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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잠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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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하십니까? (잠 3:5-8)  
  
이렇게 주일 오후에 하나님의 전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은혜가 넘치시길 소원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하고 인사 잠깐 하실까요?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여러분들을 잘 맞이해주실 겁니다. 

1996년 여름에 미국 미시건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모든 것이 작지만 아기자기한 네덜란드에서 튤립처럼 우아하게 유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바람하고는 정반대로 1996년에 갔는데 97년에 뭐가 터졌습니다. 바로 IMF였습니다. 저한테 직접적으로 영향을 올수밖에 없었습니다. 환율이 두 배로 뛰었기 때문에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죠. 조금 고생했습니다. 고생을 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생은 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인가는 아기가 울길래 기저귀가 필요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봤더니 기저귀가 없더군요. 살려고 보니까 돈이 없더군요.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생,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요, 저는 그게 힘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를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고 하니 바로 그 어려운 상황가운데 내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침묵이 저한테는 참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 같고, 나를 버리시는 것 같고,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하는 것 같은 그 느낌. 
비유를 들자면 저 어두운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계신 하나님. 
내가 울부짖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은 그 하나님. 
그게 사실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분당중앙교회의 상황이 그 비슷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어려움이 시작되어 6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꼬여가는 느낌인 듯합니다. 그 자체도 힘들겠지만 사실 더 힘든 것은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게 사실은 가장 힘든 일이죠. 

그렇지만 여러분들, 잘 아시겠지만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그냥 위기를 주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에요. 위기를 잘 선용하면 우리교회는 환골탈퇴해서 아주 멋지게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파멸로 들어서게 되겠지요. 저희교회는 지금 그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잠잠히 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어떻게 해야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 그것을 들을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는 방식, 방법,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격파하시는 역사를 보고 싶다면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를 풀어주신다는 것이에요.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렇게 좀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원문을 풀어보면 이런 말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평탄케 하실 것이다. 곱게 풀어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문제해결을 받고 싶으냐? 그렇다면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얘기죠. 그리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폭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이에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7절>에 똑같은 말 <5,6절>에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이게 구약의 방식인데요, 거기에 보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에요? 내 판단력, 내 지혜 이런 것 의지하지 않는다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지혜롭다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혜 있는 척하지 말라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 똑똑합니다. 아는 것도 많죠. 그래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때에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지혜를 사용하지 말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지혜를 사용해야 됩니다. 그 지혜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사용하지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죠. 물질을 사용하지만 물질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신뢰할 때에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본문말씀에 보니까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라고 얘기합니다. 전폭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맡기라는 거예요. 어린아이와 같이. 

잘 아시겠지만 여러분들 어린아이들이 하는 착각이 뭔지 아십니까? 애기들이 하는 착각. 
울면 다 되는 줄 안다. 이거잖아요. 그죠? 
우리가 볼 때는 착각이지만 사실 착각이 아니에요. 애들이 뭘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해요. 배고파요. 젖 주세요. 말도 못해요. 그럼 뭘 해야 됩니까? 울 수밖에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의지하라는 것은 그것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에요. 나의 지혜, 나의 재물, 나의 배경, 나의 학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에요. 
가정의 달이 이제 지나가고 있는데 여러분 중에서 자녀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아들 하나, 딸 하나,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복 받은 사람이죠? 
우리 아들은 중학교 2학년인데 진짜 말을 무지하게 안 들어요. 
정말 그렇게 안들을 수 있을까, 누구 닮았을까요?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친구는 천재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어느 상황에든지 불평할 수 있어요. 놀래요. 
어느 상황에든지 불만이 있습니다. 충만합니다. 그거 능력이에요. 진짜. 

그 아들을 위해서 가끔 놀리느라고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당신은 불평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했더니 안 되겠어요. 이제 그만해야 될 것 같아요. 자꾸 더 불평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안합니다. 그 정도로 불평을 잘해요. 

