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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행 14: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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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행 14:19-28)
 
사람들이 살다가 목숨을 내놓고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제치하 때 주기철 목사님께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하실 수 있었던 건,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지키겠다. 목숨을 내놓고 교회를 지킨다.’ 이런 마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는 그런 고문과 회유와 압박과 힘든 일 가운데서도 목사의 권위와 품위를 잃지 않고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내 이 한 목숨 내놓고 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는 가운데서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3차까지 전도여행을 하고 마지막 4차 여행은 로마로 가는 여행을 했습니다. 그 마지막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하는 순교를 하는데 그는 로마까지 4차 전도여행 내내 목숨을 내놓고 일 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을 내놓고 순교할 각오를 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사도바울이 루스드라라고 하는 곳에서 당했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사도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언할 때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 장애인을 고쳐준 일로 인해서 이 루스드라에 있는 시민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는 신으로 신격화 하려고 했던 사건을 저희들이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도시에서 있었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앞 절,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 앞 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비시다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이라는 곳으로 내려와 복음을 증언했는데 거기서 박해를 받아 유대인들에게서 박해를 받아 피해서 루스드라에 내려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앉은뱅이를 고치는 놀라운 사역을 했었는데 이 사건으로 루스드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지요.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가정도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았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러니까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을 디모데가 보았고 알았다.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사도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앉은뱅이를 고쳐준 사건과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 모두를 디모데와 그의 가족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루스드라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나요? 

사도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앉은뱅이를 고쳐준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자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그런 소식이 들려오니까 이 이고니온에 있던 유대인들이 힘을 모아서 내려왔습니다. “아니, 하나님 이외에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 이외에 다른 어떤 것들을 가르치는 자가 있어?” 

이 사람들은 이 유대교의 율법과 유대교의 가르침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믿었기 때문에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무리가 루스드라에 찾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강하게 막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증언하니까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 있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사도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해서 돌을 던져 죽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신을 전달하거나 하면 사람들을 성 바깥으로 끌고 가서 돌로 때려 죽여도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합법적으로 살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스라엘의 성이 아니니까 그런 법이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복음을 증언하는 사도바울을 향하여 성 안에서 돌을 던져 사도바울이 돌아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고 죽은 것처럼 실신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유대인들과 마을에 있던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시신을 들어다가 성 바깥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은 죽은 줄 알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새 사람이 된 사람들과 사도바울의 일행이 사도바울의 장례를 치르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도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온 몸에 돌로 맞은 일로 인해 피투성이가 되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저렇게 돌에 맞고도 살다니! 사도바울은 피 묻은 몸을 이끌고 어느 집에 가서 닦고 치료받지 않지 않고 오늘 본문에 보면, 일어나 성으로 다시 들어갔더라. 

그랬습니다. 자기를 향해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그 이튿날 더베라는 곳으로 가서 또 다시 복음을 증언합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몇 십키로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거기까지 갑니다. 얼마나 몸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증언하는데 이 루스드라에서 있던 모든 일들을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아마도 소년시절이었을 때에 눈으로 다 목격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더베에서 복음을 증언하는데 그곳에서는 유대인들의 방해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몇 달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잘 증언하고 난 다음에 거기서 하나만 넘으면 자기 고향 다소가 있는데 다소에 들리지 않고 자기를 죽이려고 음모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 루스드라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갑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가서 복음을 증언하면서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설교를 하고, 그 지역에 있는 교인들을 섬길 수 있는 장로님을 택해 금식하고 안수하고 난 다음에 장로님들에게 교인들을 부탁을 하고 배를 타고 이제 자기를 파송했던 교회 수리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가만히 읽게 되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자기를 반대하는 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고 자기가 목회했던 지역의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다시 되돌아 가 복음을 증언하는 이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아름다운 사역을, 능력의 사역을 감당했을까? 저희들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더베까지 갔다가 거기서 산 하나만 넘으면 고향 다소, 그리고 다소에서 항구 쪽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면, 자기를 파송했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금방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로 가지 않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지금 몇 년 동안 1차전도 여행을 하고 난 다음에 몸도 피곤하고, 더군다나 루스드라에서 돌아 맞아 죽을 뻔 했었는데, 몸도 성하지 않은데, 우리 같으면 산 너머에 있는 고향에 들렸다가 재충전해서 새 힘을 얻고 난 다음에 다시 복음을 증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은 얼마나 좋은가요! 고향은 우리가 마음과 영혼과 몸을 쉴 수 있는 안식처 아닙니까? 이 다소에 가면 그의 부모님이나 또는 일가친척과 아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얼마든지 좀 편히 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안디옥으로 가기에 앞서서 복음을 증언했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다시 자기가 복음을 증언했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가져야 될, 더군다나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가져야 될 중요한 자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 전도자에 대한 열정, 조금 더 나가면 이 선교사의 열정을 가슴속에 담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다소로 가서 고향에 가서 쉬지 않고 이고니온과 이곳 루스드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너희는 가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이름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내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리고 그들을 제자로 만들라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명! 사도바울은 그것이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내놓고라도 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지키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이런 강렬한 열정이 사도바울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불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의 놀라우신 능력을 주셨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에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명령, 또 약속이 있습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게 되는데 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언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으려면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 이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입을 열어 복음을 증언할 수 없고 세계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언할 수 없습니다.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 선교자의 삶을 사는 것, 좀 더 나가서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성령의 놀라우신 능력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이 성령의 놀라우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도바울은 다소로 돌아가 쉬지 아니하고 자기가 복음을 증언했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되돌아갑니다.

