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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엑소더스(Exodus) 1 : 탄생 (출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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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더스(Exodus) 1 : 탄생 (출 2:1-10)
 

❚위대한 구원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유일무이한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또한 오늘 나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무엇일까요? 성경 전체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노래로 지어 부르며 성경 전체를 통해 헤아릴 수 없이 출애굽 사건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제 아버님이 포항에 내려오셨습니다. 1929년생이시니까 올해로 83세가 되십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이번에는 저와 아내에게 옛날이야기를 참 많이 하시더군요. 전에는 옛날이야기를 그리 많이 하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유독 두고 온 이북의 고향 이야기며 부모와 가족들 다 남겨두고 형님과 단 둘이 월남하신 이야기, 6.25를 겪은 이야기 등등 정말 짧은 며칠 동안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놓고 가셨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드셨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게 마련입니다. 고향 생각도 나고 지나온 삶에 대한 기억들도 많이 납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이런 이야기를 자녀에게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저 흘러간 옛날이야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들이 꼭 알아두었으면 하는,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은 “부모님이 또 옛날이야기 타령이시다” 지겨워하지 말고 그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손들에게 유독 출애굽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구원사건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를 이어 두고두고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 민족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오늘 너를 도와주지 않으시겠냐? 네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지라도 출애굽의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부터 ‘엑소더스’(Exodus)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엑소더스’란 영어로 출애굽 사건을 뜻하고 또한 출애굽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엑소더스’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탈출’(脫出)입니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그래서 ‘출(出)애굽기’입니다. ‘애굽 탈출기’라는 뜻입니다. 또한 바로의 압제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죄와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오늘부터 ‘엑소더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성경에 나온 출애굽 사건을 통해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살펴보고, 나아가 오늘 우리를 또 어떤 위대한 방법으로 구원하고 인도하실지 깨닫고자 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출애굽 구원 사건도 중요하지만 바로 지금 나에게 일어날 나의 출애굽 구원사건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출애굽의 위대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반드시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어디에서부터 ‘엑소더스’ 즉 탈출(脫出)해야 하는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비극, 아니 구원의 시작

출애굽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비극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비극의 서곡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유대인들을 탄압하고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똑같이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은 바로 출애굽기 1:8에 나온 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출현과 함께 시작됩니다. 요셉, 그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열한 째 아들로서 형들에게 배반당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일약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사람 아닙니까? 

요셉은 그 탁월한 감각으로 일가족을 다 구원했을 뿐 아니라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위기를 맞은 애굽 전체를 살려준 애굽 사람들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 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는 히틀러처럼 자기 민족의 생존에 유대인들이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중노동을 시켜 괴롭히고 나아가 그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남자 아기를 낳으면 무조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중노동에 시달릴 뿐 아니라 머지않은 미래에 아예 민족의 대가 끊기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십니까? 바로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을 준비시키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고난이 닥쳐오는 그 순간,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며 절망하려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이미 준비를 시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준비입니까? 우리를 도우실 준비,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위기와 고난이 닥쳐와 좌절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를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순간은 고난의 순간이 아니라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러니 그 순간은 좌절의 순간이 아니라 희망의 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다양합니다.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선가 나를 도울 사람을 예비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바꾸어 나를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실로 엄청나게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엄청나게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시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혼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사나운 파도에 배가 뒤집히고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 어느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겨우 도착해보니 그 섬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섬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짚을 엮어 애써 지어놓은 오두막이 불에 홀랑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젠 끝이로구나. 하나님, 왜 나한테는 이렇게 나쁜 일만 일어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그 순간 놀랍게도 멀리서 해안 경비대 구조선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구조대원이 도착하자 그는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는 구조신호를 보낸 적도 없고 제가 이 섬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요.” 그러자 구조대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분명히 당신이 연기를 피워서 구조신호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연기를 보고 지나가던 배가 우리에게 긴급 구조요청을 해왔습니다.” 애써 지은 오두막이 잿더미로 변해간다고, 이젠 다 끝이라고 절망하는 순간, 그 오두막에 붙은 불은 연기가 되어 구조신호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왜 내 인생에는 이렇게 힘든 일만 생기냐,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냐고 원망하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난이 바로 구조신호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닥쳐오는 그 순간, 그 신호를 보고 곧바로 구조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극의 시작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좌절로부터의 탈출(엑소더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辭典)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한 것처럼 성경에는 좌절이란 없습니다. 좌절금지입니다. 절망과 좌절로부터의 엑소더스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미 나를 위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 믿음을 가지고 꼭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엑소더스 하기 바랍니다.