얼마 전에 아들이 중간고사를 보기 며칠 전인데 공부를 한다고 방에 들어갔어요. 공부하나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하더라고요. 
‘희한하다. 왜 조용할까?’ 
계속 안 나와요. 그래서 문 열고 들어가 보니까 어떻습니까? 자고 있더라고요. 
자는 것도 그냥자면 괜찮은데 침대보 다 까고 맨 매트리스위에 누워서 침대보를 덮고 자고 있어요. 더 가관은 뭡니까? 책상을 보니까 책상에 책이 열댓 권 수북이 쌓여있고 그리고 군데군데 뭐가 있어요? 
쓰레기가 있어요. 뭔지 모르겠습니다. 바닥을 보니 더 가관이더군요. 바닥에는 뭐가 있습니까? 옷이 한 열 벌은 더 너부러져 있는 것 같아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우리 아들 학교가 조금 멉니다. 많이는 아닙니다. 차타고 5~10분 돼요. 제가 바래다주는데 그 차안에서 고 짧은 기간에 아들하고 대화하다가 애들 말로 열폭했습니다. 

그 전날 얘길 한 거예요. 
“너 왜 그러니?”그러면 반응이 좀 잠잠해야 하잖아요.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빠, 왜 신경 써? 신경 쓰지 마. 아! 짜증나.”그 순간에 열이 확 받더라고요. 그래서 아들을 야단치고 내렸어요. 
보내고 차를 돌려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진짜 열 받잖아요. 그렇죠. 잘 아시죠. 저만 이렇게 열 받나요? 
갑자기 주님이 마음속에 음성을 들려주세요. 
“창욱아! 열 받았니?” 
“열 받죠. 주님.” 
“네가 나한테 그러고 있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주님.” 
“너 말씀 듣고 말씀 읽을 때 이렇게 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한 거 많잖아. 그런데 안하잖아.” 

거짓말같이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아들에 대한 미움이 싹 사라졌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아들에 대해서 노심초사하는지 이유를 발견했어요. 뭐냐 하면 제가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거예요. 제가 뭘 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인가 해가지고, 아들을 내가 그래도 교수니까 아들을 어떻게 해가지고 좋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을 너무 싫어하시는 거예요. 
제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들을 훨씬 더 사랑하시는 건데 왜 그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냐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전폭적으로 맡기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맡겨야, 그래야만이 우리가 진정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답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신뢰와 인정이 함께 쓰입니다.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6절>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신뢰하고 인정하는 게 같이 짝을 이루고 있어요. 인정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면 야다입니다. 이것은 안다는 겁니다. 안다는 것인데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게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전인격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렇게 알아야 인정할 수 있는 거죠. 머리로 알겠어. 그거 아니고 진정으로 인정해주는 것. 너는 진짜다.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 그러지 않습니까? 
“그 사람 진짜야.” 
“어떻게 알아?” 
“내가 겪어 봤거든”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알아야만-체험적으로 알아야만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신뢰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럼 여기서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렇게 깊이 알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앎으로 말미암아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전제조건이 있다. 딱 하나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에요. 
경외한다니까 말이 어렵죠.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좀 두려워하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공포와는 다릅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하나님이 누구신줄 알고 우리가 누군 줄 안다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제가 한 번 무슨 말씀인가 설명 드려 볼게요. 

<신명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한 세트를 이룹니다. 서로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비슷한 말이에요. 무슨 말인가 하니 <2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켜 행하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5절>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켜 행하라’ 
경외하고 사랑하고. 똑같아요. 이게 어떻게 서로 어우러질 수가 있습니까?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말로만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그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예요. 그런데 계명을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지킬 수 있어요. 

하나님, 우리가 그렇게 형편없습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래요. 죄악된 본성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한데 어우러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두려워하며 명령을 지키라는 거죠. 

