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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응 (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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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응 (암 3:1-8)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아모스서는 여덟 국가를 향한 메시지, 세 편의 설교, 다섯 가지의 환상, 다섯 가지의 회복 이렇게 8:3:5:5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아모스 1-2장은 여덟 국가를 향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3-6장은 중간 부분으로서 세 편의 설교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 아모스 3장은 첫 번째 설교인데 오늘은 옛날 아모스가 다시 살아나서 설교한다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모스의 첫 번째 설교 주제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언약의 백성이라 해도 죄를 짓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게 되면 한 가지 위험성을 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와 축복을 많이 주셨으니까 내가 죄를 지어도 어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지어도 되는 허가증 정도로 생각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이천 년 역사를 보게 되면 죄를 가장 많이 지은 사람들은 주의 종들입니다. 혼자 살겠다고 독신서원 해놓고 자식이 15-20명 되던 사제들이 역사 속에는 무수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죄를 가장 많이 짓는 사람은 누구냐? 목사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으니 내가 죄를 좀 짓는다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은 진리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큰 책임성을 갖게 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0-22절에 예수님께서 이 진리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과 권능을 베푸신 동네가 고라신과 벳새다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1-22) 

두로와 시돈은 은혜를 조금 주셨기 때문에 책임을 조금씩만 물으시지만 고라신과 벳새다는 많은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많은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에 이 원리를 예수님께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8) 

Ⅰ. 언약의 백성에게도 하나님의 징계는 따른다 

아모스 3장의 핵심구절은 2절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암 3:2) 아모스 3장 1-2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에게도 징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People of Covenant)이었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지식적으로 알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일반은혜를 넘어서 특별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를 주십니다.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햇빛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비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호흡할 공기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걸어 다닐 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땅을 우리가 만들었습니까? 공기를 우리가 만들었습니까? 공기를 우리는 공짜로 먹고 있지만 몽골의 어떤 지역은 산소가 부족해서 사서 마셔야 됩니다. 공기도 사서 마셔야 되면 비쌉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기도 공짜로 마시고 햇빛도 공짜, 물도 공짜로 마십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독교 신자만 주고 불교 신자는 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일반은혜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도 은혜로 받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일반은혜를 넘어서 특별은혜를 주셨습니다. 특별은혜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grace of election)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와 함께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택하심의 은혜를 받아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라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자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은 내가 약속한 자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자연적으로는 전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태문을 열어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해서 쌍둥이 아들 야곱와 에서를 낳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야곱은 에서보다 더 못한 사람입니다. 에서는 남성적이고 사냥 좋아하는데 야곱은 아주 여성적인데다가 사기를 잘 치는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형 에서를 속이고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기꾼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합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너무 부담되어 얍복강 가에서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그 후에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고 그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택하심의 은혜를 받은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받은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택하심의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둘째, 구원(deliverance)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가장 똑똑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히고 하니까는 다른 형들이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동생 요셉을 벌거벗겨 구덩이에 집어넣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가 되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갔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거절하자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옥에서도 요셉에게 꿈을 해석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사막 한복판에 떨어져도 살아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애굽 왕 바로가 꾼 꿈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어 많은 사람을 불러보지만 해석하지 못하고 결국 요셉이 꿈을 해석합니다. 바로 왕의 꿈은 7년 동안 애굽에 풍년이 있을 것이고 그 후 7년 동안 흉년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일로 30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풍년이 들었을 때 세금을 많이 걷어 흉년이 왔을 때 백성이 굶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근이 애굽에만 임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살던 가나안 땅에도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총리대신인 요셉 앞에 형들이 모두 와서 무릎을 꿇고 곡식을 달라고 사정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아버지와 그 후손들 70명을 애굽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흉년에서 건져 구원한 것입니다. 이들이 애굽 고센이라는 땅에서 얼마나 번식을 잘하는지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이 경계하여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고 노예로 삼아 핍박한 것입니다. 그렇게 430년을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괴로워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라고 하는 아이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켜 바로 왕과 대결하게 하십니다. 모세를 통해 열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주신 것은 그들의 능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특별은혜에는 택하심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예배하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 즉, 특별은혜를 받은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택하심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인해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리라고 종종 오해했습니다. 특별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지어도 눈감아주시겠다는 의미입니까?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예루살렘에는 여호와의 전이 있으니 어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수가 있겠느냐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여호와의 전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악에 대해서는 보응을 하신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주셨다 할지라도 바르게 살지 못하면 반드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심판의 두 종류를 구별해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어도 심판받는다고 하는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종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첫째, 사법적인 심판(judicial judgment)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이것은 죽은 후에 심판받는 것이고 이 심판을 받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서 영영히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사법적인 심판에서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대해 심판받고 지옥에 가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사법적인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 된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로서 징계하시는 아버지로서의 심판(fatherly judgment)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법적인 심판에서 면제 되었다고 아버지로서의 심판까지 면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심판하시는 것을 성경은 “권징”(discipline)이라고 부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권징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7-8)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도 안 나오고 죄를 짓고 쾌락을 좇아 살아가는데도 별일이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얻어터지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로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주일날 겨우 교회에 나와서 결혼식 간다고 중간에 나갑니다. 주일에 나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고 하면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직분을 받은 것은 기도하라고 받은 것입니다.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회를 왜 안 나오십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시험에 들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되고 진실로 사랑해야 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 중에 허파가 점점 굳어지는 병에 걸려 오랫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허파가 줄어들어 조금밖에 남지 않아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십니다. 제가 그분 심방을 갔더니 건강할 때 봉사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호흡을 다할 때가 되면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굉장히 후회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실 그분은 하나님께 굉장히 충성했던 분인데도 그렇게 후회의 말씀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복 주시려고 택하시고 구원하셨는데 복은 못 받고 얻어터지기나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매를 경험하지 마시고 사랑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징계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경고가 있은 다음에 온다 

