있으면 됩니다. 주 안에 있다 함은,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서 살아감으로 날마다 주 안에서 영적 승리를 맛보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대 홍수에 의해 죽었으나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와 그의 가족은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생존했습니다. 노아와 그의 아내와 그의 세 아들, 샘과 야벳과 함과 그들의 아내들이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그들이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장 5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과거 뿐 아니라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말세에 나타날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 때까지 변함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려면 우리가 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지루하게 여기고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주일이 되면 어디든 놀러가는데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하다니, 신앙생활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니까 여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대로 살아보리라 결심을 하고 세상길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읽어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살면서도 늘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제 마음대로 살기를 갈망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냈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처분해서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러고 났을 때,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닥쳤습니다. 빈손이 된 이 아들은 생존을 위해 들판에서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의 열매조차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지난날 아버지 집에서 살 때가 얼마나 행복한 나날이었는지 깨닫습니다. 그는 뉘우치고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 그는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였으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잔치를 열고 이웃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받으려면 ‘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원수 마귀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 주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들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언제나 주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보호하심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주 안에 있을 때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힘을 의지해서 살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통과했던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는 물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나무 그늘도 찾기 어렵고, 낮에는 태양빛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하고 보이는 것이라곤 거친 돌과 모래뿐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머물러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베드윈들이 살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그들을 받아줄 곳이 없기 때문에 광야를 떠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차일을 쳐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막아주셨으며, 매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이셨으며,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1장 33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일깨워 주기 위해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은혜로운 삶을 영위하기 원하시거든 주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주 안에 있을 때 마음에 쉼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주 안에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짐을 맡아서 해결해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이르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과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삶은 무거운 짐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짐이 무거웠으면 자살을 택하는 걸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은 삶의 무거운 짐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무거운 짐을 맡아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걱정할 것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도 전능하신 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대신 져 주시지 못하는 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의 죄의 짐, 질병의 짐, 먹고 사는 문제, 자녀들의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등, 모든 종류의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맡길 때 주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이 찬송이 저와 성도님들의 진실한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 안에 있을 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그 능력으로 섭리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모든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이사야서 40장에 이르기를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기 위해 숱한 고난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환난이 극심했으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쓰러지지 아니하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환난을 이겨낸 것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언제나 주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어떤 어려움도 능히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 안에 있을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다. 이 시대에 영화와 음악, 스포츠, 오락 산업이 번성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일시적인 위안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었으나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이렇게 권면하는 사도의 심령 속에는 기쁨이 충만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비결은 “주 안에서” 라는 말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주님께서 기쁨을 부어주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주 안에 있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을 항상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넷째로, 주 안에 있을 때 선한 열매를 맺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되 악한 열매가 아닌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선한 열매를 맺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우리가 주 안에 있기만 하면 저절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되지만, 우리가 주님 밖에 있으면 온갖 노력을 다할지라도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항상 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주님 밖에서 서성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믿으면서도 구원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서 세속적인 생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천 년 만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입니다. 저는 예수 믿게 된 것이야말로 천재일우 보다 더 귀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곧 ‘주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쪼록 주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는 믿음으로 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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