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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만 그를 섬기라 (눅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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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를 섬기라 (눅 4:1-13)

먼저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말씀을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충만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안락한 거실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광야로 이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광야와 시험은 힘든 것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마귀를 이겨 기선을 제압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고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본문 5절부터는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시험이 세 번째 시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5-7절까지 읽어봅시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는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이 시험은 대단히 뿌리치기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메시아 왕국의 왕이 되려고 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왕이 되려면 꼭 필요한 천하만국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나라를 세우려면 많은 수고가 필요한데, 절만 하면 천하만국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얻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게 해 주겠다. 쉽게 얻게 해 주겠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사람들은 이런 시험 앞에 너무도 약해집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학문의 세계에서 더 이룰 것이 없도록 성취를 거두었으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이 때 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대신 24년 후 자기 영혼을 그에게 주기로 약속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계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다양합니다. <한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하는 소박한 욕망에서부터 시작해서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정염, 그리고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나아가서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까지 끝이 없습니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집니다. 욕망이 큰 사람일수록, 비전이 큰 사람일수록 걸려들 위험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통찰력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응 방식은 매우 고차원적이었습니다. 

여러분, 배고픈 사람에게 누가 와서 <떡 먹을래?>라고 유혹하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애써 참으면서 <난 배불러요>라고 둘러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수준이 낮은 대응 방법입니다. 우선 배가 고픈데 부르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미 우리가 굶었다는 것을 알고 왔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 눈앞에서 떡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약을 올릴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상대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런 방법보다는 그 떡이 독이 든 떡임을 증명하는 방법이 더 낫습니다. 그렇게 되면 독이 든 떡을 가지고 왔던 상대는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주는 것은 전부 그 속에 독이 들어 있습니다. 마귀에게 받아 먹으면 인생도, 가정도 다 죽습니다. 

설령 그 떡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떡은 마귀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네 것도 아닌 것을 왜 네 것인 것처럼 내게 주려느냐?>고 상대방이 도둑임을 밝힘으로써 부끄러워 더 이상 있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난 천하만국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천하만국이 필요했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필요 없으니 물러가라>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천하만국이 마귀의 것이 아님을 지적하셨습니다. 마귀가 도둑임을 보임으로써 마귀를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천하만국이 마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마귀 자신의 말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했던 말을 잘 보십시오. 마귀는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천하만국이 본래 마귀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누군가로부터 넘겨받았다는 것입니다. 본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마귀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마치 남의 땅을 자기 땅인 것처럼 문서를 위조해서 팔아먹는 사기꾼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천하만국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다름 아닌 온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요, 그것의 통치자이십니다. 

다윗은 역대상 29장 11-1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결코 천하만국의 모든 것을 마귀에게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마귀는 자신의 것도 아닌 천하만국, 하나님의 소유인 천하만국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만약 절을 해서 천하만국을 얻는 것이라면 마귀에게 절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 절을 드려야 옳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절을 하려면 사기꾼인 네게 절을 할 게 아니라, 천하만국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섬기고 경배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니 마귀 너는 당장 물러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는 지금도 우리 눈앞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들이밀면서 유혹합니다. <김 목사, 너 지금 이거 필요하지 않니? 내게 절해 봐. 내가 줄게. 난 이 모든 것의 주인이야! 아주 쉽게 가질 수 있다구. 눈 딱 감고 한번만 내 앞에 엎드려 봐...> 이런 식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이 뭘 주셨는가?>라고 원망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가 무신론자와 토론을 하며 길을 걷고 있다가 마침 맹인 거지를 만났습니다. 프란시스는 맹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만일 내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준다면 당신은 아마도 나를 존경하겠지요?> 맹인이 대답했습니다. <존경뿐이겠습니까? 나는 기꺼이 선생님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프란시스는 무신론자에게 말했습니다. <어떻소. 이 맹인은 눈을 뜨게 해준 자의 노예가 되겠다는데 당신은 눈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마귀에게 무릎 꿇지 마십시오. 마귀가 준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것인 양 꾸미는 우주 최대의 사기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섬기고 경배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여기서 우상 숭배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신명기 6장 12절 이하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우리 평생에, 그리고 자손만대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길 원합니다. 그 분만이 천하만국의 참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만 섬긴다면 필요한 게 있을 때 하나님께 구하시길 바랍니다. 무조건 <필요 없다>고 사양하지 마십시오. 배가 고픈데, <저 배불러요>, 이런 식으로 사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게 많습니다. 부족한 것을 열거하라면 밤을 새워도 다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병약한 분에게는 건강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분에게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직장도 필요하고, 기회들이 필요합니다. 좋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난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라고 애써 사양하지 마십시오. 단지 우리에게 주지도 못할 마귀 앞에 무릎을 꿇지만 않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시면 됩니다.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매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천하만국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왜 우리에게는 부족한 게 많은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충분히 넘치도록 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자란 것이 없도록 주셨다면 마귀가 시험할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금식을 하신 예수님께는 음식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멋진 밥상을 내려 보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만약 하늘에서 밥상이 내려와 예수님께서 배불리 잡수셨다면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 따위는 할 수 없었을 것 아닙니까? 또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실 때 하늘에서 궁궐이 내려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도 늘 부족하게 지내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풍성하게 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심을 알고, 제게 풍성하게 주실 것을 기대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만 주시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항의조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문제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우리 믿음은 몰라보게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문제 해결에 집중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 제게 좀 풍성히 채워 주세요. 왜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채로 방치하십니까? 제발 문제가 해결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천하만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우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이 순탄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는 색다른 기도를 드린 분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채우기보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구원받는 것보다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많은 결핍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다가 하나님의 성막에 진열된 진설병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나발이란 사람에게 양식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채워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대신 <깨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드렸습니다. 