아모스 3장 3-8절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여러 번 하신 다음에 징계를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경고를 수시로 하시고 경고를 해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3장 3-8절은 일곱 가지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대답이 너무나 뻔해서 대답을 듣고자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 질문을 듣고 반성하고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수사학적인 질문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 4:9) 이 말씀 또한 아벨이 죽은 것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를 죽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아모스 3장 3-8절에서도 일곱 가지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질문의 대답은 모두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아니하고 동행하겠느냐?” “아니요.” “사자가 움킨 것이 없이 수풀에서 부르짖겠느냐?” “아니요.”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이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아니요.” “창애 없이 새가 어찌 거기 걸리겠느냐?” “아니요.” “창애가 뛰는 것이 잡힌 것이 없이도 뛰겠느냐?” “아니요.” 덫을 어려운 말로 하면 창애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쥐가 많아서 쥐덫을 많이 놨었는데 제 발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창애는 무엇이라도 걸리면 뛰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뛰지 않는 것입니다. 또 “성읍에서 나팔을 부는데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당연히 두려워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이렇게 일곱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하나로 요약한 것이 아모스 3장 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 3:7) 

그러므로 일곱 가지 질문의 내용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받을 이유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느냐?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받을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명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모스에게 재앙을 미리 보여주시고 경고를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경고를 듣고 마땅히 두려워하며 돌이켜야 된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으면 재앙은 집행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닷없이 혼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러 번 경고를 하시고 혼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고가 올 때는 얼른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 몸에도 어디가 아프면 신호가 옵니다. 신호가 올 때 얼른 병원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호가 오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으면 병이 커져서 치료비도 많이 들고 낫기도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고가 올 때 두려워하며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지혜입니다. 


Ⅲ. 하나님의 징계는 저지른 악과 상응하는 보응으로 온다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3:9-10) 

아스돗 궁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키고 애굽 땅 궁들은 애굽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은 남을 압제하는데 선수들입니다. 그러니까 압제의 선수 중의 선수들을 불러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모아놓고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압제하는지 평가해보라고 했더니 그들도 놀랐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암 3:11) 그리하여 압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보응으로 이방 나라의 압제가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를 약탈하니까 자기 아내를 열 명이나 자기 자식이 약탈합니다. 다윗이 남을 죽이니까 자기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친구를 배반하니까 자식들에게 배반당하는 보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과 죄는 서로 상응하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자신도 속임을 당할 것입니다. 남을 욕하는 사람은 자신도 욕먹을 것입니다. 또한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자신도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정한 죄에 따라서 상응하는 보응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얼마나 철저한지 아모스 3장 12절에 보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암 3:12) 
 
또 아모스 3장 13-15절은 하나님의 징벌이 올 때에는 숨어서 피할 곳이 없어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단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3:13-15) 

번제단에 네 개의 뿔이 있는데 범죄자들이 이 뿔을 잡게 되면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뿔은 죄인들에게 피난처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뿔을 다 잘라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피난처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아로 화려하게 만든 겨울 궁과 여름 궁으로 도피하겠지만 그것 또한 모두 결단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와 상응할 뿐만이 아니라 한번 손대시면 철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아모스 3장 1-2절은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께서 징벌하신다는 내용이고 아모스 3장 3-8절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때에는 여러 번 경고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아모스 3장 9-15절까지는 하나님의 징벌은 철저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사법적인 심판이 면제되었더라도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권징은 계속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으로 경험해야지 권징의 하나님으로 경험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권징의 신호가 올 때는 얼른 알아차리고 두려워하며 돌이켜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징은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있기 때문에 증거해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적게 받은 사람에게는 적게 요구하십니다. 많이 받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도리어 죄를 짓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많은 책임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징벌로 경험하지 말고 축복과 사랑으로 경험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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