❚위대한 탄생

바로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위해 세우신 사람이 모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노라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모세가 하마터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정황을 보면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도저히 태어날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즈음, 외할머니를 통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세상에 태어날 수 없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제 위로 세 명의 형이 있기 때문에 아마 어머니 뱃속에 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틀림없이 유산을 시켰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제가 잠이 참 많습니다. 

아마 어머니 뱃속에서도 꼼짝 않고 잠만 잤던 모양이지요. 어머니는 뱃속에 아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지내다가 어느 날 몸이 좀 이상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그런데 임신한 지 이미 한참 되어서 유산은 안 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낳은 것이 저라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하마터면 여러분 앞에 제가 서있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적인 탄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절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비록 여기에는 이 부부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출애굽기 6:20에 이 부부가 아므람과 요게벳이라고 나옵니다. 이 부부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여느 때 같으면 축하하고 잔치를 벌이겠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바로 왕의 추상같은 명령에 의해 아들이란 아들은 모조리 나일 강에 던져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겼다가는 부모 또한 죽임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니 이 부부가 아들을 낳고 어떻게 합니까?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아들이 잘 생겨서 목숨 걸고 석 달을 숨겨 둔 것이 아닙니다. 이 ‘잘 생겼다’는 낱말은 준수하다, 튼튼하다는 뜻과 더불어 ‘비범’(非凡)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이 아이가 어딘가 비범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목숨 걸고 아기를 숨긴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부모 눈에 비범하게 보이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부모의 눈에는 자기 자식이 다 비범하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뭔가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특별하고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이런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는 무조건 내 자식,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자녀의 비범함을 눈치 챈 것입니다. 비록 출애굽기 본문에는 이들의 믿음에 대해 직접 나와 있지 않지만 히브리서 11:23에서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7:20은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모세의 준수함은 단순한 외모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말씀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잘 난 것”을 뜻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이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단순히 차마 제 자식을 죽일 수 없어 모험을 했다기보다 모세가 분명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숨을 건 위험을 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기를 숨긴지 석 달이 지난 후 아기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우는 어찌 보면 참 무모한 모험을 한 것도 하나님이 이 아이를 책임지고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고, 결국 이 믿음대로 아기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내어 아기는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왕자에 버금가는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의 자녀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냥 사람의 눈으로 자녀를 보게 되면 부모가 두 가지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하나는, 내 자식이라고 마냥 귀하게만 보고 마냥 떠받들게 되는 실수입니다. 제 자식에게 눈이 멀어 무조건 귀하게만 떠받들면 틀림없이 버릇없고 세상 험한지 모르는 못난 자녀를 만들고 맙니다. 두 번째 실수는 사람의 눈으로 자녀를 보면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 외적인 조건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공부도 못하고, 못나고 무능하고, 남들과 비교하니 더 한심하고 실망스럽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자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실수가 일어납니다. 사람의 눈과 하나님의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내 자식이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아들 만들려고 목숨도 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자녀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부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부모가 위대한 부모입니까? 재산이 많거나 열심히 공부 많이 시키거나 뒷바라지 잘 하는 것? 아닙니다. 큰 재산 물려주는 것? 아닙니다. 부모의 위대함은 그 부모가 얼마나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내 자녀를 바라보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아이가, 내 자녀가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관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보기에는, 사람 눈에 보기에는 실패한 듯 보여도 하나님 앞에 성공한 자녀가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이 보기에,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성공한 듯 보여도 하나님 앞에는 버림받은 자녀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모세의 부모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을 택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 내 아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크게 위대하게 쓰실 자녀야, 그러니까 목숨도 건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진짜 목숨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위대한 부모의 첫째 조건은 바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가진 부모에게서 위대한 자녀 모세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부모가 이런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갈대 상자에 든 모세처럼 우리 자녀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반드시 책임지시고, 보호하시고 결국 최상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의 탄생은 위대한 합작품(合作品)이었습니다. 누구와 누구의 합작품이냐? 하나님과 모세의 부모의 합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과 모세의 부모의 큰 믿음이 합작하여 모세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탄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자녀를 믿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세상의 눈으로 보는 태도로부터 탈출하십시오. 엑소더스 하셔야만 이 위대한 합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큰 믿음과 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합작하여 우리의 자녀도, 자녀손도, 또 우리 교회의 다음 세대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크게 쓰임 받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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