그곳에 가면 박해와 음모와 살해의 위협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곳으로 다시 뛰어 들어 갑니다. 그를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그를 이렇게 순교의 자리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위대한 인물은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교우를 사랑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언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와 우리 모두가 이 성령의 능력을 사도바울처럼 받아서 이렇게 우리가 증언했던 복음의 내용이 아름답게 꽃피우고 있는가! 그리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이런 위대한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과 저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을 이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참다운 목회자의 마음이, 인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으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증언했을 때 듣고 회개한 많은 신도들을 향하여 뭐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라고 3가지 주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말씀을 증언 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이 사도바울과도 같은 목회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가? 한 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한 곳에서 머물러 목회하는 그런 지역교회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언하고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갑니다. 평생을 이렇게 순회전도를 하면서 선교를 하면서 교인들을 새로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 교회를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가 복음을 증언하고 더베로 갔다고 안디옥으로 내려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되돌아 갑니다. 가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다시 목회 돌봄을 합니다.

목회자는 물론 말씀과 성례전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지만 여러분 모두가 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심정을 갖고 주변에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만 목자로서의 돌봄의 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많은 성도들, 또는 교회 나오지 않지만 세상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같은 목회자적 돌봄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예수 믿다가 보면 사도바울처럼 돌에 맞기도 하는구나, 예수 믿다가 보면 저런 곤란과 환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는구나. 물론 그런 것만 있지는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다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지금 지도자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곳에 다시 돌아가 많은 교우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와 도우심과 사랑을 위로와 용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목회자 한 사람만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다 이런 아름다운 목회적 돌봄을 옆에 있는 순원들에게 우리 신도회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가정에게 여러분의 믿음의 이웃들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떤 내용으로 목회적 돌봄을 했나요? 

첫 번째, 그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했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굳세게 하다. 이 헬라어 동사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을 강하게 하다. 두 번째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서 그 사람의 이야기만 들으면 있던 힘도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힘 빠지게 만들고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나면 그 사람의 이야기만 들으면 없던 용기도 생깁니다. 왠지 모르게 그 사람하고 이야기 하면 희망을 느끼고, 왠지 모르게 그 사람하고 이야기 하면 양손에 힘이 들어가 불끈 주먹을 쥐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십니까?

만나는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 사도바울처럼 이 불안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굳게 해 주고 강하게 해 주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여러분의 교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위로와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일을 강하게 해 주는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 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은 교인들에게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라고 위로합니다. 

믿음에 머물러 있다는 말은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안에 내 말 안에 거하라.” 여기서 거한다. 라는 말과 머물다. 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문은 곁길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똑같은 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아에 있는 교인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믿음이 탄탄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외부의 공격과 환란과 박해와 핍박을 받아서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곁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설교를 들어도 어떤 경우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이 좋아서 세상으로 빠지는 사람들도 있고, 죄악 가운데로 빠지고 점 보러 가는 사람, 뭐 심지어는 굿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한 길로 가지 않고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내 말 안에, 내 안에 계속해서 한 길로 가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교인들을 향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 가운데 커다란 것 중의 하나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가운데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한 눈 팔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른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세상으로 가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려면, 이 성령의 위대하신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돌아가 교인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 믿음의 길 안에서 머물러 있으라.”

곁길로 가는 것은 방향을 잘 못 잡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운전하고 가시다가 차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쏠린다거나 왼쪽으로 쏠리면 어떻게 하시지요? 그러면 핸들을 똑바로 굳게 잡게 됩니다. 이 때 핸들을 굳게 잡지 않으면 차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가서 사고가 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똑바로 가려면 반드신 핸들을 정 중앙에 놓고 가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 딱 박혀 있어 좌우로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분이 누구냐?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님을 가운데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고 가운데로 계속 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이요? 자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에서 환란을 당했나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깨달았냐 하면, 예수 믿으려면 때때로 환란과 고난과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합격합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에 성공합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집니다. 예수 믿으면 사장님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됩니다. 영혼도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해집니다. 마치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이야기 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정말로 예수 믿으면 그런 좋은 일들만 일어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으려면, 고난과 시련과 채찍에 맞고 때때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과 고통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가지 때때로 우리의 삶에 고난과 환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고난을 당하고 환란을 당할 수 있으나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마지막에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여러분과 세상의 여정에 동행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십자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골고다의 언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돌에 맞는 환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승리합니다. 끝내 우리는 부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교인들을 위로하고 이런 말씀을 하고 난 다음에 장로님들을 세웁니다. 안수하여 금식하고 난 다음에 교인들을 세워 교인들을 위탁합니다. 장로님의 역할은,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타락하고 외로워하고 곁길로 가거나 마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면,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 기쁨을 함께 나눠 그들이 믿음 안에 굳건히 서가고 그리고 강해지고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환란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함께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 바로 교회 장로님들, 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가 다 낙심하고 누구나가 다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 교회 지도자들이 옆에서 도와주게 되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나라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았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물을 귀하게 여기고 이 성령을 통해서 내 믿음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이끌어 갈 수 있겠다. 라고 끊임없이 여러분이 성령에게 의지할 때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사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난을 겪고 환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복음을 지키고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위대하신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성령의 위대하신 능력을 가져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강하게 만들고 힘을 북돋아 주고 곁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믿음 안에 있으면서 환란과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 믿음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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