여러분,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오늘같이 이렇게 더운 날에는 좋은데 눈이 덮인 설경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린 자녀를 두신 분들은 아마 보셨을 거예요. 원래는 C.S.루이스라는 기독교 작가가 쓴 소설에 근거한 영화입니다. 원래 제목은 ‘The lion, The whitch and the wardrobe’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이에요. 옷장은 왜냐하면 그 옷장 문을 딱 열고 옷장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나니아의 세계죠. 맨 처음에 아이들이 그 문을 발견했습니다. 들어갔을 때 수달이 설명을 해줍니다. 나니아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그 때 여러 가지 얘기를 하죠. 
“여기 왕이 있다. 왕이 누구냐면 사자야.” 
사자이름이 뭐냐 하면 아슬란입니다. 
“사자가 있어.” 그리스도를 사실은 하나님을 지칭하죠. 상징해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애들은 ‘사자’ 그러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대뜸 뭐라고 묻습니까?“안전해? 위험하지 않아?”수달이 뭐라고 얘기합니까?“물론 안전하지 않지. 그러나 좋은 분이야. 그 분은 좋은 분이야.”그 분은 좋은 분이지만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바르지 못할 때는 무서울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것이 하나님의 그 공의로운 측면, 경외해야 되는 측면을 사실은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잠언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식이 뭐냐 하면 사실은 지식은 히브리어로 얘기하면 아까 얘기했던 ‘야다’-체험을 통해 안다. 그런 것과 통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경외해야 참된 지식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알고 싶으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그 여정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올바른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올바로 알아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죠. 

한국교회는 언제인가부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했습니다. 겁을 상실한 거죠. 그래서 제 친구 목회자들은 불평을 해요. 뭐라고 불평하냐면 “그런 설교하지 마. 다 존다. 듣지도 않아.” 하지만 그런 비난을 할 자격이 저 같은 목회자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임이 우선적으로 저 같은 목회자에게 있기 때문이에요. 과거를 뒤돌아보면 옛날에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나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요. 하나님을 무서워했습니다. 진심어린 설교가 가능했던 것이죠. 진심어린 반응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목회자들이 슬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라고는 얘기하죠. 무슨 얘기가 됩니까? 겁줘서 통치하려고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한 마디로 겁줘서 말 듣게 만든 거죠. 대부분 교인들은 순진해서 그냥 있기는 했지만 마음속에 거부감이 일어난 겁니다. 성도님들이 말 안한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에요. 마음속에 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거죠. 그러다가 어떤 교인들은 목회자와 싸우기도 하는 거죠. 싸움을 하기도 한 겁니다. 저희 교회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입니다. 저희교회문제만은 아닙니다. 이건 그런 문제만이 아닙니다. 

결국은 목회자나 교인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약해지거나 거의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지금 뻥뻥 터지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부모님이 계시는데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무시해요. 홀대해요. 딴 사람이 존경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설교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물론 일부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 겁 없이 행동하세요. 교회에 오셔서-저를 보고 겁내라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에 대해서 말입니다-교회 오셔서 밖에서 하는 것 고대로 하세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너무나 아프죠.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거죠. 또 살아가는 거죠. 이것이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서로 탓하고 공격하면서 눈 부릅뜨면서 위에서 눈 부릅뜨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거죠.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위를 보지 않는 겁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더 이상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겠습니까? 

이은태 목사님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지금 호주에서 목회를 귀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은 원래 한국전력을 다니다가 명퇴를 하셨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정리가 되신 거죠. 고난이 왔었겠죠. 힘들어하는 가운데 원래부터 아버지 앞에 서원한 것이 있었어요.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어서 이제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신학교를 갔는데 호주에 있는 학교로 가기로 했어요. 신학교로. 