몇 군데 예를 들어 봅시다. 시편 119편 34절에 보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너무 힘듭니다. 왜 이렇게 피곤하고 부족함이 많습니까? 저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단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처럼 부족함이 많은 곳에 두시는지 그 뜻을 깨닫기만 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부족함도 견딜 수 있습니다>라는 기도입니다. 

또 시편 119편 73절에서는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만들고 오늘 이 모습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저를 오늘 이 모습으로 만드셨습니까? 오늘의 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지 그 뜻만 깨닫는다면 저는 얼마든지 저를 이렇게 만들고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깨달으면 결핍도 견딜 수 있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부족함이 많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를 위해 기도했고,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부족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 부족함은 사랑의 연단이었습니다. 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의인>으로 여겨졌습니다. 후에 사울이 죽었을 때 모두 다윗이 왕이 되는 데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윗이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다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그의 어려움과 부족함은 왕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깨닫지 못하고 <천하만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처럼 부족함이 많은 곳에 버려 두시는가>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닛 포프>는 <성경 통째로 먹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말씀을 주셨으며, 어디로 인도하려 하신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이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제자리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그런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앞으로 어찌될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교차로에 서서 오른쪽 길로 갈지, 왼쪽 길로 갈지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혼돈이 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왜 삶이 이렇게 힘든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오묘하신 인도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자신을 맡깁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어둠 속에 갇힌 자를 일으키고 잠든 영혼을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에 딱딱하게 굳은 저희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고 무정한 세상을 흔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저희는 세상으로 뒤돌아 갈 수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제자리에 머물 수 없습니다. 차갑든지 또는 뜨겁든지, 선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저희가 가는 길이 곧 주의 길이 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은혜의 여정이 되길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깨달은 인물입니다. 그는 가난과 풍부에 대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분이었습니다. 채워졌을 때는 감사하고, 부족할 때는 원망하는 일차원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채워짐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았고, 부족함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보았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기에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을 이기신 것입니다. 만약 채우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었다면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왜 하늘 아버지는 이렇게 배가 고픈데도 하늘에서 밥상을 내려 주지 않으시는지 원망스럽네. 자네 말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겠네. 좋은 아이디어를 주어 고맙네>라고 하면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님을 아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부족해도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사람은 떡으로만 산다>고 말하게 되겠지요. 그 순간 마귀에게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섬길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 외의 어떤 존재도 모두 우리를 유혹하는 사기꾼 같은 마귀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때로 그 분이 채우지 않는 순간이 있어도 원망치 마시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깨달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이 시를 지을 때 다윗은 적에게 쫓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천하만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에게 주지 않고 계셨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게 많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는 대신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믿음의 찬송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강준민 목사님은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란 책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통과했던 광야, 감옥, 동굴 등 고난의 현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대기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부족함이 많은 현실에 살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채우시는 은총이 임할 때를 기다리면서 그 고난의 장소를 하나님을 기다리는 대기실로 여기고 거기서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있노라면 천하만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십시오. 새벽 기도시간을 여러분의 대기하는 시간으로 만드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상한 손길을 체험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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