돈이 별로 없잖아요. 만날 굶으면서 아버지 앞에 허덕거리면서 그렇게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몇 년 내에, 5년 내에 100억짜리 빌딩을 사고 수십만 평짜리 땅을 구입했습니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셨어요. 돈이 하나도 없는데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그 목사님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빌딩에 뭐가 들어왔냐면 선교센터들이 들어왔어요. 각 세계 방방곡곡에 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총괄하는 헤드코터가 들어선 거예요. 놀라운 축복이죠. 그 분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그 분은 그렇게 키웠을까? 나는 안 되는데. 뭐가 다른가? 
이 분은 나하고 뭐가 다를까? 궁금했어요. 
어머님이 너무 훌륭하세요. 사실 그 어머님 같은 역할을 제가 제 아들에게 해야 됩니다.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 돼요. 이 분은 그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공부 잘해라. 공부 잘해서 하나님 영광 드러내라. 나중에 돈 벌어서 좋은 일 많이 하고 하나님... 이런 얘기 하지 않았어요. 전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만 얘기하셨어요. 
“너는 평생 동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라.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네 인생을 살거라.” 

이것이 일관된 가르침이었습니다. 학력이 짧으시지만 현명하신 어머니시죠. 저보다 백만 배나 나은 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산다면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져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아들의 일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나 이걸 아셨던 분 인거죠. 저도 이제 아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면 이렇게 하는 거죠. 

“아들아!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네 인생을 살거라.” 

왜냐하면 그렇게 회복을 해야만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인 은총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이런 질문이 생기게 되죠. 알겠는데요, 목사님. 그럼 경외심은 어떻게 갖게 되나요?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나요? 어떻게 회복할 수 있나요? 

이 답도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아니고요 성경말씀에 보면 오늘 읽은 3장 앞에 2장이 있습니다. <2장 1절~4절>에 보면 그 답이 나와 있어요. 지금 읽을 시간은 없습니다만 이것을 제가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갈급한 심령으로 찾으라는 거예요. 

오늘 교독문에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 사람을 뭐라고 설명합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 갈급한 마음으로 찾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라는 겁니다. 그 말씀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그 말씀을 ‘아멘’ 하라는 것이죠.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인들이 요새 얼마나 똑똑한지 말입니다. 다 기준이 있어요. 말씀들을 때 뭡니까? 자기마음에 들면 ‘아멘’ 맘에 안 들면 ‘노멘’ 그러고 있습니다. 저부터가 그래요. 저도 학교에서 교무처장으로서 항상 채플 네 번 있습니다. 채플 들으러 가면 말씀 들을 때 좀 껄끄러우면 그러고 있죠. 그죠? 그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현대인이라서 그런 것 같죠. 이스라엘 백성이 수천 년 전에 이미 그랬습니다. 

<예레미야 6장 10절>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귀가 할례 받지 못한 이 백성들아 너희들이 왜 정신을 못 차리냐?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너희가 나의 말을 요구로 여기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 전하니까 맘에 안 드니까 뭐라고 말해요? “욕하냐?” 이런다는 것이죠. 

그걸 하지 말라는 거예요. 맘에 안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아멘”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직하고 행하고자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고자 헌신하고 결단해야 됩니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그 마음, 그러지 않고는 되지 않아요. 그렇게 해야 사실 우리의 뇌가 또한 변화되고 그 내용이 새겨져야 됩니다. 뇌에. 

뇌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요, 왜 이 말씀을 드렸냐하면 요즘에 사실은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최근에 밝혀진 사실 중에 하나는 반복적으로 우리가 하는 행동은 뇌에 프로그래밍이 된다는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입력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딱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걸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안 하면 뇌에서 경련을 일으킨대요.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에요.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술ㆍ담배 끊기 어렵죠. 술ㆍ담배 혹시 못 끊으신 분 있으면 끊으시기 바랍니다. 
술ㆍ담배 끊기 어렵잖아요. 그걸 옛날에는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술에 있는 알코올하고 니코틴이 굉장히 중독성이 강하다 그래서 못 끊는다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요새는 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뭐가 밝혀졌냐면 더 중요한 건 뭡니까? 담배피면 기분 좋아요. 술 시면 기분 좋습니다. 그렇답니다. 말도 잘해야 되겠네요. 그죠? 그러니까 뇌에 입력이 된 거예요. 그것 해야 돼.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뇌에서 경련을 일으켜요. 그걸 뭐라고 그래요? 금단현상이에요. 헛것이 보이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그런답니다. 술ㆍ담배 얘기하니까 안 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마음에 안 와 닿으시죠? 
요새 더 강력한 놈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것은 컴퓨터 중독이에요. 게임. 아시잖아요. 
컴퓨터 해야 돼요.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발작 일으킵니다. 단적인 예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얼마 전에 게임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게임 그만해.” 
어떻게 되었어요? 살해했죠. 
딱 단적인 예입니다.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해야 돼. 안하면 안 돼. 뇌에 프로그램이 되어 있습니다. 못하게 하니까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여기까지 얘기해서는 대부분 하시는 말씀이 나하고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서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운전에 관한 겁니다. 

운전. 저도 사실 첫 번째 분명히 말씀드리면 신호를 어기지는 않습니다. 분명합니다. 신호는 지키는데 운전하다보면 제가 급하게 운전하는 편이에요. 가다가 앞에서 답답하게 하면 차선 딱 바꿔야 되고 끼어들기 해서 막 가야되는 형이에요. 왜 그런가 봤더니 그게 이미 제 머리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운전석에 앉으면 자동으로 그렇게 합니다. 제 얘기니까 좀 좋게 얘기하면 다이나믹하게 운전합니다. 그런데 저만큼 흥미진진하게 다이나믹하게 운전하시는 분이 우리 협동목사님 중에 계십니다. 오해가 없으시도록 좀 더 밝히자면 힌트를 드리면 저보다 어린 분입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으면 성은 ‘ㄹ’로 시작합니다. 

어떻든 제가 운전을 하게 되면 이렇게 막 가요. 남들이 보면 왜 저러나 싶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게 편한 거예요. 왜? 뇌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난폭하지는 않습니다. 왜 제가 또 대비가 되냐 하면 이게 재미있는데요, 제가 3년 전에 1년 동안 미국에 안식년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 미국에 가서 맨 처음에 한국에서 프로그래밍 된 대로 쫙 가는데 우회전되는 딱 차가 들어왔어요. 거기 운전 못하잖아요. 

미국사람은 운전 못합니다. 대도시 말고요. 중소도시에 갔거든요. 끼어들기 굉장히 잘해요. 브레이크 밟고 제가 난리가 났어요. 크락션을 빵 울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크락션을 못 울렸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아무도 크락션을 안 울려요. 한 번도 못 들었어요. 그러면 그냥 브레이크 밟고 가거든요. 제가 사실은 프로그래밍이 바뀌어서 천천히 운전을 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운전을 하니까 다시 컴백이 된 겁니다. 뇌에 프로그래밍이 된 거죠. 
저는 유도 아니고 정말 난폭하게 운전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이 운전하는 모습을 비행기에서 동영상을 찍어서 그분에게 보여주면 그 사람이 이런답니다. “이 사람 미친 사람이네.” 절대 자기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무의식적으로 뇌에 이미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이 얘기를 왜 합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뇌가 죄를 짓게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죄를 짓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거예요. 죄를 짓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거예요. 죄를 짓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한 거예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그러지 하면서 죄를 짓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은혜가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한 거예요. 아니며 만날 왜 죽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성령님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 죄악된 본성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그 뇌를 극복하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넘쳐야 되고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죄를 멀리 할 수 없어요. 죄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멀리해라. 죄를 피해라. 나와 있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서는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죄를 멀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사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한국에서 이야깃거리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어졌고 하나님의 이름은 능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바로 세우시고 정화시키시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부로 세우시기위해서 위기를 주신 겁니다. 우리는 이 길을 선용해야 됩니다. 선용하면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교회가 더 교회답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로 가고 말겁니다. 

지난주에 신국원 목사님 설교하실 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제 좀 조용히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경외심 두려움 에드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만 상대방에 대해서 손가락질 하고, 이제 그만 소리 지르고, 이제 그만 글 쓰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뜨고 그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할 것인지 그 고민을 하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 앞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만 의지하고 이 위기를 놀라운 부흥의 기회로 만들어가는 우리 분당중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창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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